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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면 행복할까(1) 세네카의 경우

요즘 자꾸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행복에 대한 글을 찾아 보기도 한다. 그런데 행복에 대한 글들을 읽으면 점점 행복이 너무 어렵다는 생각에 불행해진다. 이렇게 살면 행복할까? 세네카는 이렇게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어디 들어보자......


행복해지고 싶다 -이 말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지만, 이처럼 분명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은 말도 세상에 없을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고 그 행복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천 명에 한 사람도 어디에서 행복이 오는지 모르고 있다.

그런데 우주는 암중모색하듯 무작정 행복을 열심히 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서둘러 잘못된 길로 발을 들여 놓음으로써 갈수록 당초의 목표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 “우리가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둘째 “어느 길로 가면 가장 빠른가”를 살펴야 한다.

바른 길을 가면 우리는 하루하루 나아지지만 반대로 곁길로 접어들면, 즉 바른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면, 곧 미궁에 빠져 언제까지나 방황과 착오의 나날을 보낼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능한 길잡이를 갖는 것이다.

보통 여행의 길이라면 부근에 사는 사람이 바른길을 가르쳐 줄 수도 있고, 또 목적지에 이르는 길이 대체로 정해져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행복에의 길은 이와 반대로 사람들이 밟고 간 발자취가 위태롭기 짝이 없으며,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바른 길을 가르쳐주기는커녕 터무니없는 방향으로 헤매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수들이 떼를 지어가듯 하는 것이 아니라, 전례보다는 이지에 의해 자기 자신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패배의 연속으로, 한 사람이 쓰러지면 다음 사람이 그 위에 넘어지고 그 다음 사람이 그 위에 또 쓰러진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인다.

이러한 잘못은 곧 “군중이 진리와 정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군중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행복한 생활은 결코 투표에 의해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은 관습에 대해 비판하기보다는 맹신하기 쉬우며 결코 좋고 나쁜 것을 검토해보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군중은 반드시 비속한 사람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위층도 포함하는 말이다. 나는 군중이라는 말을 눈에 보이는 외관이 아니라 사물을 올바로 판단하는 마음을 기준으로 삼아 사용하고 있다.

세속의 영달은 사람의 머리를 혼미하게 하여 한동안은 관심을 끌지만, 누구나 조용히 마음속으로 자문해 보면 반드시 다음과 같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일만 골라서 했다”고 말하거나 “간구한 것 보다 오히려 두려워 멀리한 편이 훨씬 더 나은 일이었다”고 말이다.

진정한 행복은 번뇌를 벗어나 신과 인간에 대한 우리 의무를 깨닫는데 있다. 장래의 일은 전혀 걱정하지 말고 현재를 즐길 일이다. 즉 희망이나 걱정에 사로잡혀 기뻐하거나 두려워할 것 없이 현재 자기가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할 일이다.

인류에게 참으로 위대한 축복은 우리 가운데, 즉 눈이 닿는 범위 내에 있다. 그런데 인간은 눈을 감고 어둠 속을 헤매다가 보기 흉하게 넘어져 뒹굴고 있는 것이다. 행복 자체에 넘어져 뒹굴면서도 그것이 자기가 열심히 찾고있는 행복인줄 모르고 있다.

정밀은 마음의 평형된 상태로서 행운과 불운에 의해 흥분하거나 의기소침해지는 일도 없다면 이러한 평형은 인간 완성의 상태이므로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고 인간의 능력이 최고 정점에 도달하여 각자 자기 스스로 설 수 있게 된 상태다. 자기 이외의 것으로 자기를 뒷받침하면 넘어지는 수가 있지만,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지하면 넘어지지 않는다. 올바르게 판단하고 그 판단에 의지하는 사람은 완전한 평안을 즐길수 있고 삼라만산을 올바로 관망한다. 그리고 그 행위에 질서와 절도가 있어 예의바르고 그 본성에 자애가 넘치면 이지에 의해 삶을 바르게 꾸려나간다.

확고불변한 판단력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은 뜬구름에 지나지 않으며 한 가지 일에 시종일관하는 것 역시 옳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환영과 두려움으로 미혹하는 바를 극복했을 때에는 반드시 가슴에 자유와 평안이 깃들기 마련이며, 이때야말로 저 물거품 같은 향락에의 욕구(최선의 방법으로 즐겨봤자 결국 공허하고 유해하다) 대신에 영원한 평온과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합당한 즐거움을 올바르게 즐기는 것에 대해서, 당연히 바랄수 있는 사교적인 우아한 취향에 대해서까지 트집잡을 생각은 없다. 아니, 오히려 사람들이 언제나 즐겁고 -물론 이 즐거움은 본인의 영혼 속에서 생기고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우러난 것이라야 하지만- 언제나 웃는 얼굴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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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