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싸움판이라도 정서는 좀 다듬어야 하겠기에,괴테, 들장미, 그리고 슈베르트와 브람스


요즘 선거야 뭐야 해서 다들 신경들이 날카롭습니다. 그럴때일수록 예술의 향기 속에서 삶에 대한 성찰과 사색이 필요하겠죠. 그런 의미에서 괴테, 슈베르트, 그리고 브람스를 선사합니다. 1년 전의 글이지만, 다시 한번 돌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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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절세의 명시 들장미. 독일어의 압운을 지키면서 읽어보면 더더욱 이 시가 왜 명시인지 알수 있지만, 그 시의 의미에 대해서는 엉뚱한 가십수준의 내용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가십이 어느 목사의 딸을 사랑했다가 결혼하지 못해서 그 죄책감에 "남자들이여 처녀를 함부러 건드리지 마라"라는 뜻에서 이 시를 썼다는 것이리라. 물론 그 죄책감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저런 청교도적인 시를 썼다고 주장하는 것은, 괴테의 유물론적 경향과 범신론적(같은 뜻인가?) 성향을 완전히 망각한 유치함의 극치다.

괴테의 예리한 풍향계는 남자와 처녀의 관계에서 바로 근대성의 특성을 읽었다. 그것은 바로 의식철학, 즉 주체-객체 철학이 가져오는 인간과 자연의 분리, 자연의 대상화, 그리고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핵심인 소외였다. 물론 그는 이를 명료한 이론적 진술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을 이론적 진술로 드러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의식철학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이는 오직 천재적인 직관으로만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게오르크 짐멜이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괴테는 자연과의 일체속에 있기 때문에 주관적인 감상과 객관적인 자연이 구별되지 않는다. 즉, 한 소녀를 아프게 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과 자연을 객체화 함으로써 느끼는 분리감과 소외가 구별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보편적인 아픔은 개인적인 감상으로써만 표현될수 있다. 보편적인 아픔을 보편적인 개념으로 진술하려하면 도리어 소외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이제 이 시를 다시 읽을수 있다. 소년은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는 아름다움을 향유하지 못하고 그것을 소유하려 한다. 왜 그럴까? 그는 자신과 들장미를 포함한 자연이 이미 하나의 전체임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자신과 들장미를 주체-객체의 관계로 파악한다. 따라서 그가 오래오래 들장미의 아름다움을 향유하기 위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들장미를 꺾는다. 즉 파괴한다. 이로써 그는 그 아름다움을 향유할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게 된다.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다 아름다움을 파괴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과 들장미가 이미 하나임을 알지 못하기에 또 다른 들장미를 파괴하러 갈 것이다.

이와 같은 주제는 향후 괴테의 거의 모든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가 된다. 젊은 베르테르가 사랑과 소유를 구별할 수 있었다면 과연 자살했을까? 파우스트가 지식을 소유하려는 망상에서 벗어났다면 그 방황이 필요했을까?

이 한 편의 시에 간명하게 표현된 내용을 헤겔은 그의 정신현상학에서 얼마나 장황하고 복잡하게 기술해 놓았던가? 그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말이다.

이제, 들장미의 이런 내용을 음미하며 이를 노래로 들어보자. 앞의 것은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것이고, 뒤의 것은 브람스가 곡을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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