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케세라 세라

  존경하는 조합원선생님들께.


10월의 마지막 밤입니다.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를 선생님들께 풀어놓을까 생각하다가 지난번처럼 좋은 음악과 함께 그 음악과 관계되는 글을 쓰기로 합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이지만 이용의 노래가 아닌 Doris Day의 [Que Sera Sera]입니다. 제가 이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삼은 것은 오늘 이야기가 ‘우리 아이들의 삶’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년째 이 학교에서 5․6학년 영어전담을 맡고 있는데,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날씨가 더워서인지 수업시간에 조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옆 친구가 내 눈치를 보며 짝꿍을 막 깨우려 하길래 “그냥 나둬라. 잠 오면 자야지” 했습니다. 이 파격적인(?) 나의 배려에 아이들이 맞장구를 치면서 몇몇은 “수업시간에 졸다가 혼난 기억”들을 늘어놓기 시작하는데, 놀라운 것은 “학원에서 졸다가 맞은 아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을 6교시 까지 학교에서 수업 받게 하는 것도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인데, 그것도 모자라서 대부분의 우리 아이들은 방과 후에 학원 수업 까지 받습니다. 그런데 제 돈 들여 공부 배우러가서 졸았다고 두들겨 맞다니..... 때리는 학원교육 관계자나 또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는 학부모들이나 모두들 참 이상합니다. 웃지 못할 현실은 대도시는 물론 구미같은 중소도시만 하더라도 명문학원 소리 듣는 곳에서는 아이들을 많이 때린다고 하는데 그런 학원일수록 학부모들이 못 보내서 안달이라고 합니다.


학원관계자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학교는 뭐 그리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나요?” 할 말이 없습니다. 아무튼, 교육에 관한 한 우리는 미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미친'이란 표현이 점잖지 못한 어법이겠으나 앞으로 제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 이 말을 꼭 써야 합니다. 한국사회에서 교육이 현상하는 본질에 대한 적확한 한마디로, "미친 사회, 미친 교육"이란 말 이외의 다른 진술 형태를 생각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一物一語, 한 사물을 정확히 규정하는 표현은 한 낱말밖에 없다 - Flauvert .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학생의 인격을 마구 짓밟는 곳에서 교육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는 뻔합니다. 여기서는 ‘교육’이 아닌 ‘조련’이, 교사와 학생 간의 ‘인간적 만남’이 아닌 ‘상거래 행위’가 있을 뿐입니다. 학습은 학생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발견의 쾌감을 얻게 하는 방식보다는 오직 ‘드릴’로 일관할 것입니다.

이런 학원/학교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떤지 몰라도 학생의 입장에선 두들겨 맞아가면서 재미도 없는 공부를 억지로 하는 것이 즐거울 리가 없겠죠. 초등학생들이 학교에서 학원으로 이어지는 숨 가쁜 일과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정상적인 아이라면 당연히 지루함을 느끼고 한 눈을 판다거나 한두 번 학원숙제를 빼먹기가 일쑤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아이는 이 이상한 교육시스템에서 낙오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 비정상적인 체제에서 살아남는 아이와 학부모는 어떤 자긍심을 가질 것입니다. 요컨대, 전자에겐 무능함의 낙인이, 후자에게는 미래의 성공을 보증하는 첫 번째 ‘좁은문’을 통과했다는 보상심리가 주어질 겁니다. 바로 이러한 속성에 따라 “많이 때릴수록 학부모들이 더 선호하는” 미친 메커니즘이 고착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저 또한 교사인 동시에 아이의 부모이기도 합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이 미친 사회에서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아이 공부’와 관련하여 부모가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죠. 교육전문가인 우리가 볼 때 “저건 아니다”라고 확신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현실적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초등학교 1~2학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문제 같지도 않은 시험지 풀려서 그 점수를 부모님 확인(도장) 맡아오게 하는 따위. 초등교육전문가인 내가 풀어도 80점 이상 못 맞는 이상한 시험을 망쳤다며 울상 짓는 집 아이를 볼 때마다 정말 한숨과 분노가 터져 나옵니다.


가급적 읽기 편하시게 글을 길게 쓰지 않으려 합니다만, 이 사회에서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이 뭘 뜻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습니다.

[장학퀴즈]나 [도전골든벨] 같은 TV 프로에서 최종적으로 ‘살아남는’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이던가요? 이를테면 베토벤의 [Moonlight Sonata]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와도 아무도 답을 못합니다. 그러다가 아나운서가, 베토벤... 밤... 어쩌구 하면 벨을 눌러 '월광'이라고 맞힙니다. 나는 이게 원숭이 재주넘기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도스토옙스키' 하면, '죄와 벌'이고, '죄와 벌' 하면 도스토옙스키고...... “한 권의 책”에서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잡다한 책들의 제목과 줄거리 외우기는 것이 학력사회의 피라미드 상층부로 향하는 지름길이 되는 이런 교육풍토가 누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지...... 아이들 죽도록 공부 시켰으면 개인이나 사회의 발전을 위해 뭔가 남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중략 -


우리 아이들, 특히 초등학생들의 신세는 '경주마'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첫째, 말의 자발적인 의지와 필요에 따라서가 아니라 외적 강제에 의해 뜻도 영문도 모르고 목표를 향해 죽도록 달려가야 합니다.

둘째, 경주마의 가치는 오직 성적으로만 가늠됩니다. 인간성(?) 좋은 말도 성적이 좋지 않으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셋째, 말의 본질은 ‘야생마’입니다. 말은 들판을 자유롭게 노닐기 위해 태어났지 경주용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경주용으로 전락하면서 말의 본성에 충실한 자발적 성장은 멈추어 버립니다. 트랙 안에서 달리기만 잘 하는 것은 ‘발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퇴행’이라 일컬어야 합니다.

놀이터와 놀이시간을 빼앗긴 어린 아이는 거세된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학교 공부 마칠 무렵 교문 앞에서 아이들 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노란색 봉고차를 보면서 나는, “저것이 닭장차와 뭐가 다른가?” 생각합니다.



자 그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교사를 떠나 학부모로서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해 제가 고민 끝에 정리한 것을 여러 선생님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교육에 관한 한, 제정신이 아닌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미친 사회, 미친 교육”임을 인정한다면, 결론은 자명해집니다. 물론 저는 그 자명한 결론을 창백한 당위론으로만 포장하지는 않겠습니다. 논리 전개의 편의상, 1)당위 2)현실 3)쟁점사항 4)결론 이러한 포메이션으로 구성하여 (이 글에서는) 그 요지만을 적어봅니다.


1) 당위 : 학부모가 되어서 같이 미쳐갈 수는 없다. 목숨 보다 더 소중한 우리 새끼들을 미치게 만들 수 없다.

2) 현실 : 그 미친 생존경쟁의 대열에 미친 척하고 뛰어 든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인내의 결과로 달콤한 열매를 얻는다는 보장이 없다.

3) 쟁점 : 설령 그 달콤한 열매를 취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인간다운 삶의 행복"을 의미하는가? 이 천민자본주의의 미친 교육시스템 속에서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이 대관절 뭘 의미하는가?

4) 결론 : 공부를 스스로 재미있게 하게 하자. 그리고 공부의 결과에 대해서는 “케세라 세라”


케세라 세라!

당위적으로나 현실적으로도 이것이 유일무이한 해결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케세라 세라’는 ‘될 대로 되라’는 뜻이지만, 자유방임형의 정책(?)은 절대 아닙니다. 케세라 세라는 교육이라는 국지적인 영역에 대한 대안이라기보다는 전면적인 대안으로서의 '삶의 패러다임’입니다. 특히 천민자본주의 한국사회에서 만연한 ‘생존경쟁의 패러다임’에 비해 ‘케세라 세라의 패러다임’은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과도 일맥상통하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도리스 데이의 [Que Sera Sera]는 가벼운 왈츠풍의 노래이며 음악성의 깊이도 없지만 노랫말의 이면에는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학생의 날’에 (영어)선생님들께서 아이들에게 이 노래의 뜻을 함께 음미하며 부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공부 못한다는 이유로 주눅 든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리라 생각합니다.

 


When I was just a little girl I asked my mother what will I be.

Will I be pretty? Will I be rich?

Here is what she say to me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 will be will be.

내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 이 다음에 내가 뭐가 될까 물었지

미인이 될 수 있을까?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케세라 세라. 뭐든 될 대로 되겠지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란다

케세라 세라. 무엇이 되든 네가 될 대로 될 거야


When I was grew up and fell in love I asked my sweet heart

What live's ahead?

Will we have rainbows, day after day?

Here's what my sweetheart said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 will be will be.

성인이 되어 사랑에 빠졌을 때 나의 연인에게 물었지

우리들의 앞날이 어떠할까?

우리들 삶이 날마다 무지개빛일까?

그 사람이 대답하길

케세라 세라. 뭐든 될 대로 되겠지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란다

케세라 세라 뭐든 될 대로 될 거야


Now, I have children of my own, they asked their mother.

What will I be?

Will I be handsome, will I be rich?

 I tell them tenderly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 will be will be.

Que sera sera~!

이젠 나도 어머니가 됐어. 내 아이들이 내게 물어왔지

이 다음에 내가 뭐가 될까요?

미남이 될까요? 부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차분히 일러줬지

케세라 세라. 뭐든 될 대로 될 거야.

미래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란다.

케세라 세라. 뭐든 네가 될 대로 될 거야.



고등학교 동창회 같은 곳에 가보면 학창시절에 “저거 인간 되겠나” 싶었던 아이들이 뜻밖의 모습으로 나타나 친구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또한 공부를 못해서 예상대로(?) 자동차 정비 따위의 일을 하는 친구의 경우도 밝은 표정을 짓는 것으로 미루어 나름 행복한 삶을 살고 있구나 생각게 하기도 합니다. 반면, 무슨 법대/의대를 나와 변호사나 개인병원을 개업했다는 친구들의 경우는 좋은 차를 몰고 다님에도 늘 돈 걱정 하는 모습만을 보여줍니다. 이들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돈자랑 아니면 돈걱정 뿐입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닐뿐더러 자산순도 아닌가 봅니다.

지금 공부를 잘 하든 못 하든, 우리 아이들은 저마다 어떤 모습으로든 미래에 자기 나름의 모습으로 삶을 살아갈 겁니다. 이게 ‘케세라 세라’입니다. “될 대로 되라”하면 우리말 어감상 ‘자유방임’을 연상케 하지만, “What will be will be”란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곧 ‘학생의 날’이 다가오네요.

연중 입시지옥에 신음하는 우리 아이들, 이 날 특별히 더욱 따뜻한 눈길로 아이들을 품으시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긴 글을 맺습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