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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인에서 슈베르트의 곤돌라 노래

구 블로그의 음악 포스팅을 살리고 있습니다. 음악을 올리기 어렵게 만든 블로그스팟의 빈틈을 이용해서 계속 음악 부활에 성공한 포스팅을 전면으로 올리겠습니다.

우리는 때로 삶을 너무 경직되게 바라본다. 경직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에 현재를 종속시키고 왜곡시킨다. 경직된 가치를 품고,매사를 그 가치에 맞춰 평가한다. 심지어 자기 스스로도 그 가치를 배신하고 있음에도 그것은 보지 못하고 타인을 그 가치에 맞추어비난하고 꾸짖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가까운 사람, 가까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잊어버린다. 요즘 영화들을 보면 확실히서양인들의 세계관의 변화를 느낄수 있다. 인간의 이성에 의한 구획, 기획, 이를 통한 전체적인 규율과 통제라는 근대적 사고방식이무너지고 있다. 오히려 그런 합리성으로 포착되지 않는 정서적인 것들, 작은 것들, 그리고 그 소소한 차이들의 이해와 공감이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사 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약점을 지니고 있다. 따지고 들자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 없다는 정말 평범한진리... 하지만 이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종종 잊어버린다. 그것은 항상 우리가 뭔가 더 먼것, 더 큰것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아닐까? 그 와중에 서로를 인간으로, 그리고 나와의 관계 자체가 가치있는 그런 동료로서 바라본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으로바라보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평등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여성 정치인은 정작 오랫동안 같이 지낸 가정부를  가사 도우미로만바라보았고 가정에서 소외된 동생의 아픔에 무관심했음이 드러난다. 그 여성정치인과 어릴때부터 같이 자랐던 이민2세 청년은  그녀를다만 다큐멘터리의 피사체로만 또 자신이 겪은 불평등과 부조리의 장본인이라는 분노어린 바라보았기에 그 아픔까지 새기지 못했다.이런 식으로 우리는 관계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그 무엇을 자꾸 나와 너 사이에 집어 넣으면서 그를, 그녀를 차가운 대상으로만들어 관계의 의미를 가려버린다.



그리고 비가내린다. 비는 마치 관계를 가린 먼지를씻어내기라도 하듯 내리고, 이 비를 피하기 위해 하룻밤을 보내게 된 어느 농가에서 마침내 이들은 마음을 터놓는다. 서로의 상처를알게 되고, 서로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된다.


이 세계의 인간이 60억이라는데, 내가 알고지내는 사람은 100명도 안될 것이다. 확률로 따지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적은 숫자인데, 이 인연은 보통인연이 아닐 것이다.이렇게 수억분의 1의 확률로 만난 몇 안되는 사람들과의 관계마저 차가운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니 우리의 삶이 그토록 고달픈 것이아닐까? 우리의 시간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우리가 살고 있는 곳,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이 모든 것들이 다시 돌아오지못할 소중한 것들이고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들이 아닐까? 그렇게 아주 가까이 삶의 지혜가 있고, 해방이 있고, 진보가 있는게아닐까?


마음이 찌푸릴때 들으면 한두소절만으로도 금새 마음의 평화를 되찾아주는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합창곡"곤돌라 뱃사공의 노래(der Gondelfahrer)"와 함께 영화 "레인"은 내 삶을 그리고 주변을 따뜻하게 돌아보게 만든다.

그냥 긴 말 필요없이 슈베르트의 음악이나 듣자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