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윌리엄 제임스처럼 그 이름만 알려진 철학자는 드물 것이다. 고등학교 윤리교과서에 빠짐없이 등장했던 실용주의(이명박은 당장 이 이름에 대한 모독을 중지해야 한다)에서 퍼스, 제임스, 듀이 3인방의 이름은 얼마나 단골로 시험문제에 등장했던가?

하긴 칸트는 의무론, 밀은 공리주의 등등도 참 자주 나왔던 문제지만... 그래도 칸트와 밀은 제법 책으로도 읽혔지만, 그리고 같은 프래그머티스트 중에서도 듀이, 그리고 최근의 로티는 무척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지만, 사실상 그 운동의 핵심이었던 제임스의 책은 구하기도 힘들고 읽히지도 않는다. 그의 주저 "실용주의"조차 소개되지 않았으니....

그래도 꿩대신 닭으로 제임스의 명저 "종교적경험의 다양성"을 읽음으로써 아쉬움을 달랠수 있다.

여기서 종교가 아니라 종교적 경험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 부터 심상치 않다. 즉 어떤 교리가 옳네 그르네, 천국이 있네 없네 따위에 대해서는 관심 가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다만 제임스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경험들 중 "종교적"이라고 분류될 수 있는 경험이다. 그리하여 여러 경험들 중에서 "종교적"이라 칭할만한 경험의 여러 양상들을 교파, 교단과 무관하게 제시하면서 이런 경험들의 총체로서 종교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유신론과 무신론에 대해서모 말하지 않는다. 그건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종교적"이라고 불리는 경험이 개인과 사회에 어떤 "효용"을 가지는가가 그의 유일한 관심사다.

설사 가장 위대한 신이 실재한다 할지라도, 종교적 경험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제임스는 그 종교를 거부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또 설사 미신의 잡신이라도 그것과 관련한 경험이 효용이 있다면 그것을 긍정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종교의 가치는 각 시대, 각 사회의 맥락에 종속된다. 영원한 종교는 없고, 다만 그 시대, 그 상황에서 의미있는 종교적 경험만 남는 것이다. 따라서 1500년대의 개신교와 오늘날의 개신교도 그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어떤 경험을 제공할까? 우리가 판단해야 할 근거는 오직 그것이 될 것이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이른바 숙의민주주의에 대하여(1)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학종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학종 다음의 셀프학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