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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 프란시스코... 히피를 아시나요?

스콧 맥켄지(Scott McKenzie)의 아름다운 노래 [San Francisco].

팝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이 노래만큼은 잘 알 것이다. 예전에 TV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애인]이라는 연속극에 삽입되어 뒤늦게 국내 음반계에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왔던 음악이기 때문이다. 아마 [애인]은 이른바 불륜을 소재로 한 최초의 연속으로서 당시 안방극장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극중에서 두 주인공(황신혜, 유동근 분)이 만나는 장면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 노래가 그렇고 그런 사랑타령을 주제로 한 팝음악인 줄로 알지만 노랫말이나 이 노래가 생겨난 배경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노래의 원제목은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인데, 샌프란시스코에 갈 때면, 왜 꽃을 머리에 달라는 지가 궁금해진다. 사실, 이 꽃 이야기는 팝 음악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위의 노래가 발표된 시기는 1960년대 말이었다. 이 시기는 마르틴 루터 킹이나 말콤 X를 필두로 한 흑인 민권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으며, 미국이 명분 없이 개입한 베트남전쟁 때문에 젊은이들 사이에서 기성세대에 대한 강한 불신과 반항심이 고조되고 있던 때였다. 청년들의 이유 있는 반항은 학생운동과 히피즘으로 표출되는데, 학생운동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위치한 버클리대학이다.1)

그리고 통기타, 청바지, 장발 그리고 오토바이 질주로 대변되는 히피즘(hippism)도 샌프란시스코의 헤이트 애쉬베리(Haight-Ashbury)에서 생겨났다. 애쉬베리는 일종의 슬럼지구로서, 당시 젊은이들이 그들의 고뇌를 예술로 표현하기 위해 창작활동에 몰두하던 곳을 말한다. 올리버 스톤의 영화 [도어즈]에서 짐 모리슨(발 킬머 분)이 여자 친구(멕 라이언 분)를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장소가 바로 헤이트 애쉬베리이다.

히피(hippie)하면 보통 광란의 오토바이 폭주족(Easy Rider2))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들은 퇴색된 의미에서의 사이비 히피들일 뿐, 진정한 히피들은 나름대로 고상한 신념체계를 지니고 있었다.

 


1967년 1월, 샌프란시스코의 골든게이트공원에서 “사랑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이 모여 일종의 궐기대회를 열었는데 이 순진무구한 청년들이 다름 아닌 히피들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여의도광장에 모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던 것처럼 이들은 [San Francisco]를 불렀다. 즉 이 글에서 소개하는 노래는 히피들의 집회에서 로고송이었던 것이다. 가사 내용이 전체적으로 그러하다. 당대의 '샌프란시스코'라는 지역은 히피즘의 메카이자 히피들의 꼬뮨이었는데, 이 노래의 내용은 천편일률적인 사랑타령과 전혀 거리가 먼 것으로서, 너도 나도 꽃을 머리에 달고서 "함께 연대해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자"는 호소문인 것이다.


히피들은 현대인들이 중요시 여기는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성공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대신, 사랑과 화평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합치를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한다. 이들 신념의 밑바탕에는 동양의 선(禪)사상, 특히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1970년 비틀즈가 발표한 [Let It Be]의 가사내용에서도 엿볼 수 있는 바, 히피즘이 당대 청년문화에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3).

꽃은 히피들의 해맑은 신념을 상징한다. 히피들의 집회인 러브인(love-in)에 참가하는 모든 이들은 반드시 머리에 꽃을 달고(some flowers in your hair) 와야만 했다. 심지어 집회를 감시하는 경찰들도 그 분위기에 압도당하여 헬멧에 꽃을 달았을 정도라고 하니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히피즘이 기성 문화에 대한 반문화(counter-culture)의 형태로 생겨났음을 생각할 때, 꽃은 총에 대한 대립물로서 일종의 ‘무언의 저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히피즘은 피부색을 초월한 인간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간의 주류 문화들이 한결같이 서구중심적(이른바, 문명)이었음에 비해 히피즘은 아프리카의 부두교(이른바, 야만)와도 손을 잡는다. 히피들이 베트남전을 반대했던 것도 이러한 코스모폴리터니즘과 상관있을 것이다. 총을 버리고 꽃을 머리에 꽂아 반전과 평화를 부르짖은 히피들의 의거를 세인들은 '플라워 무브먼트(flower movement)’라 일컬었으며, ‘꽃의 아이들(flower children)’은 히피들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풍문과는 달리 히피들이 매우 건강한 청년들이었다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플라워 무브먼트는 록음악과 결합하여 찬란한 꽃의 문화를 양산하였는데, 그 중 일부는 지금도 팝 역사에 전설로 남아 있다. 1967년, 몬트레이(Montrey)에서 시작된 팝 페스티벌은 우드스탁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세간엔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festival)’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이 행사가 벌어진 장소는 우드스탁으로부터 약 50마일이 떨어진 한 낙농업자 소유의 개인 농장이었다. 당국으로부터 장소 사용 허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한 장면 :

등을 보이고 있는 왼손잡이 기타리스트는 지미 헨드릭스이다

1969년 8월 15일, 50만 명의 젊은이들은 사흘간의 밤낮을 비탈진 언덕에서 보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공연기간 내내 비가 내려 청중들이 앉아서 먹고 자는 땅바닥은 온통 수렁으로 변했다. 뿐만 아니라, 페스티벌 참가자들이 타고 온 차량행렬이 수십 마일의 도로를 점거한 탓에 외부에서의 식료품 공급이 불가능했으며, 턱없이 부족하고 불편한 위생시설 등은 극도의 무질서와 혼란을 야기하기에 충분했다. 시간당 수십 건의 살인과 강간이 자행되는 나라에서 50만의 젊은이들이 인간으로선 견디기 힘든 악조건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록 사운드와 마리화나에 취해 거침없는 표현과 과감한 노출을 일삼는 이 위험천만한 젊은이들이 모인 목장이 곧 아수라장으로 변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그러한 우려와는 달리, 젊음의 발산은 80년대 록그룹의 이름처럼 ‘평온한 폭동(Quiet Riot)’으로 결말을 맺었다. 사랑의 힘을 믿는 온화한 기질의 소유자들(gentle people, 이 노랫말의 주요 키워드 중의 하나)은 그들 머리에 단 꽃의 영예를 욕되게 하는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았다. 히피들은 헤이트-애쉬베리란 ‘꼬뮨’에서 단련한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불편함을 서로 나눌 줄 알았던 것이다. ‘우드스탁’은 신화로 남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으며, 또 이것은 청년 문화의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리하면,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의 시대상황은 젊은이들에게 허무 그 자체였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반항이 허무와 광기로 그치고 만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대중음악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 형태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그 꽃밭은 다름 아닌 샌프란시스코였던 것이다. 이젠 왜 꽃을 머리에 달고 샌프란시스코에 가야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렸을 것이다.



한편, 샌프란시스코에서 개화한 '꽃의 문화'는 태평양을 건너 동토의 한반도에도 싹을 틔웠다. 당시 한국은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가 '유신'이란 가당찮은 논리로 종신집권을 획책할 때였다. 이 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탁월한 매판적 역량을 인정받아 만주에서 독립군 토벌대(관동군: 일제의 정예부대)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기도 하다.4)

구린 과거를 지녔기에 이 자는 모든 국민들에게 입을 다물게 했다. 말 많은 사람은 빨갱이로 몰아, 어떤 이(장준하: 자신의 과거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는 산에서 실족케 하였고, 또 어떤 이는 바다에 빠뜨리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란 이상한 이름의 파쇼적 억압은 정치면에서 그치지 않고 문화의 꽃밭에도 강력한 제초제를 치기 시작했다. '한국적 문화대혁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당시 가장 바빴던 사람은 경찰들이었다. 그 시대의 경찰은 도둑놈 잡으랴, 데모 진압하랴, 그리고 30센티미터 자를 들고 다니며, 거리에 머리카락이 길거나 치마가 짧은 성인남녀를 찾으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시의 한국은 문화인류학자들이 연구대상으로 삼을 만한 신비의 나라였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문화는 항상 기성세대의 권위에 대한 반항을 통해 다져지고 발전하는 법이다.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그리고 한국대중음악의 대부인 신중현, 이들은 한국형 '꽃의 아이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대에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대중음악의 꽃을 피웠다.


"청년이 침묵하는 곳에, 사회의 진보는 없다"

마르쿠제의 영향을 받아, 노동계급이 아닌 청년학도들이 질풍노도처럼 사회의 진보를 이끌었던 그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혹자들은 묻는다.

Where Have All the Flower Children Gone?

'꽃의 아이들'은 죄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70년대초를 기점으로 미국사회에서 히피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닉슨 정부를 굴복시켜 베트남전을 종전케 한 미국 청년들의 위대한 몸부림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었는가? 이러한 사정은 한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6.3에서 시작하여 5.18과 6월 항쟁을 이끈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한국의 학생운동이건만, 요즘은 대학가에서 데모하는 대학생을 찾아보기 힘들다.


청년이 침묵하는 곳에 사회의 진보는 요원하련만...


1)60년대말 학생운동은 유럽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이탈리아가 대표적인데, 이들은 사상적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 특히 마르쿠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네오맑시스트인 마르쿠제는 노동계급이 아닌 인텔리겐차(대학생)과 룸펜프롤레타리아트들이 사회변혁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류역사에서 진보의 굵직한 획을 그은 특별한 해가 있는데 1789나 1917 못지않게 1968이란 숫자가 그러하다. 맑시스트 학자 크리스 하먼이 지은 [세계를 뒤흔든 1986, 책갈피, 2004]은 1960년대말 유럽 청년의 저항사를 잘 서술한 책인데, 저자는 책 머리말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때때로 한 세대 전체를 마법에 빠뜨리는 특별한 해가 있다. 이런 시기는 나중에 그 해를 단순히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수많은 상념이 떠오르게 한다. 1968년이 바로 그런 해였다.”

 


 

2)데니스 호퍼(Dennis Hopper)가 감독 및 주연을 맡은 훌륭한 영화 [이지 라이더] 또한 히피 시대 청년들의 초상을 관람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영화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3) 레넌이 시(가사)를 쓰고 메카트니가 선율을 매긴 것에 필 스펙터(Phil Spector)라는 명 프로듀서가 손질을 하여 완성된 이 아름다운 곡은 제목부터 ‘無爲’란 한자어를 그대로 영어로(Let It Be) 옮기려 애쓴 듯하다. 전체 가사 내용 또한 영국인 고유의 카톨릭 신앙에 노자를 접목시켜 시종 막연한 낙천주의를 설파하고 있다.


 

4) 그렇다고 이 자의 두뇌가 명석했다고 생각하지는 말라. 대구사범학교 시절 이 자의 반 성적을 보면 45명 가운데 줄곧 꼴찌에서 1-2등을 맴돌았다. '사람 죽이기' 공부에는 우등생이었고, '사람 살리기(敎育)' 공부에는 도무지 취미와 적성이 맞지 않는 부적응아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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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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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