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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적 철학은 보수적인가?

1980년대는 젊은이들에게 형이상학의 수난시대로 꼽힐만하다. 그 시절 형이상학이라는 말을 입밖에 내는순간 반동분자 소리듣기 딱 알맞았으니. 그 이유는 알수 없으나 형이상학은 변증법의 반대말로 사용되었고, 변증법은 민중의 방법론인 반면 형이상학은 지배자들의 사유방식이 되었다.

찰나의 구원, 찰나의 행복(영화 블랙북에서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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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버호벤 감독의 영화 Black Book은 첩보물의 모양을 띄고 있지만 매우 불편한 영화다.

영화는 우선 흔한 설정에서 시작된다. 가족을 나치에게 모두 잃어버린 유태인 소녀가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와 만난다. 그렇다면 영웅적인 투쟁이 시작될 것이고, 여성주인공은 반드시 독일군 장교에게 접근하여 정보를 캐내는 미인계를 쓰게 되어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독일군 장교는 알고봤더니 깊은 교양과 인품을 가진 훌륭한 기사였던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 장교와 정말로 사랑에 빠졌다. 이 미쳐돌아가는 전쟁판에 과연 이들의 사랑이 유지될 수 있을까?

어쨌든 독일군 장교는 그 지긋지긋한 나치 노릇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주인공과 함께 도망친다. 저 잔혹하고 무자비하고 미쳐돌아가는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유태인 레지스탕스와 독일군 장교라는 정말 이루어질 가망 없는 한쌍의 연인은 그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공간인 은신처의 텐트 안에서 처음으로 평화와 안식을 누린다.

이때 들려오는 음악이 모차르트의 디베르티멘토 K136의 2악장이다. 시종 긴장과 살상과 총성이 난무하던 영화 한 가운데 잠시 들려오는 모차르트의 선율은 그야말로 블랙인 영화속에 비추이는 잠깐의 빛이 되어준다. 폴 버호벤 감독도 이런 효과를 노리고 모차르트를 삽입했으리라....

제도권 교회에서 모차르트를 꺼려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의 음악은 신이 할 일을 대신한다. 비록 찰라간일지라도 그 순간은 이 세상을 넘어선 초월의 경지를 느끼게 하며, 한없는 편안함과 기쁨을 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미친듯이 확성기를 울려대는 바그너 음악을 들으며 만행을 저질렀던 독일군이 숙소에 돌아와서는 모차르트를 목마른 사람처럼 갈구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리라... 하긴 스탈린조차 죽기 직전에 모차르트를 듣고자 했다. 피아니스트를 새벽에 소환해서 연주하라는 독재자스러운 요청을 했지만 잘 진행되지 않자 피아노협주곡 레코드를 들으며 임종했다고 한다. 아, 그는 구원받았을까?

그러니 모든 지배자들에게 모차르트는 버겁다. 그는 지배자에게 필수적인…

모차르트의 아뉴스 데이(Agnus Dei)

아뉴스 데이는 통상 미사곡의 마지막 부분이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Agnus Dei qui tolis pecata mundi
천주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여
Miserere nobis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Donna nobis pacem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미사 전례의 순서상 이 부분은 최후의 간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최후의 간청에 화답하여 영성체가 이루어지고 그 덕에 평화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아뉴스 데이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간청하는 부분은 첫부분인 키리에로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영광을 찬미하고, 사도신경으로 신앙까지 확인했는데 다시 간청하는 부분이 나온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아뉴스 데이는 미사의 마무리답게 모든 걱정과 번민을 털어내는 역할을 한다. 특히 오페라 아리아 풍의 대단히 투명하면서 아름다운 곡을 많이 집어넣는데, 그 결과 듣는 이들은 이미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 부분인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부분은 간청이 아니라 '주여 우리는 평화를 얻었습니다.'라고 외치는듯 기쁨과 환희에 가득찬 부분이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듯 하다. "이미 스스로의 힘으로 평화를 얻을만큼 노력한 다음에라야 주의 은총을 갈구할 수 있다. " 그의 오페라에서 자주 반복되는 주제처럼 용서는 충분히 반성해서 사실상 용서가 아니라 응징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일수 있는 상태라야 주어지며, 은총은 충분히 노력하여 은총이 아니라 저주를 내리더라도 즐겁게 받을수 있는 상태라야 받는 것이다. 아! 기복신앙에 물든, 수동적인 ㅂ자판기 신앙에 물든 한국 교회(성당도 마찬가지)가 이 메시지를 들어야 하는데......

먼저 K137 장엄미사의 아뉴스 데이.... 간절한 갈구에 이은 영적 기쁨으로 충만한 도나노비스파쳄이 이어진다. 이곡은 모차르트가 16세에 작곡했는데 아무리 모차르트라도 이 나이에 이런 곡을 쓴다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롤링 스톤즈... 저항과 해방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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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은 롤링 스톤즈지만, 소식적에는 이런 혁명적인 노래를 불렀다. 롤링 스톤즈의 혁명성은 이 노래처럼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가사를 쓴 노래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의 가사는 주로 연애와 섹스에 대한 것이며, 어떤 규율도 규제도 거부하는 심신의 유목주의로 가득차있다.

그들은 하모니를 무시하며, 음악 기법을 무시하며, 비틀즈처럼 예쁜척 하지도 않고, 배운척 하지도 않는다(역설적이게도 롤링스톤즈의 멤버들은 모두 배운 사람들이다. 반면 지적 이미지로 보이는 비틀즈 멤버들은 교육계층이 아니다).

그래서 롤링스톤즈의 음악은 머리가 아니라 바로 심장에 꽃힌다. 그 중 미국과 영국 정부의 관용의 한계를 넘어버린, 그래서 금지곡이 되어버린 이 곡 "거리의 투사"는 이후 의식이 깨어있는 수많은 로커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었다. 영화 '식코'의 삽입곡으로 등장하기도 했는데 식코의 주제와 너무 잘 어울린다는 반응이었다.

저항하고, 고발하되, 당당하고 즐거움을 잃지 않는 스톤즈의 세상을 뒤흔들었던 노래... 공연만하면 바로 폭동이 일어났던 롤링스톤즈의 가장 대표적인 폭동음악. 레코드 자켓부터 노골적이었던... 68혁명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

2008년 서울에 너무 어울리는 노래.... 가사의 런던을 서울로 살짝 바꾸어서 들어 보기를......


두개의 버전을 비교해보기 바란다. 나중것은 롤링스톤즈가 언플러그드 공연때 부른 실황녹음이고, 앞의 것은 원곡(1969)이다.





The street fighting man(거리의 투사)

Ev'rywhere I hear the sound of marching, charging feet, boy
'Cause summer's here and the time is right for fighting
in the street boy
But what can a poor boy do except to sing for a
Rock'N'Roll Band 'cause i…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Kyrie eleison, Christe eleison

통상 미사곡은 단 두줄의 가사로 구성된 키리에(연도)로 시작한다. 자비를 갈구하는 것이다. 미사의 전체 순서는 자비를 갈구하고 영광을 찬미한 뒤 믿음, 속죄, 접신의 순서로 이어진다. 자비의 갈구가 제일 먼저라는 것은 속죄와 찬양을 강조하는 한국기독교(그냥 기독교가 아니라 한국기독교다)와 큰 차이를 보인다.

자비의 갈구는 조건이 없다. 무겁게 짐 지고, 고통스러운 자는 누구나 자비를 갈구할 수 있다. 자비를 갈구함에 자격이 있을수 없지 않은가?

모차르트는 천재였기에 그 누구보다도 이 키리에를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의 재능에 비례하여 고통과 비원도 커졌기에... 대주교의 명에 의해 밝고 간결한 곡만 써야 했던 잘츠부르크 시절의 경쾌한 키리에에도 느껴지는 그의 비원은 K317, K337 미사의 키리에에서 잘나타난다.

마침내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인 모차르트의 키리에  K341에서는 초월적인 염원이 마치 인류를 대신하여 울리는듯 하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레퀴엠 미사의 키리에서 이 염원은 지축을 흔드는 간절함과 동시에 고도로 이성적인 2중푸가의 견고함으로 나타난다.

그는 우리 인간을 대신하여 신에게 갈구하지만 동시에 이성을 가진 존엄한 존재로서 항의하는것이다.

아, 참으로 키리에가 요구되는 2008년 아침....


우울한 아침을 경쾌하게

저 독재자 감도 안되는 거짓의 얼굴을 앞으로 몇년을 더 보아야 할까?
저들은 정말 촛불이 아니라 횃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우울은 저들에게 돌리자. 우울은 부르주아의 병이다.
우리는 항상 경쾌하다. 우리는 상상력의 아이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RAINBOW의 Kill the King을 올려본다. 가사를 킬더 쥐로 들으시면 더 신날듯


촛불에 대한 조정환 선생의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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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환 선생께 미안!

2008년 촛불봉기: 다중이 그려내는 새로운 유형의 혁명

조정환(자율평론)

1. 머리글

2008년 5월 2일에 시작되어 오늘(5월 26일)까지 56일 동안 지속되고 있는 촛불봉기는 연쇄적으로 확산되면서 제기된 그들의 요구들 중 그 어느 것도 아직 결정적으로 쟁취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무력해 보이는 촛불봉기는 폭발의 순간에서부터 그 소용돌이치는 일련의 전개과정 속에서 기존의 낡은 고정관념들과 관습들, 그리고 관계들 모두를 송두리째 찢어버렸고 새로운 삶의 도래를 요청하고 또 증언하는 불가사의한 ‘괴물’로서 지금도 광장과 거리와 가정과 온라인 연결망 곳곳에 충격과 쇄신의 힘을 불어넣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밤을 잊고 거리에서 열정적인 시위와 토론에 열중하며 일상에서 눌변으로 굳게 닫혔던 입들이 다변으로 활짝 열려 감동과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언설을 쏟아내고 마음 깊은 곳에 잠복해 있던 해학력과 상상력을 터뜨리며 거대한 무리의 행위예술을 공연한다. 시위가 종합예술이 되고 밤에 이루어지는 거대한 소비활동이 새로운 삶을 빚어내는 용광로가 되며 앞섰던 자가 뒤서고 뒤에 섰던 자가 앞서며 가르치던 사람이 배우는 사람이 되고 지금까지 내내 배우기만 했던 사람이 가르치며 이른바 ‘지도자’들이 훼방꾼으로 기능하고 이른바 ‘열패자’들이 투사가 되며 지식인이 무지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대중이 지성의 불을 내뿜으며 늘 지도부를 자임했던 정당이 다중의 행동을 생중계하는 매개자로 되는 이 총체적 역전과 융합(퓨전)의 드라마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촛불봉기의 이 매혹 때문에 촛불이 타오를 때는 그 열기에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촛불이 잠잠해지면 안타까움과 불안 때문에 잠들지 못한다. 비가 오면 혹시나 촛불이 꺼질까 우비를 챙기고 집을 나서며 누군가 다칠까봐 지켜보는 눈이라도 되어 주어야겠다며 집을 나서고 시위대가 배고플까봐 김밥과 우유를 싸들고 집을 나서고 아예 저항의 노숙을 하자며 텐트를 챙겨들고 집을 나선다.
‘우리는 아직 아무 것도 쟁취하지 못했다. 하지만 …

사회를 이끄는 이는 반대와 혼란을 용납할줄 알아야 한다

사회를 이끄는 이, 더군다나 그가 교인이라면 반대와 혼란을 용납하고, 그것이 당연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신의 완전성을 전제하는 것이고, 이는 자신을 신과 맞서는 교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다음은 하버드 대학의 철학 교수였던 알프레드 노쓰 화이트헤드의 말이다.

... 세계의 창조는 힘에 대한 설득의 승리다. 인간의 가치는 설득에 응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은 선악의 선택지를 보여줌으로써 선탁할 수도 선택될 수도 있다. 문명이란 보다 고상한 선택지를 구현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에 내재하는 설득력에 의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힘에 의존한다는 것은 아무리 불가피한 것일이자도 일반 사회에서나 살아남은 개인에게나 문명의 파탄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활기찬 문명에는 언제나 불안의 요소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며 관념에 대한 감수성은 호기심이나 모험이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명적인 질서는 스스로의 공적에 의해 살아남으며, 자신의 미완성을 인지하는 능력에 의해 변형된다.

 (알프레드 노쓰 화이트헤드 "관념의 모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