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스킬의 친구들 -그뤼미오

흔히 바이올린 소나타라고 잘못 불리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2중주는 매우 사랑스러운, 혹은 사랑의 장르다. 잘못 알려진 바와 달리 이 형식은 바이올린이 연주하고 피아노가 반주하는 것이 아니다. 엄연히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2중주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균형잡힌 2중주가 말이 그렇지 쉬운것은 아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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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뛰르 그뤼미오

이 매우 불균형한 상대기 때문이다. 그 음량에서나 음역에서나 바이올린은 피아노의 상대가 아니다. 실상 피아노를 제대로 상대하려면 바이올린, 첼로가 함께 서야 한다. 그래서 피아노트리오가 피아노를 포함한 실내악의 보편적 장르로 자리잡은 것이다. 갸냘픈 바이올린 홀로 거대한 피아노를 상대하려면 피아노의 활약에 그저 추임새나 넣어주거나, 혹은 바이올린을 위해 피아노가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이 2중주는 작곡가의 역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까다로운 형식이며, 그 결과 초1류급 작곡가의 작품 외에는 거의 살아남지 못한 장르이기도 하다. 이 형식으로 많은 작품을 남긴 작곡가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그리고 브람스 정도가 있고, 그 외에는 기껏 한 두개의 작품을 남기거나, 남기긴 했으나 무시당하거나 했다.

하지만 작곡가가 훌륭히 밸런스를 맞추었다고 해서, 끝나는게 아니다. 연주자도 또한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단 두명의 연주자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실력이 조금이라도 모자라면 금새 균형이 무너진다. 따라서 이 장르는 최고의 작곡가가 작곡한 곡을 최고의 피아니스트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해야만 하는 초절한 장르다. 물론 잘 맞아떨어지면 음악의 극치를 느낄수 있지만, 잘못하면 그야말로 최악을 경험할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장르는 바이올리니스트와 피아니스트 모두에게 크게 부담되는 장르다. 특히 이 장르가 레파토리의 주종을 이루는 바이올리니스트에게는 자신의 짝이 될수 있는 수준급 피아니스트를 확보하는 것이 화급의 과제가 되곤 했다. 하지만 화려한 솔로악기인 피아노에서 최상급의 위치를 가진 연주자가 선뜻 2중주를 하겠다고 나서는 일은 흔하지 않다. 결국 관건은 우정이다. 우정이 없으면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이 장르에 뛰어 들어서 더군다나 장기간 솔로를 접어두고 다른 연주자와 박자를 맞추어야 하는 상황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중주를 해야 함은 서로 자신의 음악관을 상대방의 그것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집세기 마련인 음악의 대가들에게는 무척 짜증스러운 일이다. 3중주, 4중주의 경우는 애초에 솔로보다는 앙상블을 전공으로 한 연주자들이 감당하기에 이런 일이 드물지만, 2중주에서는 필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이 장르는 특히 더 아름다운 장르다. 결국 살아남은 2중주 짝배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두 예술가가 서로 우정으로 뭉쳤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며, 서로 자신의 소신과 고집을 양보했거나, 우연히 서로의 예술관이 일치한 행운을 누렸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역사상 피아노, 바이올린 2중주의 이런 행복한 커플은 얼마 나오지 않았다. 자주 나온다는게 이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커플 중 최고로 치는 커플이 클라라 하스킬과 바로 아르튀르 그뤼미오 짝이다(물론 해블러, 셰링 짝, 펄만, 바렌보임 짝, 최근의 바딤, 베레조프스키 짝도 훌륭하지만 역시 비교가 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풍성한 감성을 우아하게 표현할줄 아는 연주자들인데, 현명하게도 연장자인 하스킬은 자신의 표현력을 절제하면서 그뤼미오의 바이올린이 가진 호소력있는 정감을 최대한 살려주면서 완벽한 하모니를 연출한다. 마침 하스킬의 또 다른 베스트 프렌드 게자 안다와 동갑이기도 했던 그뤼미오는 이후 하스킬이 세상을 떠날때까지 늘 무대에 함께 올라 수많은 명연주를 남겼다.

피아노 2대로 연주할때는 게자 안다와, 바이올린으로 연주할때는 그뤼미오와... 디누를 잃은, 가족이라곤 하나도 없던 하스킬이지만, 그녀의 말년은 가히 외롭지 않고 참으로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이 두 친구는 모두 하스킬보다 나중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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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뤼미오와 함께 지낸 하스킬 만년의 행복한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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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킬이 남긴 마지막 말도 그뤼미오에 대한 것이었다. “내일 공연은 힘들 것 같구나. 그뤼미오 씨에게 죄송하다고 전해주렴.” ...이것이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나는 살면서 진정 천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세 명 만났다. 한 사람은 아인슈타인이었으며, 한 사람은 처칠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 누구보다도 현격히 차이 나는 두뇌의 소유자는, 바로 클라라 하스킬이었다." - 챨리 채플린

하스킬과 그뤼미오가 함께 연주한 모차르트의 소나타 K.378의 1악장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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