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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불평등의 관점을 전환하자(2)

“개천에서 용 나지 않는 것”은 교육 불평등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이건 진보적인 교육운동 단체들이 잘 빠지는 함정이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게 가능하도록 만드는게 과연 교육평등인가? 그건 오히려 기존의 체제를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개천에서 용 나는게 어려워진게 문제가 아니다. 옛날 민중가요 중에 “못 배워 땅만 파는, 우리 부모 원망 하랴?” 하는 가사가 있었다. 이젠 이런거 잊어버리자. 이건 왜곡된 교육관이며, 우리가 그토록 비판해 마지 않는 입시교육의 원조다. 진정 지적인 진보진영이라면 민중의 이런 소박한 감상에 동정은 할지언정 동조해서는 안된다. “개천에서 용 난적이 있기나 할까?” 용이 없거나 어디나 개천이던 시절에나 가능할 뿐이다. 교육을 통해서는 개천에서 용 날 수 없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 정상이다. 다만 우리 나라는 1894년, 1910년, 1945년, 1950년, 1998년 등 거의 매 세대마다 나라가 초토화되고 기존의 질서가 무너져서 전국이 개천이 되고, 용이 모조리 죽어버린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착시현상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매우 드물고, 다시 와도 안 된다.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화된 나라에서의 사회학적 연구 결과는 매우 냉정하다. 그 중 블라우와 덩컨의 경로 모형, 그리고 콜맨 보고서의 결과는 충격적이다. 이 결과들은 한 마디로 어떤 학생이 장차 성공하느냐 마느냐에서 교육은 거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학업성취도에서조차 학교, 교사 변인은 별 기여를 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유의한 변인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뿐이었다. 즉 부모가 용이면 용이고, 부모가 미꾸라지면 미꾸라지인 것이다. 만약 개천에서 용난다를 기반으로 교육 불평등을 말하려면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필살기인 인간자본론을 수긍해야 한다. 그것은 학교교육에서 생산력과 무관한 영역을 몽땅 제거해서 효율화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동의하는가? 그러나 실제 학교 교육은 현실 사회에서 잘살기 위해 필요한 능력과 덕목과 무관한 …

심상치 않은 금융흐름

불교 사찰마저 주차장 공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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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 중독된 한국인들. 아시아에서 가장 중증이다. 동네 음식점을 갈때도 차, 심지어 사찰도 주차장을 만들어서 고객을 유치한다. 홍콩의 초일류 레스토랑도 주차엔 관심없고 오직 음식과 서빙에 집중하지만 이 나라는 커피숍까지 발렛서비스.. 둘이서 3600원짜리 커피 두잔 마시고 3000원급 주차 서비스라....물가지옥? 차만 안끌고다니고 무료주차만 요구 안해도 서비스물가 30%는 내려갈거다.Published with Blogger-droid v1.6.7

한국적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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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마다 짜증날 정도로 붙어있는 금연마크. 그런데 화장실마다 담배연기 안맡기 힘든 현실. 심지어 인천공항 화장실조차.Published with Blogger-droid v1.6.7

교육 불평등의 관점을 전환하자

진보진영에서 말해서는 안 되는 교육 불평등 우리는 교육 불평등을 말하기 전에 교육을 말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교육이 A라면 우리가 말하는 교육 불평등은 A의 불평등이라야 한다. 그런데 현재 진보진영의 교육 불평등 관련 논란은 교육은 A라고 주장하면서 B의 불평등을 문제 삼고 있어서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흔히 진보진영은 현재 우리 교육이 왜곡된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입시교육이 아니라 참교육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진보진영은 그 왜곡된 교육의 결과에서 비롯된 불평등을 교육 불평등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 따져보자. 왜곡된 교육의 결과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상류층에게 더 많이 분배가 된다면 그것은 문제 삼을 수 있는 불평등이 아니다. 도리어 평등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입시교육을 교육으로 제대로 된 교육으로 인정하지 않는 집단은 입시에서의 불평등을 교육 불평등이라 부르지 말아야 한다. 높은 서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목표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참교육을 실천하겠다고 외친 집단이 있다면 저소득층 자녀가 서열 높은 대학에 가지 못했다고 해서(이게 비록 아무 문제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걸 들어 교육 불평등이라고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 진보진영에서 말해야 하는 교육 불평등 참교육을 가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면 교육 불평등 역시 이런 참교육의 혜택이 계급·계층간에 불공평하게 분배되고 있을 때 문제 삼아야 한다. 만약 입으로는 참교육을 말하면서 몸으로는 왜곡된 입시교육의 혜택을 요구한다면 이건 진보라는 말을 차마 입에도 담기 어려운 언어도단을 범하고 있는 꼴이 될 것이다. 만약 우리 주장대로 입시교육이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한다면 그런 잘못된 교육이라면 상류층 아이들이 그런 교육을 더 많이 받는 것이 무슨 교육 불평등이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주장하는 참교육에서 불평등이 나타날 때 이를 교육 불평등이라고 문제 삼아야 한다. 우리는 즉각적인 충동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조…

어느 젊은 진보주의자에게

이 글은 고민하고 있는 어느 후배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자유. 이것처럼 정의 내리기 어려운 말이 또 있을까요? 또, 이렇게 정의 내리기 어려운 말을 목표로 삼은 투쟁이 과연 성공은 고사하고 성립이나 될 수 있을까요?
맑스의 자유는 무엇일까요? 맑스의 자유는 필연성의 인식 다음 단계에 찾아옵니다. 맑스의 필연성은 헤겔의 그것처럼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수반해야만 이루어지는 잠재적 필연성이니까요. 따라서 필연성을 인식하고서 그 필연성을 구현하기 위한 실천을 감행하고자 결단하는 과정에 바로 자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이건 제 독단일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자유 때문에 폭도와 혁명가가 다른 것이죠. 폭도에게는 자유가 없죠. 그들은 자신들의 충동과 감정, 순간적인 분노의 노예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혁명가는 과학적 인식과 오랜 반성 끝에 내린 결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니 자유로운 것이죠. 즉 맑스주의자의 자유는 흔히 말하는 “자유.” 혹은 한대수나 포크가수들이 말하는 “자유”와는 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죠. 흔히 말하는 “자유”는 자칫 잘못하면 충동의 복권으로 이어져서 폭도 수준이 되겠죠.

OOO님은 바로 이 점을 간과하신 것 같군요. 맑스주의자의 자유는 아무 때나 사회주의를 선언하고 사회주의적으로 살아갈 자유가 아닙니다. 만약 고려시대 때 그런 주장을 하고 그런 삶을 실천했다면 그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시대착오자입니다. 좀 차갑고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맑스주의자는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굳이 비중을 두자면 차가운 머리가 우선입니다.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결단. 이 두가지중 어느 한 가지만 기울어도 운동은 실패합니다.
그런데 OOO님은 마치 맑스처럼 생각하고 맑스처럼 생활하고 각성하는 것이 운동의 절대 조건인 것처럼, 아니 성공의 열쇠인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말씀 속에는 모든 국민이 맑스주의자가 되면 혁명이 이루어진다는 엉뚱한 결론이 녹아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건 공상적 사회주의이…

강화도 고인돌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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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의 기행입니다.


강화도는 흔히 여행가들에게 수도권의 보물섬이라고 불립니다. 역사 유물만 하더라도 4000년 전 거석문화에서부터 고려를 거쳐 근현대사 유적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바다로 둘러싸인 자연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산, 마니산, 혈구산 등 훌륭한 산들도 있습니다. 오직 하나 흠이 있다면 서울에서 강화도까지 가는 길이 김포일대의 난개발로 인해 아주 지저분하다는 것....어쨌든 이번 답사 여행의 주제는 고인돌입니다. 일단 강화도 고인돌이라고 하면 강화 지석묘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고인돌 중 가장 원형이 잘 유지된 거대한 고인돌입니다. 게다가 간지나는 북방식 고인돌입니다.

여기서 출발해서 잠시 석조여래불입상 한 번 들러주신 뒤 부근리로 향합니다.

지석묘에서 석불까지는 약 2Km, 다시 석불에서 부근리 고인돌까지도 약 2Km 걷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발굴 중이라 자세히 둘러보지는 못했습니다.
부근리 고인돌에서 다시 한 20여분을 계속 걸어가면 마치 두꺼비같이 생긴 신삼리 고인돌이 나옵니다.

신삼리 고인돌을 뒤로 하고 왔던길을 되짚어 오다가 삼거리 고인돌 안내판을 따라 약 1.7 Km쯤 들어갑니다. 가다가 길이 산길로 바뀌기 때문에 의외로 힘이 듭니다. 저 멀리 능선 마루에 고인돌이 있습니다.
이 산꼭대기에 왜 이런 힘들고 무거운 고인돌을 세웠는지 참 이상한 일입니다. 아무래도 고인돌의 무덤 설보다는 제단 설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산길을 다시 한 40분을 올라가면 고려산 정상 못 미쳐서 고천리 고인돌군이 나옵니다. 고천리 고인돌 군을 둘러보고 적석사에서 내려가는 길에 저 아래 내가 저수지가 아득하게 내려다 보입니다.

내가 저수지 다 내려간 곳에 오늘의 하이라이트, 오상리 고인돌군이 길손을 맞이합니다. 세계 문화유산 코스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원형도 잘 유지되어 있고 아기자기한 고인돌들이 멀리 산과 어우러져서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스톤헨지 하나도 안 부럽…

안티 기독이 안 될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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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 땅의 기독교는 그 정체가 무엇인지....
제발 일부 광신도의 문제라고 어물쩡 넘어가지 말자. 이런 무리들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실제로 김경동이니 뭐니 하는 스타 목사들 역시 행동을 하지 않을 뿐 이와 비슷한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런 모습은 기독교의 어떤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다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기독교인의 이런 행패를 억제할 시민윤리나 질서가 있는거고 우리나라는 그게 취약한 상태에서 대통령마저 은근히 저런 행패에 동조할 거라 기대하니 기고만장해서 드러날 뿐이다.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6) 고달픔의 우상

고달픔의 우상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그 기원을 상고하기 어려운 속담이 있습니다. 교사의 일이 스트레스 덩어리임을, 그래서 모든 에너지가 다 소진되기 때문에 교사의 똥에는 남아있는 영양가가 하나도 없음을 비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거 정말 무서운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건 매우 잘못된 비유이기도 합니다. 이 비유 속에는 똥에 영양가가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고달프게 일하는 것이 마치 교사의 전형적인 모습인양 몰아 붙이는 은근한 강제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문제 때문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이마에는 내천자가 새겨지고 몸은 파김치처럼 늘어진 채 간신히 집에 들어오고, 집에 들어와서도 밀린 숙제 검사하고, 자다가도 말썽부리는 녀석 야단치는 꿈 때문에 벌떡 일어나는 선생님, 그런 선생님이야 말로 참교사다라는 해괴한 믿음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이 우상도 의외로 널리 퍼져 있어서 신규 교사들 중에는 그야말로 아이들 속에 푹 빠져 들어서 휴식도 없이 매진하는 그런 정열을 보여주는 분들이 드물지 않게 있습니다.

고달프게 일하는 것이 당연한 교사의 상, 이것은 잘못된 믿음이며 우상입니다. 이 우상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모른척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사가 인간이라는 사실, 감정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굳이 루돌프 슈타이너 같은 인지학자들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인간의 신체, 정신, 그리고 감정이 상호연관되어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즉 고달픈 교사가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하기 어려우며, 냉철한 이성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헌신적으로 최선을 다해 교육에 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달프다고 느껴질 정도, 이마에 내천자가 새겨질 정도, 그야말로 똥도 메마를 정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흔히 나이 먹고 게을러진 교사들이 젊고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교사들에게 자주 하는 말 중에 “너도 나이 먹어봐라. 나도 젊었은 적에...”운운하는 말이 있습니다. 게으른 선배교사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5) 째째함의 우상

쫀쫀함, 째째함의 우상

불과 10년전만 해도 교사가 되겠다고 희망하는 남학생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시절의 공기를 여전히 마시고 있는 부모들은 딸에게는 교사가 되라고 강요하다시피 하면서 아들이 교사가 되겠다고 하면 손사래를 칩니다. 심지어 자기 딸이 교육대학에 다닌다고 자랑하는 어느 어머니는 그런 한편 혹시 딸이 남교사와 결혼하게 될까봐 그게 제일 걱정이라고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합니다. 소위 “남자가 째째하게 선생이나 한다.”라는 통념 때문입니다. 수도권보다 지방에서, 또 영남권보다 호남권에서 이런 통념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럼 도대체 이런 해괴한 이데올로기는 어디서 왜 생긴 것일까요?
사실 교사가 큰 뜻을 품고 할 만한 일은 아닙니다. 교사는 뭔가 확인 가능한 큰 실적을 올리고, 경우에 따라 짜릿한 모험까지 감수해야 하는 그런 직업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게 좋은 사람은 문자 그대로 ‘벤처’기업을 창업하거나 종소기업의 기획팀 등에서 일하면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교사는 흔히 야망과는 거리가 멀고, 안정되긴 하지만 지루하고 활동의 폭도 집-학교로 한정되고, 만나는 사람도 교사나 학생들로 제한되어 세상물정에 어둡게되는 그런 직업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이런 통념은 부분적으로 사실인 면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통념이 유포된데는 사회적 편견 뿐 아니라 교사들 자신의 책임도 상당히 있습니다. 즉, 교사의 일 자체가 째째한 것이 아니라, 그 동안 교사들이 째째하게 일해왔기 때문에 이런 통념이 유포된 것입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켰을때 미국의 극동담당자는 “한국인들은 쥐와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한국인에 대한 세계의 통념이었습니다. 한국인은 지도자를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쥐떼같은 겁장이들로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어떤 미국인도 한국인을 이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건 이후 518과 610을 통해 한국인의 역동성과 용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통념은 행동을 통해 뜯어고칠수 있습…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4) 박봉의 우상

박봉의 우상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20세기에는 특히 1970~80년대에는 ‘박봉’이라는 말이 많은 교사들의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면벌부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꽤 오랜 시간동안 국민들의 동정과 온정적인 대우를 끌어낸 주된 자원이기도 하였습니다. ‘박봉에 시달리는’ 이 한 마디면 웬만한 잘못은 눈감아도 되는게 되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교사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1997년까지는 “박봉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아이들을 가르치는....”이라는 담론이 성립 가능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까지도 정말 교사가 박봉이었는지 의심하는 입장입니다만. 하지만 2009년 현재 교사의 보수 수준은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결코 박봉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교사는 지금 보험사에서, 은행에서, 해외여행사에서, 자동차 판매사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잠재고객층입니다. 치과에 가서 진료를 해도 교사라는 것이 밝혀지면 갑자기 아말감 보철은 선택지에서 사라지고 특수 세라믹과 금 중에서 선택하도록 유도됩니다. 시장은 정직하고 냉정합니다. 교사가 정말 박봉이라면 이런 대접을 받지 않겠죠. 하긴 현실적인 요즘 젊은이들은 이미 이 정도는 다 알고 교직을 선택했겠죠.
그럼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볼까요? 1996년 당시 우리나라 1인당 GDP는 약 12,000 달러였습니다. 당시 환율은 1000원 정도 되었으니 1200만원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 경력 5년차였던 제가 받은 연봉은 1600만원 정도 되었으니 3:4 정도의 비율이 나옵니다. 즉 경력 5년차 교사가 1인당 평균 소득의 1.3배를 벌었다는 뜻입니다. 그럼 10년 뒤인 2006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인당 GDP는 대략 16,000 달러, 환율도 1000원 정도였으니 1600만원이 됩니다. 그리고 당시 경력 5년차 교사의 연봉은 2400만원이 넘었습니다. 따라서 2:3, 즉 평균 소득의 1.5배를 받았습니다. 이건 기준 근속연수인 경력 15년차 교…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3) 아이들의 우상

‘아이들’의 우상 내가 여기서 ‘아이들’이라고 특별한 인용 부호를 단 것은 이것을 일반명사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이들은 “저 공터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의미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우리 아이들을 살립시다.” 등의 용례에서, “아이들의 사랑과 믿음이 나의 교직생활 30년의 후원자였다.”라는 어느 선생님의 퇴임사에서 사용되는 아이들입니다. 이 말은 얼른 들으면 무척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박봉과 고달픈 업무에도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아이들’의 헤맑은 눈과 웃음만을 유일한 보상으로 삼아 알뜰 살뜰하게 보살피는 선생님의 상이 저절로 그려집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서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10년 전만 해도 이런 이유 때문에 교사가 되고자 했던 젊은이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불행히도 이것은 우상이며 잘못된 믿음입니다. 파울루 프레이리는 일찌기 이러한 관점을 ‘보육자적 관점’ 혹은 ‘보모적 교사관’이라고 부르면서 경계했습니다. 프레이리 같은 위대한 교육 사상가이자 교육 실천가가 왜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자’는 이 아름다운 생각을 오히려 경계했을까요? 혹은 이와 비슷한 사례로 유명한 혁명가 체 게바라가 혁명가가 되려는 청년들에게 제일 먼저 한 말은 “민중을 믿지 마라.”였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역시 “민중에 대한 사랑”, “민중에 대한 믿음과 헌신”을 위해 몸을 던진 청년들을 몹시 아연실색하게 했습니다. 여기서 던져주는 공통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지식인의 책무, 지식인의 위상과 관련됩니다. 교사는 ‘지식인’입니다. ‘사랑으로’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사실 교사가 아니라 ‘착한 어른’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교사가 꼭 더 잘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게다가 이 일은 부모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부모의 품에서 아이들을 떼어내어 학교라는 공간까지 끌고 와서 교사 앞에 앉혔을까요? 그것은 교사에게서 부모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2) 여가시간의 우상

여가시간의 우상
교사가 되고자 희망하는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강력한 유인동기들 중 어쩌면 가장 막강한 것이 이것일 겁니다. 시간이 많다는 것, 즉 노동시간이 적다는 것 말입니다. 네. 실제로 교사들은 노동시간이 적은 편에 속합니다. 자본주의라고 하는 경제체제가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노동시장에서 판매함으로써 유지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같은, 혹은 더 많은 임금을 받으면서 더 적은 시간을 내어 놓고 있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다른 노동자들을 결과적으로 착취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마르크스가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했을 때 그 투쟁은 ‘부’를 놓고 투쟁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놓고 투쟁한 것입니다. 그것을 마르크스는 적절하게 ‘타인 노동의 전취’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배계급은 타인의 시간을 빼앗아 자신을 위해 노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시간은 생산과 무관한 시간, 즉 여가시간으로 만듭니다. 여가시간이 지겨우면 지배계급은 생산과정에 뛰어들어 나름 노동 하기도 하지만, 이때는 항상 많지 않은 시간, 그리고 직접적인 생산이 아닌 노동이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이런 점에서 나름 우아하게, 그것도 많지 않은 시간만 일해도 되는 교사는 지배계급이거나(음 이건 심하다), 지배계급으로부터 시간을 조금 나눠받은 지배계급의 조력자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사도 노동자다’라고 주장하면서 교사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유사성을 억지로 강조하는 집단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없는 유사성을 억지로 만들려고 하다보면 인지부조화에 빠지게 되며, 그 결과 어느 모로 보나 피지배계급으로는 보이지 않는 교사의 여러 조건을 매우 열악한 것으로 인식해 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진짜 노동자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매우 화가 나고 오히려 자본가보다 더 얄밉게 보일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전교조 활동가들이 돌 맞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진정 교사들이 노동운동을 하고자 한다면 자신들의 실제 조건, 실제 처지를 솔직하게 인정하는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혜택받고 있…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2) 스승의 우상

1. 교사에 대한 일반론
1장. 교사에 대한 우상들
통념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올바른지 여부가 검증되지 않았으나 흔히 사람들이 그렇게 믿기 때문에 마치 보편적인 지식처럼 통용되는 그런 생각들을 일컫는것입니다. 이 통념이라고 하는 놈은 이렇게 겉 보기에는 보편적인 모양을 하고 있고, 또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럴듯하게다듬어져 있기 때문에 특히 위험합니다. 잘못된 통념은 고치기도 어렵거니와, 자칫하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도리어 거짓말장이로몰아버릴수도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잘못된 통념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어떤 지식도 제대로 받아들이기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이나 베이컨 같은위대한 학자들은 자신의 철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전에 먼저 마음에 들어있는 잘못된 믿음의 근원을 추적하고, 그것을 제거하는작업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칸트의 대표작이라는 『순수이성 비판』도 이성을 통한 지식의 확장이 아니라 이성 그 자체에 한계를지워주는 작업이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통념으로 굳어진상태에서는 잘못된 지식만 얻을 뿐입니다. 게다가 인간의 지성은 어떤 경험적 재료 없이, 단지 머리속에 있는 관념만으로도 계속해서새로운 잘못된 관념들을 만들어낼수 있는 저주받은 능력과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생각은 더욱 확장됩니다. 베이컨은이렇게 잘못된 지식을 만들어내게 만드는 마음의 장애들, 그릇된 신념들을 우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유명한 동굴의 우상, 극장의우상, 시장의 우상 따위가 그것이죠. 그래서 먼저 이 우상들을 제거해야 감각기관이 제공하는 경험을 왜곡되지 않게 제대로 지각할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교사란 무엇인가라고 묻기 전에 먼저교사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 그리고 교사에 대한 여러 오해와 편견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앞세우려 합니다. 즉 교사에 대한우상들을 제거하려 합니다. 이런 우상들 때문에 교직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교사가 되어서는 안 될사람이 교사를 희망하기도 하고, 꼭 교사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