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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킬의 친구들. 디누 그 이후....게자 안다

예술가들의 치열한 삶, 우정, 동료애, 그리고 결코 잊지않는 그들의 소명의식은 그 어떤 종교보다도, 혁명적 사상보다도 감동적이다. 어쩌면 그들이야 말로 진정 인류의 구세주이자 대속자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고통을 대신한... 그런 점에서라면 클라라 하스킬은 참 야속하게 살았다. 마치 신이 약이라도 올리듯....

1950년 디누 리파티를 잃어버린 클라라 하스킬은 거의 최악의 외로움과 번민에 허덕인다. 하지만 신은 그녀에게 고통과 희망을 동시에 주며 단련 시키려 한듯하다.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하스킬 앞에 젊은 디누를 연상시키는 천재 피아니스트가 또 한명 나타났다. 그는 바로 피아노의 음유시인이라 불리게 될 게자 안다(1921~1976).

헝가리 출신인 게자 안다는 같은 동유럽계이기도 해서 더욱 하스킬에게 친근하게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스승에게 배워, 같은 계열의 음악을 한 디누 리파티와 달리 게자 안다는 바르톡, 코다이의 제자였다. 따라서 하스킬이 쇼팽 계보를 이어온 프랑스 피아니즘의 후계자라면 게자 안다는 리스트의 계보를 이어온 헝가리 피아니즘의 후계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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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럼에도 헝가리에서 온 이 샤프한 피아니스트는 그 동안 세밀한 감성에 치중해온 하스킬에게 강철같이 단련된 손가락의 힘을 바탕으로 한 정교한 피아니즘을 선보이며 깊은 감명을 주었다. 반면 게자안다는 기교와 힘만으로는 표현할수 없는 하스킬의 깊이있는 연주에 또한 감명 받는다.

마침내 이들은 1955년 바흐와 모차르트의 두대의 피아노를 위한 작품들을 함께 연주하며 정반합의 새 경지를 이끌어낸다. 하스킬은 안다를 통해 낭만파와 현대음악으로 안목을 넓히고, 안다는 하스킬을 통해 고전파쪽으로 안목을 넓혔다. 마침내 초절한 기교파 연주자였던(당연히 리스트의 후예니...) 안다는 하스킬의 권유와 설득으로 주전공을 모차르트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역사에 길이 남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전집을 녹음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도 게자 안다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연주는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최고의 음반으로 손꼽히고 있다. 안다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음악을 말할때 반드시 첫손에 꼽는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바로 클라라 하스킬이라는 정신적인 스승이자, 무대 위의 동료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스킬은 안다의 전설적인 모차르트 연주를 듣지 못한다. 안다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녹음은 하스킬이 죽은 1960년 뒤에야 시작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하스킬의 죽음이 안다로 하여금 그 작업을 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최고의 모차르트 연주자로 불렸던 클라라 하스킬은 정작 모차르트 음반을 몇장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마치 유언을 집행이라도 하듯, 게자 안다는 바로 이어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연주를 완성했다. 그 과업을 완수한 1976년 게자 안다는 마치 소명을 다했다는 듯이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지금 클라라 하스킬 콩쿠르와 게자 안다 콩쿠르가 공교롭게 모두 스위스에서 개최되고 있어, 이들의 우정을 기념하고 있다.

여기에 클라라 하스킬과 게자 안다가 함께 연주한 단 하나의 음반에서 음악을 올려본다. 바하의 두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맑고 유연하고 자연스러운 하스킬의 터치와 정교하고 명석한 안다의 터치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당신의 감식안을 시험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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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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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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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