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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교사제에 대하여(작년에 썼던 글)

승진이 교사의 보상이 될 수 있는가?
   
교직사회에서는 “수석교사제” 시범운영 계획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다. 한국교총은 이것이 자신들의 교섭의 개가라며 기세를 올리며, 교육부는 이것이 교육현장을 왜곡시키는 승진병의 해법이라며 환상을 유포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내용을 살펴볼수록 이번에 발표된 수석교사제는 목적이 모호할 뿐 아니라, 그것을 달성할 수단도 부재하다. 수석교사제의 목적은 승진제도의 대안이거나, 그동안 부족하다고 지적되어온 교사의 외적 보상의 보완일 것이다. 이 둘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면 옥상옥이며 예산낭비다.
승진부터 살펴보자. 교사 승진제도가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심지어 교육 왜곡의 주범으로 지목당한 이유는 교육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현재 교사의 승진은 교감, 교장이 되거나 장학관, 혹은 연구관이 되는 것 외에 없다(흔히 알려진 바와 달리 장학사, 연구사는 교사와 동급이다). 그런데 교감, 교장이나 장학관 등은 행정직이다. 따라서 행정 업무에서 우수한 실적을 올린 사람이 선발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교사의 각종 행정사무가 원칙적으로 “잡무”라는 것이다. 유일한 승진사다리인 교감이나 장학관 코스에 올라타기 위해 교사들이 주무인 “교육”이 아니라 “잡무”에 몰두해야 하는 것이 기막힌 현실이다. 교육법에 따르면 교사는 “법이 정한 바에 따라 학생을 교육한다”. 행정직원은 “각종 행정사무를 수행한다”. 현재 교사들이 분담하고 있는 행정사무는 엄밀히 말해 행정실 인력이 충분치 않은 현실을 감안해 도와주는 것이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경기장 직원이 부족해서 부득이 야구선수가 각종 뒷정리도 분담하고 있는데, 누가 청소를 잘했냐를 기준으로 4번타자를 결정한다면 여기에 누가 승복하겠는가?
물론 교육부도 이를 인정하여 행정사무가 아니라 “교육에 충실한” 교사들에게도 승진의 기회를 주기 위해 수석교사제를 실시하는 것이라 한다. 즉 행정직 승진 코스와 교육직 승진 코스를 두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의 문장들을 진지하게 읽어보면 행정직이 승진코스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문제의 근원임을 알 수 있다. 교감, 교장, 장학관은 명백히 행정직이다. 따라서 그들의 적성은 교사의 그것과 판이하며, 그 직종으로의 전환은 승진이 아니라 업무 변경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즉 교사경험이 있는 행정직원인 것이다. 구청 서기가 교사의 상관이 아니듯, 교감과 장학관도 교사의 상관이 아니다. 교감, 교장은 학교의 각종 재정과 행정을 책임지는 실무자가 되며 장학관은 필요한 지원과 조언을 제공하면서 행정적 조정을 담당하는 관청 직원이 되는 것이다. 이런 학교에서야 비로소 수석교사가 학교의 각종 교육 프로그램이나 장학 등을 지원하면서 교육 3주체들을 이끌어가는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교육부는 진정 이런 학교를 만들 의지가 있는가?
그들의 계획에 따르면 수석교사들을 교육청 소속으로 해서 자기 학교가 아니라 지역 학교들을 돌아다니면서 사실상 장학사 일을 시키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게 과연 수석교사인지 아니면 교육청 하급 심부름꾼인지 참으로 혼란스러워진다. 마치 행정관청 일을 조금 나눠서하는 것이 곧 승진이라는 터무니없는 공식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수십년을 단지 평교사로 늙어가는 것이 교사들의 사기를 저하시키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혹은 그저 시간만 채우고 월급이나 받아가는 교사와 열심히 연구하고 교육한 교사간에 아무런 차등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물론 지금처럼 신규교사나 수십 년을 매진한 원로교사나, 혹은 그저 호봉만 올린 교사나 웬만한 교수와 맞먹는 학식과 덕망을 갖춘 교사들이 거의 동일하게 막교사로 취급되는 현실은 큰 문제다. 노고에 대한 보상은 당연히 필요하다. 보람과 긍지라는 내적 보상에만 의존하라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수석교사제가 묵묵히 학식과 덕망을 축적하고 아이들을 사랑해 온 교사들에 대한 보상이 전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보상은 자신들의 지식과 덕망에 대한 합당한 사회적 대우와 존경이지, 무슨 지위나 금전 따위가 아니다. 그리고 사회적 대우와 존경은 바로 자율권을 확대해주는 것, 신뢰를 보여주는 것에서 증명되는 것이다. 이미 교사에 대한 각종 포상, 표창이 승진에 눈먼 교사들의 쟁탈물로 전락한 현실을 감안하면 현재의 교감, 교장 승진제도가 온존한 상태에서 장학사 비슷한 수석교사제가 도입된다고 한들, 그 자리가 진정 학식과 덕망을 축적한 분들에게 돌아갈 것 같지 않다. 더구나 교육부 계획에 따르면 어느 정도 수준의 경력과 실적이 누적되면 자동적으로 수석교사라는 등급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숫자를 미리 정해놓고 경쟁을 붙여서 관청이 최종 선발하는 방식을 내놓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교단을 황폐화시켜온 교육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승진점수에 만 몰두하는 목적전치 현상의 대상만 하나 추가시킨 꼴이 된다. 승진점수 채우는 고등수학에 능한 사이비 교사들이 “교감 못되었으니 하다못해 수석교사라도”하면서 몰려들 것이 불 보듯이 훤하기 때문이다. 결국 마땅히 보상을 받아야 할 교사들은 또 다시 소외되고 말 것이다.
참교육에 매진해온 교사들이 바라는 보상은 별다른 것이 아니다. 후배교사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하고픈 것이며, 거기에 합당한 명예를 받는 것이다. 그들을 교대/사대의 겸직교수로 보임하여 앞으로 강화될 것이 예상되는 교생실습을 전담하게 한다거나, 혹은 학교 내에서 멘터나 컨설턴트의 역할을 맡게 하면 충분할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현행의 각종 교육청 장학은 폐지되어야 한다. 수석교사의 잔소리가 장학사의 잔소리에 추가되는 형국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쩌다 한 번 와서 신소리나 해대는 장학사보다는 같이 근무하면서 조언해줄 수 있는 존경받을 만한 중견교사가 젊은 교사들에게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어느 경우에나 지금까지 시대를 거슬러 어거지로 유지해온 학교에 대한 교육청의, 교사에 대한 행정 관료의 우위를 포기해야 한다.
요약하자. 수석교사제가 승진제도의 개선이 되려면 교육직이 아니라 행정직이 승진으로 간주되는 현행 승진제도 자체가 개편되어야 한다. 즉 교장, 교감, 장학관은 상급자가 아니라 다른 직종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수석교사가 제대로 된 승진제도가 될 것이다. 수석교사제가 보상에 대한 보완이 되려면, 관청이 선발하려는 발상을 버리고, 덕망과 학식이 입증되면 숫자와 무관하게 모두 그 자격을 획득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그 업무도 교생실습이나 학교 내 각종 자문으로 해야지 계획안처럼 교육청이 배당하는 엉뚱한 남의 학교 돌아다니며 잔소리나 하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수석교사제는 아무짝에 소용없는 승진병의 확대판에 불과할 것이다. 여기에 낭비할 예산이 있다면 교사들의 도서구입비를 세금 공제라도 해주는 것이 교육에 훨씬 보탬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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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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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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