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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놀이 시간



(작년 12월쯤에 썼던 글입니다)


초등학교엔 '중간놀이'라는 시간대가 있다.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2교시 마치고 20분 동안(보통의 쉬는 시간은 10분) 신체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인데, 이것이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교사와 아이들 모두에게 고역인 시간이었다. 말이 '중간놀이'이지 중간 시간대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노는 것이 아니라 미리 짜여진 각본(학교교육과정)에 따라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체조(집단체조)' 같은 것을 하곤 했던 것이다.


지금도 일부 학교에서는 이렇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학교에서는 2005학년도에 내가 생활담당을 할 때 이것을 "중간에 자유롭게 놀이 하는 시간"으로 바꿨다. 교사의 역할은 요일별로 학년당 한 분이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어린 양떼를 돌보는 목자"의 역할을 하는 것을 기본 취지로 정해 직원협의회에 통과 시켰다. 사실 '목자'의 역할도 필요 없지만, 당시에는 관리자가 보기에 교사들이 아무 것도 안 하고 노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일종의 타협점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그런데 작년에 이어 올해는 학교교육과정 편성에서 '중간놀이'를 없애버렸다. 어떠한 결정단위에서 이렇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아이들을 위한 배려는 절대 아니다.

(이 글과 관련하여 그 진의를 악의적으로? 의심해보건대, 10분을 줄이면 그만큼 아이들을 10분 일찍 집으로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자기시간이 10분 더 확보되는 것 때문일 지도 모른다. 설령 이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교사들이 "아이들의 행복을 빼앗아 간다"는 것을 모르는 점에서 그들의 판단을 좋게 볼 수 없다.)



20분의 중간놀이 시간은 아이들에게 꿀맛 같은 시간임에 틀림없다. 2교시 마침 종이 울리기가 무섭게 공이나 줄넘기를 들고 쏜살같이 뛰쳐나와 운동장이나 학교 뒷뜰에서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즐겁게 논다. 얼마나 공을 차고 싶었으면, 며칠간 비가 계속 올 때면 참다참다 더 이상 못 견디겠던지 녀석들은 우산을 들고서 공을 찬다(저학년은 이런 모습이고 고학년은 아예 비 맞으면서 찬다).

10분으로 축소된 2교시 쉬는 시간, 들어갈 종이 치면 아이들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부지런히 교실로 향한다.

그런데, 교사들은 아이들만큼 바쁘게 교실로 돌아가지 않는다. (초등학교 교사들은 2교시 마치고 동학년협의회실에서 '커피타임'이란 이름의 '문디 반상회'를 갖는다)

심지어 어떤 학년은 들어갈 종이 친 뒤 10분이 지나도록 개긴다. 선생이 없는 교실이 조용할 리가 없다. 시끌벅적 야단법석... 선생은 이런 소요를 막기 위해 '반장'이라는 이름의 간수를 시켜 칠판에 떠드는 아이 이름을 적게 한다.

('커피타임'을 가지려면 사실 10분으로는 모자란다. 동학년 구성원들이 다 모이려면 5분이 걸린다. 모이는데 5분이 걸리는데 커피 끓이고 학년부장이 업무 전달하고 수다 떨고 하는 중간에 벌써 종 친다. 그러므로, 애시당초 중간놀이 시간을 10분으로 잡은 자체가 무리였던 것이다. 애들 10분 일찍 보내고 싶으면 '커피' 욕심을 내지 말던가......)



교육의 장에서, 도대체가 있을 수 없는 진풍경이 '학생'이 아닌 '교사'의 편에서 빚어지고 있다.

교장/교감은 뭐 하는 사람이냐고?

그렇다. 2003년 개교 이래 지금까지 우리 학교 교장/교감들은 그저 좋은 사람이었다. 교사가 늦게 출근하고 근무시간 전에 자율적으로 퇴근해도 불러서 지도하는 법이 없고 위와 같이 수업시간 지키지 않는 교사에게도 이런저런 쓴소리를 던지는 법이 없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다. "사람 좋다"는 게 뭘 뜻하는지...

교장/교감은 다면평가 관철시키기에는 최선을 다해도 교사 통제 하는 일에는 결코 '승부수'를 띄우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전교조(우리 분회)' 눈치를 보는 것도 있는 듯하다.

이 글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서 이 점이 중요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지 않겠다.

단위학교의 실정에 따라 교육 모순의 성질이 다르고 또 관리자와 분회 사이의 대립 접점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공립학교에서 학교장이 아이들을 망치는 경우보다는 교사들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초등 전교조가 '표준수업시수법제화'를 주장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의 양심에 물어봐야 할 것이다.


교원평가가 현장을 황폐화시킬 괴물이기에 반대해야 한다면...... 학교 내에서 현재 교사집단내에 팽배해 있는 그릇된 문화, 즉 "우리 내부의 괴물"에 대해서는 스스로 청산할 의지와 노력이 뒤따르고 있는지에 대해 뼈를 깎는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 학교, 교사들이 근무하기에 너무 좋은 학교라 소문 나 있다고 한다. 한편으론, '관리자의 무덤'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지금까지 내가(우리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치열하게  싸워왔던가 하는 회의감이 밀려온다.


..................


특수반이라서 편할 것이라고 학년초 업무분장 나눌 때 내게 '생활지도'를 맡겼다. 초등의 생활담당교사나 중등의 학생부장은 '간수(guard)'이다. - 생활지도는 영어로 'life guidance'인데, 한국의 학교에서 생활지도는 생활통제로 변질되어 기능한다. 교사는 guider가 아니라 guard이다.

요즘 같이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많이 움직인다. 따라서 내가 많이 움직여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복도에서 달리는 녀석들 이름 적었다가 적당한 날 아침에 방송을 한다. 방송으로 이름 적힌 녀석들을 호출한다. 이렇게 해도 아무도 나보고 '학생 인권 유린' 어쩌구 안티 거는 사람 없다. 오히려 칭찬을 한다. ㅇㅇ샘, 조용한 학교 만들기 위해 수고하신다고...


아이들이 얼마나 순진한지... 불려온 녀석들은 마치 "죄인"인 양 고개를 숙인다.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생각해본다. '생활지도'인가 '생활통제'인가?


물고기가 헤엄 치기 위해 태어났듯이, '아이'라는 생명은 달리기 위해 태어난 것을... 이들이 펼치는 장난(play)은 '일탈'이 아니라 건강한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신체활동(play)'이 아닌가?

누가 죄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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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