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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 '음악사회학' 중 청취자 유형 (펌글)

아도르노가 분류한 음악청취유형  


▲ 프랑크푸르트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에는 빈에서 음악에 종사하였으나, 1931년 모교의 철학강사로 취임하였다. 1934년 나치스에 의해 추방되어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1949년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다시 독일로 귀국,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사회조사연구소(社會調査硏究所)를 개설하였다. 1950년에 프랑크푸르트대학 철학교수로 취임하는 한편, 파시즘 연구를 주제로 한 《권위주의적 인간(權威主義的人間)》을 간행하는 등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의 사상은 체계성을 거부하고, 각 이데올로기 영역에 내포된 정신의 변질적 경향을 날카롭게 분석해내는 데 특색이 있으며, 근대문명에 대하여 독자적인 비판을 제시하였다. 또 그는 현대음악의 성격에 대해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바 있다. 주요저서로는 위에 기술한 것 이외에 《현대음악의 철학》(1949), 《Soziologica》(1962), 《부정적 변증법(否定的辨證法)》(1966) 등이 있다.
1. 18세기의 음악비평가 로흐리츠는 음악회에 참여하는 관중의 청취유형을 넷으로 구분했다. 첫째, 허영과 유행으로 음악을 듣는 그룹, 둘째 음악을 오직 귀로써만 듣는 그룹, 셋째 음악을 오직 이해력으로 듣는 그룹, 넷째 음악을 모든 영혼으로 청취하는 그룹.

2. 베셀러에 따르면 음악작품이 탄생한 시대에 따라 청취유형이 달라진다. 그는 시대적 음악양식과 청취유형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주장하며, 르네상스 음악은 '알아듣는 청취', 바로크음악은 '연관시키는 청취', 고전음악은 '능동적 청취', 낭만음악은 '수동적 청취'를 하게된다고 주장했다.

3. 아도르노는 음악청취 유형을 8가지로 구분하며 이를 사회적 개념으로 정리하고 심리상태와 연관짓는다. 이들 유형은, 구조적 청취유형, 유능한 청취유형, 교양 청취자유형, 감성적 청취유형, 질투 청취유형, 재즈 청취유형, 오락 청취유형, 무관심적이며 비음악적이고 반음악적인 청취유형.

첫째, 구조적 청취유형은 음악을 완전히 적절하게 청취하는 형으로 음악전문가와 직업음악가에게서 나타난다. 그들은 음악의 구성과 논리를 정확히 파악하는 유형이다.

둘째, 유능한 청취유형은 음악의 구성이나 논리는 알지 못하면서도 음악을 이해하는 형으로 음악적인 사람이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유형으로 19세기까지의 유럽 귀족층을 예로 든다.

셋째, 교양 청취자유형은 곡을 완전히 들으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아름다운 선율과 같이 그들에게 감동을 주는 단편적인 부분만 듣는 것이 특징이고, 전시효과적 기교에 감탄한다. 이런 태도에 대해 아도르노는 이를  '물신숭배적'인 청취라 규정한다.

넷째, 감성적 청취형은 음악을 평소에 억눌렀던 감정의 표출을 위한 도구로 삼는 유형으로, 이들에게 음악이란 자신의 불안한 정서를 부어넣을 그릇이나 다름 없으며, 음악과의 일치감을 통해 자신에게 결여된 정서를 얻고자 한다.

다섯째, 질투 청취유형은 감성적 청취유형과 정반대의 유형으로, 주로 바흐와 그 이전시대의 작품들을 들으며, 루바토나 장식음 등이 지나치게 들어간 감상적인 연주를 철저히 배격하는 금욕주의적 성향을 보여준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그들은 스스로 끊임없이 금지해야하는 행동에 대한 피학증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피학증은 그들의 필수조건으로서, 이 집단은 집단적 억제 성향을 보여준다.

여섯째, 재즈 청취유형은 고전과 낭만음악을 혐오하고 공인된 문화에 저항하며 파벌을 이룬다는 점에서 질투 청취유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음악을 본래 다이내믹하게 자유로이 전개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무능력이 이 청취유형의 성격이라 규정했다. 반면 이 유형은 프로이드적 의미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갖고 아버지에게 반항아면서도 그에게 굴종할 준비도 되어있다.

일곱째, 오락 청취자유형은 양적으로 가장 많은 청취유형으로 음악을 오직 오락으로 청취한다. 이들에게 음악은 의미관계가 아니라 자극이다. 자의식이 약하고 수동적인 청취자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여덟째, 무관심하며 비음악적이고 반음악적인 청취유형은 타고난 소질 부족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초년기의 가정에서 난푹스러운 권위를 경험했을 때 나타날 수 있다. 이들 유형은 지나치게 격정적이고 현실적인 성향과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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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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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