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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교육 : 2) 사회 기능으로서의 교육

2장. 사회 기능으로서의 교육 (Education As A Social Function)

 

2 장의 요약문은 두 문단으로 되어 있네요.

일단 첫번째 문단의 내용만 풀어봤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작업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한 이틀 꼬박 컴앞에 앉아 책과 씨름하며 작업했습니다. 영문원서와 이홍우, 그리고 김성숙의 책을 동시에 대조하며 정리하다 보니 일이 조금 어렵네요.

해서, 앞으로 진도가 잘 나가지 않더라도 제 입장을 이해해주십사 하는 뜻에서...

 

그냥 요약문만 읽어서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실 것 같습니다.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암튼, 열공~~

 

(요약 -1)

연속해서 발전해가는 사회의 생명에 필요한 태도나 성향을 아이들 내부에 발달시키는 일은, 신념이나 정서나 지식의 직접적인 전달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환경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환경은 생물의 특징인 활동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여러 조건의 총화(總和)이다. 또 사회적 환경이란, 그 성원 중 어떤 한 사람의 활동에 굳게 결부되어 있는 동료들의 활동 전체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어떤 개인이 그 어떤 연대적 활동에 관여, 즉 참가하는 정도에 따라 진정으로 교육적 효과를 발휘한다. 사람은 공동 활동에서의 자기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그 공동 활동을 추진시키는 목적을 자기 것으로 하고, 그 방법이나 대상을 숙지하며, 필요한 기술을 획득하여 그 정서적 기풍에 젖게 된다.


(풀이-1)

제 1장에서, 사회라는 유기체는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자기갱신을 통해 존속․발전해 가는데, 이 갱신은 집단의 미성숙한 구성원의 교육적 성장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사회집단이 소중히 여기는 그 무엇(태도나 성향)을 아이들에게 강제로 주입시킬 수는 없다. “말을 물가에 끌고 갈 수는 있어도 강제로 물을 먹일 수 없다”는 표현이 그대로 이 책에 등장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에 대한 듀이의 대답은 “환경의 작용으로 특정한 반응을 유발하는 것”이라 한다(2-1-3). 환경을 어떻게 작용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연스럽게 답이 나온다.

# (2-1-3)에서, 2는 챕터(장)수, 1은 챕터 내의 작은 제목 번호, 3은 그 번호 내에서의 셋째문단을 뜻한다.

 

‘환경’에 대한 듀이의 정의를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듀이에 의하면, 무엇을 통해 인간이 변화되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 사람의 환경(The things with which a man varies are his genuine environment)이라고 한다. 계속해서 듀이는 환경을 다시 정의하기를... “요컨대, 환경이란 어떤 생명체의 특징적인 활동을 조장하거나 저해하는, 또는 자극하거나 금지하는 조건을 말한다.”(2-1-4)

이 문장에서 “특징적인(characteristic)”이란 수식어가 중요하다. 위의 <요약문> 셋째 줄에서 내가 붉은색 처리한 ‘특징인’이란 낱말도 영어의 ‘characteristic(특징적인)’에 해당한다. 본문에서 듀이는 사람마다 특징적인 환경이 다 다르다고 한다. 이를테면, 전교조에 들고서 자신의 교직관이나 행동양식이 바뀌었다면 전교조교사에게 전교조라는 조직이 중요한 환경이지만, 다른 교사에게 전교조는 별 중요한 환경이 못 된다.


그 다음으로, ‘사회적 환경’이란 작은 제목으로 글의 주제가 넘어가는데, 이 대목에서 듀이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행동습관을 규정하는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환경임을 강조한다.

“타자와 더불어 활동하는 존재(즉, 인간)는 사회적 환경에 놓여있다. 그가 무엇을 행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행할 수가 있는가는 다른 사람의 기대나 요구, 찬성, 비난을 통해 정해진다.” (2-2-1)


나아가 듀이는 사회적 생활환경(medium)이 어떻게 미성숙한 어린이들을 양육하는가에 대해 자문자답을 한다. 이에 대한 듀이의 관점은 행동주의심리학의 그것과도 유사하다. 2-2-2문단의 말미에 미로 속의 쥐가 음식을 찾아가는 ‘습관’을 형성하는 예가 언급되는데 이는 쏜다이크(Thorndike)를 연상케 한다. - 미국을 대표하는 심리학자 쏜다이크의 이력을 보면 듀이와 공통점이 많다. 둘 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학자들이며 쏜다이크는 프래그머티즘의 창시자인 James의 제자이다.

사회적 환경 속에서 인간의 행동이 변화해가는 이치가 동물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듀이의 유물론적인 설명방식은 신선하기도 하지만 더 좋은 것은, 듀이의 그런 사고가 기계적 유물론에 그치지 않는 점이다. 듀이는 그런 방식을 교육과 구별하여 ‘훈련’으로 규정한다. 바로 이 점이 듀이가 행동주의심리학자들(즉, 기계적 유물론자들)과 다른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 교육과 훈련을 구분짓는 기준이 뭔가?

이에 대해 듀이는 말(馬)이 길들여지는 예를 통해 특유의 명쾌한 논리를 펼친다. 말이 주인이 바라는대로 행동을 변화시킬 때, 말과 주인은 동반자적 관계에 있지 아니하다. 만약에 말이 동반자가 된다면, 말은 그 공동의 활동에 종사함으로써 그 일에서 상대방이 가지는 것과 동일한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2-2-4문단)

(위의 문장에서 ‘동반자’란 말은 영어로 ‘partner'인데, 김성숙 번역본에서는 '공동의 구성원’, 이홍우는 ‘동업자’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이 낱말보다 더 중요한 키워드는 ‘관심’이다. 영어의 interest는 관심과 흥미, 두 가지의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김성숙은 ‘흥미’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문맥에서는 ‘관심’으로 옮겨야 한다. 번역하는 사람이 원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해낼 때 올바른 번역이 이루어진다. 김성숙은 아마도 교육학 전공이 아닌듯하여 듀이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위의 훌륭한 설명에서 교육과 훈련을 구별짓는 기준이 나왔다. “교육자와 피교육자 사이의 공동의 관심”이다. 그 관심이 일방적이거나 제 팔 제 흔들기 식일 경우, 교육이 아니라 훈련이다. 말의 관심은 먹이 또는 채찍을 피하기이고 주인의 관심은 스피드 혹은 돈벌이이기에 이 둘 사이엔 공동의 관심이 없다.

마찬가지로!!!!!!

교사의 관심은 승진점수 또는 교원평가 점수에 있고 학생의 관심은 부모님한테 인정받기나 터지지 않기에 있다면,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훈련이다.

그 다음 문단(2-2-5) 첫째 줄에서 듀이가 하는 말을 보라.

“... 많은 경우에 - 너무나 많은 경우에 - 미성숙한 인간의 활동은 오직 유용한 습관을 가지도록 하는 목적으로 조종된다.”


앞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에 대해 듀이는 “환경의 작용으로 특정한 반응을 유발하는 것”이라 했다는 점을 일러두었는데, 이젠 환경을 어떻게 작용시킬 것인가에 대한 답이 나왔다. 미성숙한 이들의 관심과 사회집단의 관심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 일치를 위해 듀이는 ‘참여’를 강조한다.

개인을 단체 활동의 참여자로 만들어서, 그로 하여금 단체의 성공을 자기 자신의 성공으로, 단체의 실패를 자신의 실패로 느끼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완성단계이다(2-2-6).


‘교육과 사회’라는 화두로 이 장에서 듀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교육은 사회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요약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교육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장 좋은 예로서 ‘언어의 습득’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듀이에 따르면 어린 아이가 어떤 낱말을 익히는 것은 아이와 부모 사이의 공동의 경험 속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말이 사용되기 때문이다(2-2-9).


공동의 경험.

그렇다. 공동의 경험에 터하지 않은 교육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런 교육은 그저 관념의 놀음에 지나지 않으며 그래서 아이들이 공부에 흥미도 못 느끼며 또 쓸데없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특히 <사회> 교과가 그러하다. 교재의 구성이 대부분 아이들의 경험과 동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일상의 리얼리티와도 거리가 멀다. 이를테면, 경찰의 본분이 시민의 생명을 지켜주는 역할이라거나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관념들은 ‘용산철거민’ 뉴스를 대하는 순간 한 방에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나 죤 듀이가 모르는 것이 있다.

‘공동의 경험’에 기초하지도 않고 일상의 현실과도 동떨어진 지식인 줄 뻔히 알면서 학교가 아이들에게 그런 허구적 관념을 주입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계급사회에서 계급적 모순을 은폐하여 사회적 갈등을 차단하고 사회적 통합을 강조하는 것이 자본주의 교육의 목표이기 때문에 학교교육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듀이가 교육과 사회의 불가분의 성격을 강조한 것은 옳지만, 듀이가 말하는 그런 교육은 계급적 모순이 없는 공동체사회-(원시)공산사회-에서나 가능하다. 교육은 사회 속에서 사회와 더불어 기능하지만, 사회는 계급 헤게모니에 의해 정치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이란 말처럼 허구적인 말도 없다. 프레이리(Paulo Freire)가 말하듯이, 모든 교육은 정치적이다. 철거민의 입장에서 용산 사태를 교과서에 담는 것은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죤 듀이의 교육에서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한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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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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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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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