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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의 편지들 중 일부

.......우리가 “쾌락이 목적이다.”라고 할 때, 이 말은 우리를 잘 모르거나 우리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방탕한 자들의 쾌락이나 육체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다. 왜냐하면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계속 술을 마시고 흥청거리는 일도 아니고,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도 아니며, 물고기를 마음껏 먹거나 풍성한 식탁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모든 선택과 기피의 동기를 발견하고 공허한 추측들(신과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추측들)-이것 때문에 마음에 가장 큰 고통이 생겨난다-을 몰아내면서, 멀쩡한 정신으로 계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가장 큰 선은 사려깊음이다. 사려깊음은 심지어 철학보다도 소중하다. 왜냐하면 모든 다른 탁월함들은 사려깊음에서 생겨나며, 이는 우리에게 “사려깊고 아름답고 정의롭게 살지 않고서 즐겁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며, 반대로 즐겁게 살지 않고서 사려깊고 아름답고 정의롭게 사는것도 불가능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탁월함은 본성적으로 즐거운 삶과 연결되어 있으며, 즐거운 삶은 탁월함으로부터 뗄 수 없다.

정말로 그대는 신에 대해 경건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자연의 목적을 잘 계산한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이런 사람은 우리가 좋은 것들의 한계를 충족시키거나 얻기쉽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으며, 반대로 나쁜 것들의 한계는 시간적으로 짧을뿐더러 경미한 고통을 가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또한 그는 운명 -어떤 이들은 운명을 만물의 주인이라 불렀지만- 을 비웃으며, 우리의 행동 -이들 중 어떤 것은 필연에 의해 생겨나며 어떤 것은 우연에 의해, 또 다른 것은 우리 힘에 의해 생겨난다- 을 결정할 힘이 우리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려 깊은 사람은 다음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필연에는 아무 책임이 없으며, 우연은 유동적이며, 우리 힘에 의해 생겨나는 일은 다른 주체를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칭찬이나 비난이 따라붙도록 되어 있다.”

정말로 자연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운명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신에 대한 신화를 듣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화에 따르는 것은 신들을 존경함으로써 달랠 수 있다는 희망을 암시해 주는 반면, 운명의 노예가 되는 것은 달랠 수 없는 필연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사려 깊은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우연을 신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왜녀하면 신의 행동에는 무질서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사려 깊은 사람은 우연을 알려지지 않은 모든 것들의 원인이라고 간주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해 좋은 것 또는 나쁜 것이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큰 선 또는 악을 위한 기회가 우연에 의해 주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생각에 의하면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큰 성과를 이루는 것보다는 이성적으로 숙고했으나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편이 낫다. 왜냐하면 잘못된 판단을 내렸으나 우연 때문에 성공하는 것보다는 옳게 판단했음에도 불구하고 행동으로 자신의 판단을 입증하지는 못한 편이 낫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들을 그대 스스로뿐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밤낮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그내는 자나깨나 고통받지 않게 될 것이며, 사람들 사이에서 신과 같이 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불멸하는 선 속에서 사는 사람은 사멸하는 존재들과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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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