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자본주의 이해하기 -(현재 검토중인 책)

현재 우리 연구회가 같이 읽고 검토중인 책이다. 이 책을 검토하는 이유는 보다 입체적이고 다양한 관점에서 경제를 공부할 수 있는 대안적인 교과서를 개발하기 위해서다. 가장 널리 알려진 맨큐의 경제학은 너무도 자본주의적 관점을 담고 있다. 스티글리츠의 경제학은 훌륭한 책이지만 완역본이 없다. 크루그먼의 경제학은 주류경제학과 선명한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 이해하기 - 경쟁, 명령..

새무얼 보울즈 등이 이 책의 저자다. 원 제목은.'자본주의 이해하기: 경쟁, 명령, 변화의 3차원 경제학'. 이며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나왔다.

이 첵의 저자 보울즈는 그 유명한 재생산 이론의 제창자인 바로 그 보울즈다. 그가 허버트 진티스와 함께 쓴 "자본주의 미국의 학교교육"은 이후 미국에서는 헨리 지루, 마이클 애플에게 유럽에서는 부르디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진보적인 교육자라면 적어도 한번은 읽어보았을 중요한 저작이다. 그런 보울즈가 쓴 경제학 교과서라니 당연히 입맛이 당길수 밖에 없다.

이 책은 그 동안 경제교육에 대한 고민을 쓸어내어 줄 장점들을 두루 가지고 있다. 우선 모든 경제 교과서의 제일 처음에 나오기 마련인 '호모 이코노미쿠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를 통해 기존 경제학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논박하면서 경제가 사회현상의 하나이며 그 외부에 있지 않음을 설득하는 논리를 제공한다. 사실 이런 주장이야 기존의 마르크스 경제학 관련 교과서에도 충분히 나오지만 문제는 마르크스 주의자들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사투리로 점철되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울즈의 책은 기존 주류 경제학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를 다시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있다.

보울즈는 기존의 주류 경제학이 수평적 차원(경쟁)만 다룬 1차원 경제학이라고 비판하면서 여기에 수직적 차원(권력)과 시간적차원(변화)를 추가한 3차원 경제학을 펼쳐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1차원 경제학은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3차원 중 하나로, 또다른 두 차원과 상호작용하는 한 요소로 포함되는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방법론을 그대로 따라간 것이다.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 리카도의 정치경제학의 부정, 즉 사회주의로 정치경제학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학과 사회주의를  모두 한 계기로 포괄하는 정치경제학비판을 수립하려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울즈는 마르크스가 애덤 스미스, 리카르도, 밀의 경제학에 대해 했던 일을 이제 신고전파경제학, 케인즈경제학에 대해 하려는 것이다.

그 결과 이 책은 두 마리의 토끼를 잡게 해 준다.
1)기존의 주류 경제학을 충실히 익힐 수 있는 교과서 2)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갖추게 하는 좌파 경제학 교과서
이 책의 몇몇 챕터만 골라 요약하면 기존의 주류 경제학 교과서로도 손색 없을 정도로 충실히 공부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여기에 대한 다차원적 비판을 공부하게 되면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되는 것이다.

책 이름부터 흥미롭지 않은가? 경제학교과서, 경제학의 이해 따위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이해다. 이는 기존의 경제학 교과서가 자본주의의 경제법칙이 마치 영원한 "경제법칙"인양 서술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것은 "자본주의의 법칙"임을 명시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이후의 법칙은? 그것은 알 수 없다. 저자의 말처럼 경제체제의 변화는 경제체제 자체 내의 내재적 동력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니. 다만 현 경제체제의 내재적 현상을 잘 분석하면 그 추세 정도야 알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미국에서 고등학교 교재로 사용되는 책이다. 그러나 원통하게도 우리는 우리나라 고등학생이 이 수준에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이 책을 꼼꼼히 검토한 뒤 우리 실정에 맞는 대안 교과서를 작성해 보려고 한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