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2.

케세라 세라

  존경하는 조합원선생님들께.


10월의 마지막 밤입니다.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를 선생님들께 풀어놓을까 생각하다가 지난번처럼 좋은 음악과 함께 그 음악과 관계되는 글을 쓰기로 합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이지만 이용의 노래가 아닌 Doris Day의 [Que Sera Sera]입니다. 제가 이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삼은 것은 오늘 이야기가 ‘우리 아이들의 삶’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년째 이 학교에서 5․6학년 영어전담을 맡고 있는데,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날씨가 더워서인지 수업시간에 조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옆 친구가 내 눈치를 보며 짝꿍을 막 깨우려 하길래 “그냥 나둬라. 잠 오면 자야지” 했습니다. 이 파격적인(?) 나의 배려에 아이들이 맞장구를 치면서 몇몇은 “수업시간에 졸다가 혼난 기억”들을 늘어놓기 시작하는데, 놀라운 것은 “학원에서 졸다가 맞은 아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을 6교시 까지 학교에서 수업 받게 하는 것도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인데, 그것도 모자라서 대부분의 우리 아이들은 방과 후에 학원 수업 까지 받습니다. 그런데 제 돈 들여 공부 배우러가서 졸았다고 두들겨 맞다니..... 때리는 학원교육 관계자나 또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는 학부모들이나 모두들 참 이상합니다. 웃지 못할 현실은 대도시는 물론 구미같은 중소도시만 하더라도 명문학원 소리 듣는 곳에서는 아이들을 많이 때린다고 하는데 그런 학원일수록 학부모들이 못 보내서 안달이라고 합니다.


학원관계자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학교는 뭐 그리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나요?” 할 말이 없습니다. 아무튼, 교육에 관한 한 우리는 미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미친'이란 표현이 점잖지 못한 어법이겠으나 앞으로 제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 이 말을 꼭 써야 합니다. 한국사회에서 교육이 현상하는 본질에 대한 적확한 한마디로, "미친 사회, 미친 교육"이란 말 이외의 다른 진술 형태를 생각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一物一語, 한 사물을 정확히 규정하는 표현은 한 낱말밖에 없다 - Flauvert .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학생의 인격을 마구 짓밟는 곳에서 교육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는 뻔합니다. 여기서는 ‘교육’이 아닌 ‘조련’이, 교사와 학생 간의 ‘인간적 만남’이 아닌 ‘상거래 행위’가 있을 뿐입니다. 학습은 학생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발견의 쾌감을 얻게 하는 방식보다는 오직 ‘드릴’로 일관할 것입니다.

이런 학원/학교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떤지 몰라도 학생의 입장에선 두들겨 맞아가면서 재미도 없는 공부를 억지로 하는 것이 즐거울 리가 없겠죠. 초등학생들이 학교에서 학원으로 이어지는 숨 가쁜 일과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정상적인 아이라면 당연히 지루함을 느끼고 한 눈을 판다거나 한두 번 학원숙제를 빼먹기가 일쑤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아이는 이 이상한 교육시스템에서 낙오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 비정상적인 체제에서 살아남는 아이와 학부모는 어떤 자긍심을 가질 것입니다. 요컨대, 전자에겐 무능함의 낙인이, 후자에게는 미래의 성공을 보증하는 첫 번째 ‘좁은문’을 통과했다는 보상심리가 주어질 겁니다. 바로 이러한 속성에 따라 “많이 때릴수록 학부모들이 더 선호하는” 미친 메커니즘이 고착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저 또한 교사인 동시에 아이의 부모이기도 합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이 미친 사회에서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아이 공부’와 관련하여 부모가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죠. 교육전문가인 우리가 볼 때 “저건 아니다”라고 확신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현실적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초등학교 1~2학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문제 같지도 않은 시험지 풀려서 그 점수를 부모님 확인(도장) 맡아오게 하는 따위. 초등교육전문가인 내가 풀어도 80점 이상 못 맞는 이상한 시험을 망쳤다며 울상 짓는 집 아이를 볼 때마다 정말 한숨과 분노가 터져 나옵니다.


가급적 읽기 편하시게 글을 길게 쓰지 않으려 합니다만, 이 사회에서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이 뭘 뜻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습니다.

[장학퀴즈]나 [도전골든벨] 같은 TV 프로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는’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이던가요? 이를테면 베토벤의 [Moonlight Sonata]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와도 아무도 답을 못합니다. 그러다가 아나운서가, 베토벤... 밤... 어쩌구 하면 벨을 눌러 '월광'이라고 맞힙니다. 나는 이게 원숭이 재주넘기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도스토옙스키' 하면, '죄와 벌'이고, '죄와 벌' 하면 도스토옙스키고...... “한 권의 책”에서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잡다한 책들의 제목과 줄거리 외우기는 것이 학력사회의 피라미드 상층부로 향하는 지름길이 되는 이런 교육풍토가 누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지...... 아이들 죽도록 공부 시켰으면 개인이나 사회의 발전을 위해 뭔가 남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중략 -


우리 아이들, 특히 초등학생들의 신세는 '경주마'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첫째, 말의 자발적인 의지와 필요에 따라서가 아니라 외적 강제에 의해 뜻도 영문도 모르고 목표를 향해 죽도록 달려가야 합니다.

둘째, 경주마의 가치는 오직 성적으로만 가늠됩니다. 인간성(?) 좋은 말도 성적이 좋지 않으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셋째, 말의 본질은 ‘야생마’입니다. 말은 들판을 자유롭게 노닐기 위해 태어났지 경주용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경주용으로 전락하면서 말의 본성에 충실한 자발적 성장은 멈추어 버립니다. 트랙 안에서 달리기만 잘 하는 것은 ‘발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퇴행’이라 일컬어야 합니다.

놀이터와 놀이시간을 빼앗긴 어린 아이는 거세된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학교 공부 마칠 무렵 교문 앞에서 아이들 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노란색 봉고차를 보면서 나는, “저것이 닭장차와 뭐가 다른가?” 생각합니다.



자 그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교사를 떠나 학부모로서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해 제가 고민 끝에 정리한 것을 여러 선생님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교육에 관한 한, 제정신이 아닌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미친 사회, 미친 교육”임을 인정한다면, 결론은 자명해집니다. 물론 저는 그 자명한 결론을 창백한 당위론으로만 포장하지는 않겠습니다. 논리 전개의 편의상, 1)당위 2)현실 3)쟁점사항 4)결론 이러한 포메이션으로 구성하여 (이 글에서는) 그 요지만을 적어봅니다.


1) 당위 : 학부모가 되어서 같이 미쳐갈 수는 없다. 목숨 보다 더 소중한 우리 새끼들을 미치게 만들 수 없다.

2) 현실 : 그 미친 생존경쟁의 대열에 미친 척하고 뛰어 든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인내의 결과로 달콤한 열매를 얻는다는 보장이 없다.

3) 쟁점 : 설령 그 달콤한 열매를 취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인간다운 삶의 행복"을 의미하는가? 이 천민자본주의의 미친 교육시스템 속에서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이 대관절 뭘 의미하는가?

4) 결론 : 공부를 스스로 재미있게 하게 하자. 그리고 공부의 결과에 대해서는 “케세라 세라”


케세라 세라!

당위적으로나 현실적으로도 이것이 유일무이한 해결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케세라 세라’는 ‘될 대로 되라’는 뜻이지만, 자유방임형의 정책(?)은 절대 아닙니다. 케세라 세라는 교육이라는 국지적인 영역에 대한 대안이라기보다는 전면적인 대안으로서의 '삶의 패러다임’입니다. 특히 천민자본주의 한국사회에서 만연한 ‘생존경쟁의 패러다임’에 비해 ‘케세라 세라의 패러다임’은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과도 일맥상통하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도리스 데이의 [Que Sera Sera]는 가벼운 왈츠풍의 노래이며 음악성의 깊이도 없지만 노랫말의 이면에는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학생의 날’에 (영어)선생님들께서 아이들에게 이 노래의 뜻을 함께 음미하며 부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공부 못한다는 이유로 주눅 든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리라 생각합니다.

 


When I was just a little girl I asked my mother what will I be.

Will I be pretty? Will I be rich?

Here is what she say to me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 will be will be.

내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 이 다음에 내가 뭐가 될까 물었지

미인이 될 수 있을까?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케세라 세라. 뭐든 될 대로 되겠지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란다

케세라 세라. 무엇이 되든 네가 될 대로 될 거야


When I was grew up and fell in love I asked my sweet heart

What live's ahead?

Will we have rainbows, day after day?

Here's what my sweetheart said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 will be will be.

성인이 되어 사랑에 빠졌을 때 나의 연인에게 물었지

우리들의 앞날이 어떠할까?

우리들 삶이 날마다 무지개빛일까?

그 사람이 대답하길

케세라 세라. 뭐든 될 대로 되겠지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란다

케세라 세라 뭐든 될 대로 될 거야


Now, I have children of my own, they asked their mother.

What will I be?

Will I be handsome, will I be rich?

 I tell them tenderly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 will be will be.

Que sera sera~!

이젠 나도 어머니가 됐어. 내 아이들이 내게 물어왔지

이 다음에 내가 뭐가 될까요?

미남이 될까요? 부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차분히 일러줬지

케세라 세라. 뭐든 될 대로 될 거야.

미래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란다.

케세라 세라. 뭐든 네가 될 대로 될 거야.



고등학교 동창회 같은 곳에 가보면 학창시절에 “저거 인간 되겠나” 싶었던 아이들이 뜻밖의 모습으로 나타나 친구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또한 공부를 못해서 예상대로(?) 자동차 정비 따위의 일을 하는 친구의 경우도 밝은 표정을 짓는 것으로 미루어 나름 행복한 삶을 살고 있구나 생각게 하기도 합니다. 반면, 무슨 법대/의대를 나와 변호사나 개인병원을 개업했다는 친구들의 경우는 좋은 차를 몰고 다님에도 늘 돈 걱정 하는 모습만을 보여줍니다. 이들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돈자랑 아니면 돈걱정 뿐입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닐뿐더러 자산순도 아닌가 봅니다.

지금 공부를 잘 하든 못 하든, 우리 아이들은 저마다 어떤 모습으로든 미래에 자기 나름의 모습으로 삶을 살아갈 겁니다. 이게 ‘케세라 세라’입니다. “될 대로 되라”하면 우리말 어감상 ‘자유방임’을 연상케 하지만, “What will be will be”란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곧 ‘학생의 날’이 다가오네요.

연중 입시지옥에 신음하는 우리 아이들, 이 날 특별히 더욱 따뜻한 눈길로 아이들을 품으시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긴 글을 맺습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새로운 시대의 교육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아 출항합니다

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