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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신성함에 대하여(1)

  “학문과 예술만이 인간을 신성하게 한다.”

이 폼나는 경구는 베토벤이 평생 주문처럼 읊고 다녔던 말이다. 그는 자신이 예술 활동을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고 더 나아가서 그것이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신성한 활동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충실한 후원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라조모스키 공작과 말다툼을 한 끝에 “당신은 그저 공작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내 작품이 남아있는 한 영원히 기억 될 것이다.” 라는 선언을 하기까지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선언은 멋지게 들어맞았다. 라조모스키 공작은 베토벤이라는 존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그 이름조차 남지 못했을 테니까. 하긴 베토벤의 우상이었던 모차르트는 그 보다 훨씬 어린 나이인 스물넷에 이미 그렇게 말했고,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정규직 일자리를 박차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몸을 던졌다.

베토벤이 음악에 대해 느끼고 있던 신성함과 외경은 참으로 지고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우상인 모차르트 역시 이 신성함의 척도를 이용해서 평가했다. 그리하여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그 장엄하고 신비롭고 숭고한 정신세계에 깊이 빠져 들었으며, 반면, 모차르트가 자신의 기준으로 볼 때 너무도 세속적인 내용인 ‘돈 지오바니’나 ‘코지 판 투테’ 같은 이야기를 오페라로 작곡했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토록 신성한 재능을 이토록 하찮은 이야기에 쏟아 붓다니...” 라고 말하면서 그는 모차르트의 돈지오바니를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또 베토벤은 헨델의 오라토리오들을 대단히 좋아했다. 헨델의 오라토리오들의 공통된 주제들을 보면 베토벤이 빠져들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헨델이 즐겨 다루었던 이야기는 온갖 고난과 역경을 위대한 인간성과 숭고한 정신력으로 극복하고 마침내 장엄한 승리를 쟁취하는 그런 종류의 것들이었다. 이것이 베토벤을 깊이 감동시키고 자극해서 유명한 9번 교향곡(합창)에 영감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특히 베토벤은 9번 교향곡을 작곡할 무렵 헨델의 ‘메시아’에 거의 열광하고 있었다. 어찌나 열광했던지 헨델의 작품을 소장하는 것조차 거부했는데, “나 같이 미천한 사람이 어떻게 감히 이런 위대한 작품을 소장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기 까지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심각한 양심의 가책을 느낄수 밖에 없는데, 나는 베토벤 보다 한참 하찮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헨델 작품의 악보와 음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거의 범죄 수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만 모골이 송연해 지기까지 한다.

어쨌든 평생 교회에는 거의 머리도 들이 대지 않았던, 범신론 내지는 이신론자임에 분명했을 베토벤에게 음악은 지상에서 가장 신성한 대상이었고, 그는 평생을 그 신성함을 파내기 위해 분투했던 것이다. 그런데 베토벤의 신성함은 바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바흐에게는 오직 교회와 신만이 신성했다. 음악은 그것을 위해 봉사하는 심부름꾼의 역할만 해야 했으며, 바흐 자신도 자신을 위대한 예술가라거나 다른 사람보다 특별하다거나 하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한 사람의 기술자일 뿐이며, 그 기술은 교회를 위해 쓰이는 여러 다양한 분야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토벤에게는 음악 그 자체가 목적이며, 그 자체가 신성한 것이다. 음악이 신성한 이유는 그것이 음악이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자신은 훌륭한 음악가이며, 따라서 인간들 중에서 질적으로 다른 고결한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음악 자체만의 신성함을 최고의 경지로 올리고 싶었다. 비록 그가 자신의 최고의 경지라고 여겼던 9번 교향곡에 가서는 어쩔 수 없이 텍스트를 사용함으로써 음악 자체의 위대함이라는 목표를 이그러뜨리고 말았지만, 9번 교향곡 이후 작곡한, 그리하여 죽기 직전까지 작곡하고 있었던 현악4중주들에서는 거의 그 목표에 도달하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음악의 독자적인 힘만으로 신성함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던 베토벤의 노력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그의 마지막 현악4중주들을 통해 눈물겹게 읽을 수 있다.

베토벤의 이러한 눈물겨운 노력과 광신도적 태도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사회의 변화 발전의 덕분이었는지 딱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베토벤 이후 음악의 지위가 점점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인간을 현 존재에서 한 차원 더 높은 새로운 존재로 진화시키는 중요한 연결 고리로 까지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거의 가망이 없는 고통으로만 가득한 이 추악한 세계에서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번민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방의 통로로서 음악을 제시하기까지 한 것이다. 실제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아무리 곱게 봐주려고 해도 불교사상을 그대로 도용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불교를 도용하지 않은 그 자신의 유일한 독창적 사상은 결국 음악이다. 고통의 피난처, 안식처로서의 음악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염세적 세계관을 거의 왕자병(!)에 가까운 자기 긍정의 힘을 통해 극복하려 했던 니체에게 음악은 단지 피난처나 도피의 수단에 그치지 않았다. 니체에게 음악은 미천하고 나약한 인간이 한 차원 높은 초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관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초인이라는 초현실적인 존재를 현실화 할 수 있는 음악적 단초로 금관악기를 마구 난사하고 있는 바그너 풍의 음악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그너는 ‘탄호이저’나 ‘파르지파르’와 같은 크리스트교 색체가 짙은 음악을 만듦으로써 교회와 야합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성경을 읽을때는 손이 더러워질까봐 장갑을 끼고 보는 니체 앞에서 교회에 굴복한 옛 친구라니!

 

이렇게 음악의 지위는 현기증 날 정도로 상승하였다. 음악을 기껏해야 이데아에 대한 가장 저급한 형태의 그림자, 복사본의 복사본 정도로 보거나 아니면 아예 자기를 상실한 일종의 정신병으로 바라보았던 플라톤이나, 음악을 심리, 감정 현상에 대한 아주 저급한 모방으로 간주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비교해 보면 이건 거의 천지개벽이라고 할만 한 변화가 일어난 셈이다.

그러나 동양에서 오래 전부터 내려온 지혜로운 말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너무도 유명한 말이다. 또 주역(周易)에서도 한 결 같이 달이 차면 기운다는 식의 경고문이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모습만 바꾸어서 끝없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어디 동양만의 전유물이랴? 고대 아테네의 7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솔론도 이런 말을 했다. 그는 당시 최대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던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에게 지혜로운 말씀을 남겼는데, 이 글의 주제와는 많이 벗어나지만, 매우 훌륭한 말씀이기 때문에 잠시 여기에 옮겨본다.

“왕이시여! 저는 신이 인간의 번영을 질투하고 인간을 괴롭히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일생을 70년이라 하면 2만 6250일이 되는데 그 가운데 하루라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일이 없으니 왕이시여, 인간의 생애는 이토록 우연한 것입니다. 그러니 왕이시여! 왕께서 훌륭한 생애를 마치고 돌아가신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지금 아무리 왕께서 부유하고 나라가 강하다고 하더라도 절대 왕을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 말을 볼 때마다 경탄을 금치 못한다. 어렵고 추상적인 용어 대신 2만 6250일이라는 숫자를 도입하여 1/26250이라는 극히 미세한 확률을 제시함으로써 인생의 무상(無常)을 일깨운 이 재치에 무릎을 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1/수십억 겁 이라는 엄청난 숫자를 쓰지 않아도 1/26250이면 충분히 무상함을 느낄 만큼의 미세한 확률이며 또한 이 숫자는 실제 인간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사용한 숫자이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이 있다.

그러니 무상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서양인들의 지적인 유산을 평가절하 하는 우매함은 범하지 않는 것이 좋다. 공자니 맹자니 묵자니 노자니 장자니 석가모니니 예수니 할 것 없이 동양에서 탄생한 사상들은, 그래서 많은 동양 국수주의자들을 흥분시키는 그런 고대 사상들은 사실 동양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동양인들은 그것을 추상적으로, 그리고 통일되지 않은 개념을 사용해서 기술했고, 서양인들은 그것을 아주 간략하고 설득력 있게 표현했을 따름이다. 그래서 같은 이야기를 해도 동양의 고전이 훨씬 더 깊이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내게는 그 깊이라는 것이 개념화 부족의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그래서 동양의 최고 철학책은 역시 대화체로 구성되어 그래도 이해하기가 편한 논어(論語)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다만 이 대화들이 계통 없이 마구 뒤섞여 있는 바람에 플라톤의 ‘국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에티카’ 등에 비교한다면 그 격이 형편없이 떨어진다. 도대체 모호함을 아무리 깊이로 위장한다 한들 그것은 철학자의 올바른 자세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 난데 없이 머리와 복장은 불교풍으로 꾸미고서 ‘21세와 노자’ 어쩌고 하면서 무덤 속에 있던 동양의 고대 사상가들을 벌떡 일으켜서 마구 침소봉대하며 마치 2000년 전의 사상이 오늘날을 예언해서 맞아 떨어졌다는 듯이 사기치는 일은 더더욱 그릇된 자세일 것이다. 아니 그것은 거의 범죄에 가깝다. 대부분 동양의 고전들은 체계의 부족으로 인하여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으로부터 부자유스러운 존재론적인 멍에를 가지고 있으니, 이는 노자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의 설익은 사상을 비판으로부터 막아 보자는 얄팍한 술수에 다름이 아니다.

아직 할 말은 산더미 같이 남았지만 동서양의 비교는 더 이상 하지 말도록 하자. 그것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니까.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음악에 대한 홀대는 물론 부당한 것이지만 음악을 지나치게 신성화 하는 것 역시 위험한 발상이라는 점이다.

물론 내 개인적인 견해이이기는 하지만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마’, 바그너의 ‘파르지팔’ 처럼 의도적으로 신성함을 목표로 해서 듣는 자들로 하여금 신성하게 여기라고 강요하는 그런 신성 과잉의 음악은 때로는 오히려 내게 역겹게 느껴지기까지 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헨델의 오라토리오 중에서도 신성과잉의 징조가 보이는 ‘메시아’ 보다는 인간의 모습(특히 작곡가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젭타’ 나 ‘마카베우스의 유다’를 더 선호한다. 그 중 ‘젭타’는 정말 위대한 작품이다.

그러나 신성 과잉이 되었건 말았건 간에 사람이 음악을 들으며 어떤 신성함 혹은 신성함과 비슷한 일종의 탈 현세적인 감정을 느낀다는 것만은 부동의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 눈을 지그시 감고 마치 참선이나 수도하는 듯한 자세로 음악을 듣거나 연주하는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이며, 이른바 대가의 반열에 오른 음악가에게 구도자라는 칭호를 왕왕 붙이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어떤 일 보다도 특히 음악을 들으며 넋 나가는 모습을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것이며, 사회학적 조사가 뒷받침이 되어야 하겠지만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쉽게 매니아층이 형성되는 분야가 음악이라는 것도 확실할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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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