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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발생학 -태초에 소리가 있었다(2)

아래 포스팅에서 음악의 시작은 원시시대 우리 조상들이 터득한 소리의 조작을 통한 감정의 조작에서 시작되었음을 살펴보았다.그것이 전쟁용이건 유희용이건 종교용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애초에 인간의 감정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근대사회에서는 이른바 문화영역의 자율적 합리화 경향으로 인해 최근까지 무시되어 왔다. 그리하여 음악이라는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 분야 안에서의 일련의 합리적 법칙만 추구하는 영혼 없는 전문가가 되었지, 이 분야가 사회에서 인간의 삶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나 역할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이러한 사실을 갑작스레 되살린 사람들은 이른바 음악치료요법이란 것을 들고 나온 일단의 유사과학자(자신들은 뉴에이지 과학이라고 하지만) 들이다.

어쨌든 여기에 관한 한 근대 이전의 인류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고대 고전문화가 발흥하고 과학이 발달하면서 어떤 특정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소리에 나름대로의 법칙이 있지 않을까 하는, 그래서 그 법칙을 알아내면 보다 편하게 감정을 조작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동·서양에서 공히 일어났다. 특히 동양에서는 음악의 감정 조작적 속성을 수천 년 전 부터 주목했다. 주목만 했던 것이 아니라 소리들을 체계적으로 유형화 하였고, 이렇게 유형화된 소리를 다시 체계적으로 유형화된 감정들과 조합시켰다. 이리하여 관혼상제를 비롯한 각종 애경사에 사용할 소리들의 체계가 일목요연하게 기록되기 시작했다. 체계적인 음악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아마 다음과 같은 경로를 취했을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권세가 당당한 집안에서 초상을 당하면 그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 슬픈 소리 잘 내는 사람 -곡소리 잘 내는-을 고용했다고 하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그리 자주 있는 것은 아니고, 또 그 사람이 초상 때를 맞추어 마침 집 근처에 있으리란 보장도 없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사람을 슬프게 하는 소리의 법칙을 알아낸다면 어떨까? 아주 경제적이지 않을까? 굳이 수 천리 밖의 곡 잘하는 사람을 찾으러 수소문할 필요 없이, 그 소리 내는 방법을 상징체계를 이용해서 기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며 필요할 때마다 그 기록을 보고 거기에 기록된 대로 따라서 재생하면 되는 것이다. 유가족이 음치만 아니라면 적힌 대로 재생만 하면 그 뿐이다.

눈치 빠른 사람은 알아채었겠지만 이것이 바로 악보이며, 체계적인 악곡이다. 그런데 이 악보라고 하는 것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우선, 소리의 표준화가 필요하다. 그래야 동일한 악보를 가지고 동일한 소리를 낼 수가 있다. 따라서 악보의 기록과 표준화된 악기의 탄생은 서로가 서로를 전제로 하는 관계에 있다. 이런 표준화된 악기는 재료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하고, 표준화된 소리를 만들기 쉽도록 쉽게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똑 같은 소재로 같은 규격대로 만들기만 하면 동일한 소리를 보장하는 악기, 바로 현악기는 여기에 가장 적합한 악기다. 이 현악기의 탄생이야말로 음악을 수 십 단계 워프 하게 만든 대 발견이다. 동양권이나 서양권이나 가릴 것 없이 음정과 가락이 있는 음악이라면 무엇이든 현악기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아주 의미하는 바가 크다. 오늘날 평균율 악기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는 피아노도 따지고 보면 현악기다. 이러한 현악기의 탄생은 음을 디지털 부호로 바꿀 수 있게 만들었다. 만약 현악기가 없었다면 피타고라스가 무슨 재주로 음악을 대상으로 수학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현악기가 있었기에 간단히 각 음정간의 관계를 으뜸음을 기준으로 한 일정한 비율로 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음악의 디지털화 과정을 예화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예컨대 과거에 어떤 사람이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가락을 잘 불렀다고 하자.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고 하자. 그럼 방법은 무엇일까? 당연히 그 사람을 불러서 직접 듣고, 수백 번 들어서 그것을 머리 속에 완전히 기억하는 것은 물론 그 소리를 내는 도구들도 일일이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나, 표준화가 된 악기(꼭 현악기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현악기가 가장 표준화하기가 쉽다. 1차원적인 길이만으로 가능하니까. 3차원적인 체적까지 소리의 변수가 되는 관악기는 우리 조상들의 기술로는 다루기 힘들었다. 실제로 관악기는 상당한 기간 동안 단지 진군나팔과 같은 효과음으로만 사용되었다. 오케스트라에서도 상당한 기간 동안 단지 장식음의 역할만을 했다. 관악기가 오케스트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만하임 악파가 처음이며, 모차르트, 하이든에 이르러서야 제 자리를 찾게 되었다)가 있다면, 기억해야 할 사실이 훨씬 줄어든다. 왼쪽에서 몇 번째 현을 심장 두 번 뛰는 길이만큼 튕긴 뒤 오른쪽으로 세 번째, 네 번째 현을 연달아 튀기되, 그 길이는 같고, 그 길이의 합이 첫 번째 소리의 길이와 같게 하고 하는 등등, 소리가 아니라 일상적인 문자로 기록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사람이 만드는 우연적인 소리들은 동질적인, 그러나 단지 양적으로만 다른 소리들로 구성된 체계를 이루게 되고, 이 체계에 포괄되는 모든 소리는 음악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제 음악은 제멋대로의 소리가 아니라 같은 종류의 악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같은 소리를 재생할 수 있는 그런 보편적인 체계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로 표현하는 것 마저 귀찮고 번거로워지면서 서양에서는 그것만을 위한 독특한 상징체계를 새로이 만들었고, 중국이나 한국 쪽에서는 특정한 문자를 이용하여 소리만의 상징체계로 사용하게 되었다. 즉, 소리를 디지털 부호화 하였다. 소리에 이어서 소리를 내는 도구들도 디지털화 되었다. 최초의 음율 악기를 기준으로 존재하는 모든 악기들이 같은 비율로 조정되었다. 예컨대 어떤 피리의 세 번째 구멍을 막고 내는 소리와 이 현악기의 왼쪽에서 다섯 번째 현을 튀기는 소리와, 지름이 22센티 두께가 1밀리인 청동소재의 종의 소리는 같다 등등의 식으로. 마치 화폐라고 하는 표준을 중심으로 모든 상품의 가치가 매겨지는 것과 같다.

이렇게 소리를 디지털화 할 수 있게 되었으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당연히 존재하는 모든 음악을 모아서 그것을 디지털 부호로 변환시키는 과정, 즉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일이다. 서양에서는 크리스트교에 사용되던 소리들부터 데이터베이스화 되었다. 이른바 그레고리안 찬트라고 불리는 방대한 소리들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던 이 소리들이 네우마 악보라고 불리우던 네 줄 짜리 악보로 기록되었다. 동양에서는 공자와 그의 학파가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되던 소리들을 문자를 이용하여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후세에 “詩經”과 “樂記”로 불리워졌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악기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단지 그런 것을 만들었다는 기록만이 전해진다. 여기에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악보의 탄생이 음악의 탄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악보라는 체계가 있기 전에 이미 표준적인 음율로 조율될 수 있는 악기가 그 상징체계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피타고라스의 정수비를 고집하지 않고 평균율으 ㄹ채택함으로써, 소리는 가장 낮은 소리에서부터 가장 높은 소리까지 똑 같은 옥타브의 무한 반복으로 표현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음악이라는 상징체계가 완성되었다. 즉 소리를 완전히 대상화하여 인간의 도구적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부터 소리를 이렇게 표준화된 체계로 포섭하여 조작가능하게 바꾸는 것을 “음악화”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동양이나 서양이나 모두 종교와 관계된 소리들이 제일 먼저 수집되어 음악화 되었다. 종교적인 지배자들이 왜 음악에 집착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한 견해는 종교의 거룩하고 숭고한 내용 -사실은 피지배자들을 마취시키는-을, 문맹자들이 대부분인 피지배계급에게 전달하려면 소리라는 매체를 통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음악에 집착했다는 것이다. 즉, 음악은 효과적인 메세지 전달 매체다. 다른 하나는 음악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어떤 마취적이고, 감정조작적인 특성 때문이라는 견해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음악운동가들이 메시지 중심의 운동가요인가, 음악중심의 운동가요인가를 놓고 신창남씨(이 사람 요새 무슨일 하는지 몰라. 문화평론가란게 일종의 유행이 되었는데, 정작 그 선구자는 보이지 않으니)와 이강숙(예술의 전당에서 엄청 높은 감투를 쓰고 있다지?)씨가 격론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이 두사람의 견해도 결국 위의 두 이견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견해의 대립은 음악적 세계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문제인데, 이는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헤묵은 논쟁거리가 되고있다.

그런데, 그런 것 말고 또 다른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애초에 이렇게 소리의 음악화, 음악의 디지털화를 꾀한 사람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단 하나의 음악, 플라톤의 표현을 빌면 음악의 이데아를 만드는 것에 있었다. 예컨대 그들은 인간을 기쁘게 만드는 음악이라면, 그 법칙을 이미 수학화된 음악을 통해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기쁜 음악을 새로이 만들어 내려고 애쓸 필요 없이, 마침내 만들어진 완전 100%표준 기쁜 음악 하나만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슬픈 음악도, 숭고한 음악도 모두 마찬가지이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이런 모든 종류를 통괄하는 그야말로 음악의 음악, 즉 메타-음악(아, 이 메타에의 지향은 상징체계가 만들어지는 순간 저주와 같이 달라붙는다. 모든 상징체계의 저주받은 운명, 이데아를 향한 행진)도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제 어떤 새로운 음악도 필요 없게 된다. 그리하여 끝내는 음악의 이데아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작곡이 이루어지고, 계속해서 작곡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은 아직 아무도 그 이데아의 경지에까지 아무도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게 가능하다면야 플라톤이 무엇 때문에 시인을 음악가를 구제불능의 추방대상으로 여겼겠는가?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음악은 절대로 메타화 될 수 없는 존재로 수학이나 기하학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천한 대상이었다. 안타깝게도 플라톤 시절에는 악보가 없었으니 말이다. 만약 악보만 있었더라면 플라톤도 당장 음악의 이데아를 만들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래서 음악을 원통과 삼각형과 직각사각형으로 환원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 즉 누군가가 그 음악의 이데아를 악보로 구현하는 순간, 그 순간이 안타깝게도 나머지 음악과 음악가는 최고선의 음악 한 곡만을 남겨놓고, 모조리 폐기처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불완전한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준화, 즉 계몽의 길에 나선 인간에게 불완전함이란 곧 결함이며, 이는 곧 악이다.

바로 이 지점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우리는 스트라빈스키가 말한 “모든 음악은 바흐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가 있게 된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모든 음악은 이데아만 찾을 수 있다면 다 그것을 모방해야 한다.”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스트라빈스키는 바흐의 음악이야 말로 순수하게 상징화된 음악의 이데아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상징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그만큼 실체와는 멀어진다는 슬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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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