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그 존재론적 모순 (2)

플라톤과 피타고라스. 이 두 현자들의 음악관은 기술적 의미를 넘어 그대로 평가적 의미까지 가지게 된다. 즉 음악가가 지녀야 하는 혹은 지녔다고 간주되는 전형적인 자질이나 속성, 즉 그가 제대로 된 음악가인가를 판단하는 준거로도 사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적 측면에서도 두 사람의 견해는 정 반대가 된다. 플라톤이 생각한 타고난 음악가는(부정적 의미지만) 규율과 속박을 싫어하고, 정열이 과도하게 넘쳐서 간혹 정신이 나가기도 하는, 즉 자주 신들리는 그런 사람이다. 이런 견해는 오늘날까지도 가장 강력한 예술가 상으로 남아있다. 베토벤이나 반 고호의 과장된 초상화들 속에, 엄청나게 화려하게 포장된 푸시킨이나 바이런의 그 많은 일화들 속에, 이중섭이나 이상의 신화들 속에, 파가니니나 리스트의 귀신같은 모습 속에 말이다. 반면에 피타고라스가 생각한 타고난 음악가는(그에게는 긍정적 의미) 무질서한 소리들을 수학적 규칙을 통하여 조화롭게 재구성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역시 오늘날까지도 강력한 예술가 상으로 남아있다. 바하나 괴테의 그 심각한 모습의 초상화 속에, 마치 성자와 같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화상 속에, 지휘봉을 마치 정교한 실험도구처럼 들고 있는 카를 뵘이나 빌헬름 프루트벵글러의 사진 속에, 파블로 카잘스나 아르뚜르 루빈시타인의 마치 철학과 교수 같은 경건하고 매서운 모습 속에.

그렇다면, 이 둘 중 어느 것이 음악의 진짜 모습일까? 플라톤과 피타고라스. 지명도에서나 내공에서나 서로 만만치 않은 고대의 두 거인들. 과연 누가 음악을 잘못 바라본 것일까? 이게 화끈하게 결론이 나버리면 참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둘 다 옳고, 또한 둘 다 틀리다. 한마디로 둘 다 우리가 음악이라고 부르는 현상을 잘 설명하고 있다.

아니, 기껏 플라톤이니 피타고라스니 끌어들이더니 결국은 불가지론 아니면 상대론이라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러나, 나를 탓하지 마시라. 그래서 애초부터 존재론적인 모순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모순. 얼마나 편리한 말인가? 게다가 존재론적인 모순이라니. 이거야말로 세상의 모든 무지와 불가지론을 가장 멋지게 포장할 수 있는 근사한 수사법이 아닌가?

그러나, 이쯤에서 난 모순에 더 이상 기대지 않으려고 한다. 마르크스가 저승에서 내 뺨을 갈기려고 달려오는 것이 느껴진다. 아, 그가 뭐라고 나를 비난하고 있다. 뭐, 모순이란 용어를 더럽히지 말라고? 아, 그러니까, 대립되는 존재가 서로 투쟁하는 과정 중에 새로이 발전되어나가는 것이 모순이라고? 그러니까. 미래에의 전망이나, 단초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단지 부정이라고? 허, 거 참 따지기는. 그러나 일리는 있다. 발전의 단초라.

단초를 찾아보자. 이 모순을 해결해서 종합으로 나아 갈 수 있는 단초를. 종합이라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나의 정신적 멘토인 아도르노가 매섭게 나를 째려보지만, 일단 모른 척 하자. 왜냐하면 내가 탐구하는 방법, 나의 사유 방법은 항상 그의 ‘부정변증법’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단초는 바로 플라톤과 피타고라스 두 현자가 모두 빼먹은 관점이 있다는 것이다. 즉 플라톤의 체계에서도, 피타고라스의 체계에서도 공통적으로 결여된 관점이 있다는 것이다. 정 반대의 주장을 편 두 사람은 과연 공통적으로 무엇을 빠뜨렸을까? 그것은 바로 음악이란 사물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라는 사실을 망각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음악은 귀신의 장난이었고, 피타고라스의 입장에서는 음악은 태초에 이미 확고하게 존재한 법칙이었다. 그렇다면 음악가나 음악을 듣는 청중은 무엇인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지만 쇼펜하우어 이전까지 수많은 철학자와 미학자들은 늘 음악을 작곡자의 입장에서만 설명했다. 그리고 청중은 늘 수동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음악의 실제 현상화는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음악은 귀를 통해 청취자의 대뇌 속에서 어떤 반응을 야기 시킬 때 비로소 음악이 된다. 음악은 기본적으로 듣는 것이지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음악의 본질은 뮤즈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태초의 법칙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늘날도 꾸준히 음악을 듣고 있는 나를 포함한 모든 청취하는 사람들의 뇌 속에 있는 것이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음악이라고 하는 행위를 만들어 내었고, 그 행위의 결과를 즐기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행위의 의미 또한 사람들의 일상적으로 음악을 듣는 생활 속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좀 더 현실적이 되어서 즉 청중의 입장이 되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하여 음악을 듣는가?” 나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래저래 따져보면 결국은 플라톤이 우려하는 바로 그 열광을 얻기 위해서 음악을 듣지, 직각이등변삼각형과 장음계와의 연관성을 통한 행성의 궤도증명을 하자고 음악을 듣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일단 플라톤의 판정승이라고 해도 좋을까?

유감스럽게도 아니다. 음악을 만드는 이, 즉 작곡가나 연주자에게 물어본다면 전혀 다른 대답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작곡자나 연주자에게는 음악이라는 것이 유희나 해방이 아니라 최악의 경우에는 일종의 노가다일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노가다의 결과물을 일반 대중들은 해방의 도구로 접수하는 것이다. 메탈리카의 공연에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열광하는 청중들은 메탈리카의 음악이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된 방정식인가를, 그래서 메탈리카가 얼마나 초긴장 상태에서 소리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는지(비록 입으로는 다 같이 로큰롤! 놀자!라고 하지만) 왕왕 망각한다.

결국 플라톤과 피타고라스가 비긴 셈이다. 음악은 결국 플라톤 적인 요소를 내용으로 삼고 피타고라스적인 요소를 형상으로 삼아 형성된 모순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만 빠져도 음악이 성립되지 않는다. 플라톤만 존재하는 음악은 괴성과 광성의 연속일 뿐이고 피타고라스만 있는 음악은 따분한 음향 실험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감상자는 플라톤을 요구하고 작곡자는 피타고라스에 의지한다.

즉, 감상자와 작곡가가 음악을 하는 목적이나 태도가 애시당초 아예 다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예술분야에 있어서도 그렇겠지만.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창조자가 되기보다는 감상자가 된다. 작곡은 그것과 다른 별도의 일이 되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겨났을까?

사실 우리는 무의식중에 플라톤적인 열광을 음악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나도 역시 그런 무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실제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음악의 역사는 플라톤을 쳐부수는 피타고라스 승리의 역사였다. 이게 점점 자라서 문제가 된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음악을 살찌웠고, 그리고 나서는 음악의 목을 조르고 있다. 마치 아이들을 살찌운 뒤 잡아먹는 마녀처럼. 오, 무시무시한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는 실제로 밀교 집단의 우두머리였고, 집단의 비밀을 누설한 자는 가차없이 숨통을 끊었다고 하는데, 음악이 무슨 죄가 있다고....그런데, 잠깐 여담....자, 이쯤되면 내가 아도르노의 방법론을 따라가고 있음이 느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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