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는 동의어다.

근본주의적인 프로테스탄트, 유연한 프로테스탄트를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다. 애초에 종교개혁의 발단이 근본주의적이었으니.
흔히 알려진것처럼 루터나 칼뱅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정치화나 독재, 혹은 부패에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면죄부에 반대한 것도, "돈을 받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후천적 노력"에 의한 구원을 정당화하기에 반대한 것이다.

그들은 기실 부패와 정치화가 아니라 토마스주의 및 스콜라 철학과 싸웠다. 즉 신앙을 점점 이성 아래에 넣으려는 시도에 반발한 것이며, 신의 존재, 신의 뜻을 인간의 이성과 추론으로 찾아내고 정당화하려는 시도에 반발한 것이다. 토마스 주의의 극단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존재와 정당성의 근거를 갖게되는 신이었으니... 그 무수한 신존재증명들을 보라.

루터는 이러한 후천적 노력와 이성적 파악에 반대하여, "성서속의 진리"와 "오로지 신앙"을 강조한 것이다. 즉 성서의 내용은 이성적 추론의 대상이 될수 없는 무조건적인 진리이며, 구원에의 길은 인간의 특별한 노력이 아니라, 오직 신의 의지소관인 바, 오직 복종하고 뜻에 맡기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북부유럽의 가부장적 군주정과 잘 결합하는 논리였다.

이로써 프로테스탄트적 인간형이 등장한다. 그는 사회, 인류에 대해 관심이 없다. 오직 성서 안의 말씀과, 맡은 바의 작은 일만 개미처럼 성실하게 할 뿐이다. 그렇게 생각없이 살면서 자신의 구원을 오직 신의 뜻에 위탁하는 자, 그게 프로테스탄트적 인간이다. 그러니 이들이 자본의 초기 축적에 지대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종교개혁의 정신이 왜곡되어 기독교가 근본주의화 된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 그 자체가 이미 수백년 전에 일어난 기독교의 복음주의, 근본주의화 운동이었던 것이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이른바 숙의민주주의에 대하여(1)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학종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학종 다음의 셀프학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