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프랑스의 교육 : 정부에서 보는 교육에 대한 투자.

이번 글을 쓰기 전까지는 항상 교육 해당자들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글을 써 왔다. 하지만 교육을 받는 쪽이 있으면 제공하는 쪽도 있어야 하며, 그 양쪽의 타협선에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만큼 교육을 제공하는 쪽의 관점 역시 중요하게 알아야 하며, 그러한 교육 제공자의 관점을 앎으로 인해서 더욱 사회인으로써의 교육 기능이 발전하리라 생각하며, 그와 동시에 교육을 받는 입장에서 주장해야 할 권리를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프랑스에서 교육에 투자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일부 분석하여 보고자 한다.



1. 교육에 대한 지원은 복지가 아닌 투자

프 랑스에서 교육에 대한 지원은 절대 복지의 항목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건강도, 문화도 복지인 국가에서 어떻게 교육이 복지가 아니냐고 하겠지만, 기초적인 교육은 국가를 지탱하기 위한 기본적인 틀 이라는 점에서 복지가 아니라 의무에 해당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의무교육에 대한 이야기이며, 대학교 이상의 고등 교육에 대해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더 많은 부를 창조하게 해주며, 그로 인해서 국가의 이익은 꾸준히 증가하게 된다. 그렇기에 프랑스에서는 교육에 들어가는 예산은 복지의 개념이 아닌 투자의 개념으로써, 그리고 그 투자의 회수를 실력있는 인재들을 양성해 냄으로써 얻어 가는것이다.


국내 모 대학의 전경
이 대학 총장님 등록금이 높은게 좋은 교육 받는 반증이라고요?
머리가 부족한건 알겠는데 부족한건 좀 깨닳으시죠?

이렇게 투자의 개념으로 교육을 시키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교육을 받는 사람들에게 절대 쉽게 학위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 학문에 힘을 쏟을 수 밖에 없으며, 그로 인한 학문적인 발전은 돈으로 사올 수 없는 다양한 발전을 지탱하게 하여 준다. 실제로 프랑스는 인문학과 이공계 어느쪽으로 가리지 않고 세계적인 수준의 독자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기술적 독립은 저러한 국가의 투자가 뒷받침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교육을 통한 사회적 손실의 최소화



프 랑스에서 교육은 저런 국가의 발전만을 가져 오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한가지 부산물에 불과하다. 그 또 다른 부산물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사회적 손실의 최소화이다. 프랑스의 가정 교육 편에서도 소개할 내용이지만 프랑스의 교육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바로 책임감이다. 유년기에 책임과 자유가 동시에 없지만 계속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배워가면서 점점 책임감과 자유를 부여해줌으로써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교육 하는데 집중한다. 그렇기에 납세, 시위, 노동등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잃는 행위는 매우 천박한 행위로 규정되며, 그로 인해서 프랑스에서 자신의 권리를 찾는 것 만큼 책임을 못 다하는 것도 견딜 수 없는 일이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 사건
이 사건 이대로 두는게 책임지는건 아닐텐데?
이게 자유의 무게를 모르면 생겨나는 사회적 손실이 아니면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그 리고 이러한 자유의 책임감을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유와 책임은 떨어뜨릴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이것이 사회의 도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사회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더 잘 살 수 있는 사회라면 어느 쪽의 사회가 더  잘 돌아갈 수 있는지의 여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일이다. 이렇듯 프랑스에서는 교육을 통하여 사회 구성원들의 책임감을 확고히 하며 그 책임의 신성함을 깨닳게 해줌으로 인해서 사회에서 나타날 다양한 사회적 낭비를 막아주고 감시 할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다.



3. 교육에 따른 국가의 이익 증대

교 육은 단순히 학문의 발달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학문이 발달하게 되면, 그 학문을 배우기 위한 수많은 유학생들이 몰려오며, 그로 인해서 더 많은 인재를 유치하기도 하고, 민간 외교의 선봉이 되며,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 생활하면서 자국의 GDP가 증가하는등 수많은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정부에서 다른 방향으로 돈을 쓰고, 발전소를 건설해주고, 땅을 판다고 해서 나오는 것들이 아니다. 이렇듯 교육이라는 분야에 투자를 함으로 인해서 기대되는 발전은 단순히 인재의 수급만이 아닌 포괄적인 사회 간접 자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파나마 운하의 모습
이런게 필요한 나라도 있는데, 저런게 필요 없는 나라는 교육에 돈쓰는게 낫지 않을까?


결론

프 랑스 정부의 교육에 대한 지출은 복지라는 면 보다 오히려 투자라는 면이 부각됨으로 인해서 더욱 발전하는 기회가 되어 왔으며, 정부가 교육에 지출 하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는 것을 공감함으로 인해서 많은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교육에 대한 공공의 지출은 결국 사회를 풍요롭게 해주며, 삶을 인간답게 해 주는 기본적인 사회  간접자본이고, 그 파급력은 교통 수단에 비할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육보다 밥이 중요한 나라가 있고, 그런 나라에게 교육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갓난 아기에게 고기를 먹이는 행위라고 생각 하지만, 이 글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사회적 기반이 마련되어 있는 국가라면 교통수단을 하나 더 마련하려고 자연을 훼손하기 보다는 교육적 투자를 함으로 인해서 더욱 미래적 가치를 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 하는 바이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