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전교조내 운동권 정파를 비판함(2) -정파가 어쩌다가 생겼나?

지난번에 전교조내 운동권 정파들의 경직된 믿음과 그것이 야기한 갑갑한 상황에 대해 개관하였다. 이제 구체적으로 전교조내 정파들의 현황과 실태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것을 보고 분개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기가막힐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포스트가 조중동 잡것들에게 이용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경우라도 다 현재보다는 났다. 어차피 깨져야 할것들이니.

우선 전교조내 정파가 무엇인지 정의하자. 정파란 조합원들 중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여론 주도층, 즉 활동가들이 일정한 사회, 정치적 견해에 따라 모인 의견집단을 말한다. 얼른 보면 사안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임의적인 모임 같지만, 뿌리깊은 인맥으로 엮어져서 지금은 단지 의견집단이라기 보다는 마치 조선시대 노론, 소론 같은 단단한 당파로 고착되어 있다.

이하의 내용은 이금자 선생님의 성공회신학대학 석사논문에서 상당부분 따온 내용이다.

그 뿌리는 전교조가 세워지기도 전인 전교협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교협 건설의 두 주역은 YMCA, 흥사단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공개조직과 서울 남부지역에서 서서히 수를 늘려나가고 있던 비합법 지하조직이었다. 아무래도 전자는 시민운동, 개혁운동적 성향이 강하고, 후자는 레닌주의, 좌파적 성향이 강할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교협 발족까지 그 뜻을 같이한다. 공개조직 활동가들이 주로 대표와 공식적 직함을 맡았고, 비공개조직 활동가들은 각 현장 조직을 감당했다.

이들이 처음 갈라선것은 전교협을 노동조합으로 전환하자는 공개조직파에 대해 시기상조이니 제2교직단체로 출범해야 한다는 비공개조직파가 반대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노동조합으로 발족했고, 다 알다시피 가혹한 탄압으로 1500명이 해직되었다. 해직되지 않은 20000여명의 교사들은 자신이 조합원임을 숨기고 활동해야 했다.

이때 비공개조직파를 중심으로 대량해직 사태를 더욱 쟁점화하면서 공세적으로 돌파하자면 20000명의 이름도 다 밝히면서 즉, "어디 다 짤라 봐라!"하면서 밀어 붙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를 "비판안"이라 불렀다. 반대로 무리한 투쟁은 그나마 남은 조합원들의 탈퇴를 불러오니 현장  교사대중의 수준과 이해에 맞추어 대중적 지지를 획득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붙었는데, 이를 "기존안"이라 불렸다.  이로써 "과감한 선도투쟁"과 "현장의 대중정서"라는 두개의 대립적인 전술이 분명해졌고, 처음으로 정파라 불릴만한 집단이 이 두 전술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때 기존안에서 다시 분열이 일어났는데, 이른바 10인안 그룹이라 해서, 교원노조가 문제가 되면 교사조합이라는 이름으로라도 합법화를 먼저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기존안 진영의 나머지와 비판안 진영이 합세하여 이들을 공격하였고, 결국 10인안 그룹(주로 YMCA 출신들)은 기존안 진영에서 분리되어 나름의 인맥을 바탕으로 참교육교사연대(참교연)라는 별도의 정파로 독립하게 된다. 이후 뜻밖에도 "노동조합으로 합법화"가 이루어지며(사실은 비정규직 입법과 교환한 더러운 뒷거래의 결과), 노조사수론을 끝까지 움켜쥐었던 기존안 그룹이 합법화 이후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자, 족보를 그려보면 이렇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족보를 보면 알수 있지만 공교롭게도 전교협 시절부터 이루어진 인맥이 주장을 달리해가면서 계속 유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찾사를 이루는 진영이 시종일관 원칙론과 강경론을 주장하는 반면, 반대쪽 진영은 일정한 경향성이 없이 선거때마다 이합집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은 일단 이 정도로 해두고, 다음부터 각 정파별로 하나하나 비판해 보도록 하자.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