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22.

교육불평등의 관점을 전환하자(2)

 
개천에서 용 나지 않는 것은 교육 불평등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이건 진보적인 교육운동 단체들이 잘 빠지는 함정이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게 가능하도록 만드는게 과연 교육평등인가? 그건 오히려 기존의 체제를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개천에서 용 나는게 어려워진게 문제가 아니다.
옛날 민중가요 중에 못 배워 땅만 파는, 우리 부모 원망 하랴?” 하는 가사가 있었다. 이젠 이런거 잊어버리자. 이건 왜곡된 교육관이며, 우리가 그토록 비판해 마지 않는 입시교육의 원조다. 진정 지적인 진보진영이라면 민중의 이런 소박한 감상에 동정은 할지언정 동조해서는 안된다.
개천에서 용 난적이 있기나 할까?” 용이 없거나 어디나 개천이던 시절에나 가능할 뿐이다. 교육을 통해서는 개천에서 용 날 수 없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 정상이다. 다만 우리 나라는 1894, 1910, 1945, 1950, 1998년 등 거의 매 세대마다 나라가 초토화되고 기존의 질서가 무너져서 전국이 개천이 되고, 용이 모조리 죽어버린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착시현상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매우 드물고, 다시 와도 안 된다.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화된 나라에서의 사회학적 연구 결과는 매우 냉정하다. 그 중 블라우와 덩컨의 경로 모형, 그리고 콜맨 보고서의 결과는 충격적이다. 이 결과들은 한 마디로 어떤 학생이 장차 성공하느냐 마느냐에서 교육은 거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학업성취도에서조차 학교, 교사 변인은 별 기여를 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유의한 변인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뿐이었다. 즉 부모가 용이면 용이고, 부모가 미꾸라지면 미꾸라지인 것이다.
만약 개천에서 용난다를 기반으로 교육 불평등을 말하려면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필살기인 인간자본론을 수긍해야 한다. 그것은 학교교육에서 생산력과 무관한 영역을 몽땅 제거해서 효율화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동의하는가? 그러나 실제 학교 교육은 현실 사회에서 잘살기 위해 필요한 능력과 덕목과 무관한 것들이 많으며, 또 그런 것들로만 이루어진 학교 교육은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것인가?
 
그건 절대 아니다. 우리는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즉 입시교육의 평등을 요구하거나 허황된 개천에서 용나기 신화를 거부하는 대신 우리가 그토록 주장해온 참교육에서의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즉 저소득층 자녀들이 부모 수준에 제한되지 않고, 그 이상의 덕성과 지성과 감수성, 그리고 신체관리 능력을 갖추도록 길러내어야 한다. 부모는 어쩌다 생긴 여가시간을 술, 담배, 막장 드라마에 탕진할 지언정, 그 자녀까지 그 수준에서 헤매게 하지 말자는 것이다. (입학사정관 제도와 수능 평이화는 이 점에서 지배계급의 아주 교묘하고 음험한 한 수다) 교사는 저소득층 자녀가 더 높은 성적을 올리게 하면서 교육 불평등을 해소 할 수 없으며, 그건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교사는 저소득층 자녀가 덕성, 지성, 감수성을 함양하도록 할 수는 있으며, 만약 그렇게 함양된 학생이 어떤 목적이 있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동기화 된다면 성적은 저절로 올라간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그 동안 교육 불평등 해소 노력이라고 불려오던 것을 포기함으로써, 즉 교육을 통해 소득격차를 줄인다는 환상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 이렇게 저소득층의 자녀들이 부모의 수준을 넘어 지배층에게 결코 뒤질 것이 없는 지성과 덕성을 갖추게 된다면, 그래서 그 사회가 이런 지성과 덕성을 갖춘 피지배층으로 가득하다면 그 사회는 강력한 평등에의 요구에 직면할 수 박에 없기 때문이다. 즉 교육이 불평등 해소에 기여한다면 이는 그 사회를 보다 민주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나설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길러내기 대문이지 더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기 때문이 아니다. 교육 평등이 사회 평등에 미치는 영향은 사회 전반적인 개혁이 가능하게 한다는 데 있지, 결코 교육받으면 더 잘살게 되는데 있지 않다. 따라서 교육운동은 지성인 교사들이 끊임없이 비판적 의식을 일깨우는 속에서 사회적 평등의 열망과 조건을 개척하는 것이지 공교육 제도의 기회 균등을 요구하는 것에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요구해야 하고 또 실천해야 하는 교육 불평등 해소의 방안은 명백하다. 그것은 저소득층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클레멘트 운동이다. 서울시 교육청의 문예체 진흥 교육 방안은 이 점에서 매우 적절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나라의 교사들은 클레멘트 운동의 주체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대상에 더 가깝다. 우리는 먼저 이렇게 주저앉아 있는 교사들부터 일으켜 세워야 한다. 교사들의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교사들이 먼저 덕성, 지성, 감수성, 체력으로 충만한 집단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충분히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교육 평등을 향한 교사운동의 첫걸음은 우선 교사들이 모였을 때 연예가 중계나 자식 이야기나 하지 말고 지성인다운, 문화인다운 대화를 나누고, 교무실의 풍토가 지적이고 문화적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무궁한 지적, 도덕적, 문화적 보고가 되어주는 것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사교육 받느라고 바쁜 상류층 자녀들은 맘대로 하라고 두자. 그걸 부러워하거나 그것 때문에 경쟁에서 뒤쳐진다고 조바심 내지 말자. 따지고 보면 그렇게 되면 참교육을 저소득층이 더 많이 받게 되는 것 아닌가?
 
그 결과는 용이 되어 개천을 빠져나가려는 미꾸라지가 아니다. 개천의 가치를 인식하고 개천을 더 살기 좋게 만들려는 깨어있는 미꾸라지들이며, 용의 착취와 억압을 근절하기 위해 떨쳐 일어서는 미꾸라지다.

심상치 않은 금융흐름

세상을 보는 다른 눈 "뷰스앤뉴스" - 성난 부산민심 "정부, 너그말 어떻게 믿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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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18.

불교 사찰마저 주차장 공사라니

차에 중독된 한국인들. 아시아에서 가장 중증이다. 동네 음식점을 갈때도 차, 심지어 사찰도 주차장을 만들어서 고객을 유치한다. 홍콩의 초일류 레스토랑도 주차엔 관심없고 오직 음식과 서빙에 집중하지만 이 나라는 커피숍까지 발렛서비스.. 둘이서 3600원짜리 커피 두잔 마시고 3000원급 주차 서비스라....물가지옥? 차만 안끌고다니고 무료주차만 요구 안해도 서비스물가 30%는 내려갈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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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17.

한국적인 풍경

화장실마다 짜증날 정도로 붙어있는 금연마크. 그런데 화장실마다 담배연기 안맡기 힘든 현실. 심지어 인천공항 화장실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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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불평등의 관점을 전환하자

진보진영에서 말해서는 안 되는 교육 불평등
 
우리는 교육 불평등을 말하기 전에 교육을 말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교육이 A라면 우리가 말하는 교육 불평등은 A의 불평등이라야 한다. 그런데 현재 진보진영의 교육 불평등 관련 논란은 교육은 A라고 주장하면서 B의 불평등을 문제 삼고 있어서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흔히 진보진영은 현재 우리 교육이 왜곡된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입시교육이 아니라 참교육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진보진영은 그 왜곡된 교육의 결과에서 비롯된 불평등을 교육 불평등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 따져보자. 왜곡된 교육의 결과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상류층에게 더 많이 분배가 된다면 그것은 문제 삼을 수 있는 불평등이 아니다. 도리어 평등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입시교육을 교육으로 제대로 된 교육으로 인정하지 않는 집단은 입시에서의 불평등을 교육 불평등이라 부르지 말아야 한다. 높은 서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목표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참교육을 실천하겠다고 외친 집단이 있다면 저소득층 자녀가 서열 높은 대학에 가지 못했다고 해서(이게 비록 아무 문제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걸 들어 교육 불평등이라고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
 
진보진영에서 말해야 하는 교육 불평등
 
참교육을 가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면 교육 불평등 역시 이런 참교육의 혜택이 계급·계층간에 불공평하게 분배되고 있을 때 문제 삼아야 한다. 만약 입으로는 참교육을 말하면서 몸으로는 왜곡된 입시교육의 혜택을 요구한다면 이건 진보라는 말을 차마 입에도 담기 어려운 언어도단을 범하고 있는 꼴이 될 것이다. 만약 우리 주장대로 입시교육이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한다면 그런 잘못된 교육이라면 상류층 아이들이 그런 교육을 더 많이 받는 것이 무슨 교육 불평등이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주장하는 참교육에서 불평등이 나타날 때 이를 교육 불평등이라고 문제 삼아야 한다. 우리는 즉각적인 충동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조절하여 다른 사람의 승인을 받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도덕적인 능력을 교육이 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의 조건을 성찰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을 교육이 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즐길 수 있고 창의성을 발현할 수 있는 미적인 태도와 능력을 교육이 길러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바로 참교육이라고 주장해 왔다. 문제는 바로 이런 도덕적, 지적, 미적인 태도와 소양이 과연 계급간에 불평등하게 분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도덕적, 지적, 미적인 태도와 소양은 후천적인 것이기에 이는 교육의 문제가 되며, 이게 만약 하층계급에게 더 부족하게 나타나고 있다면 이게 바로 교육 불평등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미의 교육 불평등이 실재하는가? YES

1980년대에는 지배계급에 대한 반감에 젖은 나머지 객관적인 사실을 왜곡했다. 그래서 지배계급, 상류층은 악하고 민중은 선한 것처럼 착각했다. 사실이 그렇다면 불평등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사회에서 성공에는 미덕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성공하고 많은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 모두 도둑질을 했거나 부정하고 잔혹하거나 운이 좋아서 그랬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물론 일부 재벌 2세 등등이 있기는 하겠지만, 최상층의 거물들 말고 상위 20% 층의 상당수 (여러 전문직, 성공한 사업가 등)는 기본적으로 prudence(신중한 이해타산, 사려), temperance(절제), sympathy(공감)라는 능력이 없었으면 그 자리에 갈 수 없었다

빼어나게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성공은 당장의 욕망을 억제하여 여력을 축적하고, 그것을 훗날 보다 요긴한 곳에 신중하게 투입하며, 다른 사람들의 공감과 시인을 획득하여 사회적인 지위를 얻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이런 미덕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회에서는 하층계급이 성공에의 열망도 혹은 아예 체제를 바꿀 혁명적 결기도 없이 그저 시기와 분노로만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이 시기심과 분노에 호소하는 게 파퓔리즘: 교원평가가 이걸 이용해서 여론을 획득함. 전교조는 민중이 시기심과 분노의 상태에 있음을 망각하고 추상적이고 교과서적인 민중을 상정하다가 망함.민중에게 각성과 미덕을 요구하고 깨어나고 공부하라고 외치는 게 진보.)

실제 현실을 살펴보면 계급간의 불평등은 단지 재산과 소득의 불평등이 아니라 미덕의 불평등까지 퍼져있다. 가난은 선량과 소박 보다는 무지와 타락에 더 쉽게 연결된다. 만연하는 범죄를 들어 평등의 당위를 주장하면서 정작 가난한 집단의 도덕적 타락이라는 현상을 부정하는 것은 모순이다.(일찍이 레닌의 자생성과 의식성 테제, 혹은 혁명가가 되려면 민중을 불신하는 법을 배우라던 체게바라의 가르침, 그리고 사회변혁의 동력을 가장 가난한 계층이 아니라 당시에는 오히려 중산층에 가까웠던 문자해독력을 갖춘 숙련 노동자 집단에서 찾으려 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통찰력. 그리고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가장 높은 집단은 하층민... 지지자의 소득수준 가장 높은 정당은 진보신당)

문제는 원래 이런 미덕을 갖춘 부모의 자녀는 미덕을 악덕을 갖춘 부모의 자녀는 악덕을 갖추기 더 쉽다는 것이다. 즉 재산뿐 아니라 미덕이 대물림된다. 재산의 대물림은 부자3대 안간다는 속담처럼 미덕의 대물림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금새 평준화 된다. 그러나 미덕의 대물림은
 
실제 교사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공부 잘하는 애들은 이기적이고 인간성이 황이다? 부잣집 애들은 거만하고 무례하다? 이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설정이다. 현실은 그 반대임을 일선 교사들은 몸으로 알고 있다. 강남, 강동 교육청이 경합지역인 까닭이 설마 촌지 때문만일까? 일선 교사들은 알고 있다. 어떤 아이들이 인간성도 막장인지. , 이게 바로 진정한 교육 불평등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그나마 우리 나라의 교육 불평등은 미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좀 덜한 편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상류층은 미국이나 일본의 상류층보다 훨씬 무식하고 경망스럽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 혹은 영국처럼 상류층과 저소득층간의 넘사벽의 문화적 장벽이 비교적 약한 편이다. 어차피 상류층 아이들이나 저소득층 아이들이나 오페라 보면 골아떨어지긴 마찬가지라는 것이며,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을 읽어본 적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상류층이나 저소득층이나 시간과 돈의 여유가 생기면 하는 놀이가 술마시고 헤롱거리는 거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술이 양주냐 소주냐, 노래가 생음악이냐 노래방이냐

2011. 2. 15.

어느 젊은 진보주의자에게

이 글은 고민하고 있는 어느 후배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자유. 이것처럼 정의 내리기 어려운 말이 또 있을까요? 또, 이렇게 정의 내리기 어려운 말을 목표로 삼은 투쟁이 과연 성공은 고사하고 성립이나 될 수 있을까요?
맑스의 자유는 무엇일까요? 맑스의 자유는 필연성의 인식 다음 단계에 찾아옵니다. 맑스의 필연성은 헤겔의 그것처럼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수반해야만 이루어지는 잠재적 필연성이니까요. 따라서 필연성을 인식하고서 그 필연성을 구현하기 위한 실천을 감행하고자 결단하는 과정에 바로 자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이건 제 독단일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자유 때문에 폭도와 혁명가가 다른 것이죠. 폭도에게는 자유가 없죠. 그들은 자신들의 충동과 감정, 순간적인 분노의 노예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혁명가는 과학적 인식과 오랜 반성 끝에 내린 결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니 자유로운 것이죠. 즉 맑스주의자의 자유는 흔히 말하는 “자유.” 혹은 한대수나 포크가수들이 말하는 “자유”와는 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죠. 흔히 말하는 “자유”는 자칫 잘못하면 충동의 복권으로 이어져서 폭도 수준이 되겠죠.

OOO님은 바로 이 점을 간과하신 것 같군요. 맑스주의자의 자유는 아무 때나 사회주의를 선언하고 사회주의적으로 살아갈 자유가 아닙니다. 만약 고려시대 때 그런 주장을 하고 그런 삶을 실천했다면 그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시대착오자입니다. 좀 차갑고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맑스주의자는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굳이 비중을 두자면 차가운 머리가 우선입니다.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결단. 이 두가지중 어느 한 가지만 기울어도 운동은 실패합니다.
그런데 OOO님은 마치 맑스처럼 생각하고 맑스처럼 생활하고 각성하는 것이 운동의 절대 조건인 것처럼, 아니 성공의 열쇠인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말씀 속에는 모든 국민이 맑스주의자가 되면 혁명이 이루어진다는 엉뚱한 결론이 녹아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건 공상적 사회주의이거나 아니면 관념론입니다.
진정한 맑스주의자는 부르주아와의 단절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회주의는 부르주아의 토양 위에서 성장합니다. 근대성이라는 터전 없는 사회주의는 결국 공산당 독재, 이름만 바뀐 왕정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이건 구소련과 북한의 역사가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부르주아에 대한 증오는 결코 운동의 동력이 될 수 없습니다. 맑스주의자는 자본주의 사회가 인류의 진보에 나름의 역할을 했음을 인정합니다. 다만 이제는 그 역할을 다 하고 그만 물러갈 때가 되었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이제 인류에게 순기능 보다는 역기능을 더 많이 안겨주고 있어서 고통의 근원이 되고 있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물러가지 않으려 하니 몰아내자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 얘기 좀 할까요?

제가 대학 들어간 해는 1987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른바 6월 항쟁의 주역이죠. 이 투쟁은 정말 대단했었죠. 하지만 그때 그 주역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그때 싸웠던 사람이나 구경했던 사람이나 아니면 자기 잇속만 차렸던 사람이나 결국은 똑 같은 사람들이 되었죠. 6월의 주역 386세대가 벤처의 선구자가 되어 이윤을 챙기기 위해 이전구투하는 자본주의의 돌격대가 되었죠. 저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투쟁이 추상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988년과 1989년에는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가 유행했던 시절이죠. 가히 학생운동의 황금기라 할만 했습니다. 과거의 무용담을 자랑하는 것은 우매한 일이 되겠지만 그 시절 저는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하는 곳이면 어디나, 강제 철거가 이루어지는 곳이면 어디나 달려가서 구사대와 혹은 철거반과 박 터지게 싸웠습니다. 나중에 관악 경찰서에 끌려가 기소유예로 겨우 풀려날 때 전경 중대장이 담배 한 보루 사 들고 위문을 다 왔으니. 정말 싸우다 정 든건지.......

사실 그 시절에는 “이 싸움이 나하고 무슨 상관인가?” 하며 고뇌하는 것 자체가 사치였고 부르주아적 망상이었습니다. 싸움은 당위였고 유일한 도덕 판단의 기준이었습니다. 1학년때는 투쟁판에 나서면 보통사람 나서지 않으면 비인간 대접을 받았고, 2,3학년 때는 투쟁 판에 나서면 착한사람 안 나서면 보통사람이었고, 4학년 때는 투쟁 판에 나서면 존경할만한 사람, 안 나서면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객관식 문제 풀이나 열심히 하고 교과서 외의 책이라고는 한 줄도 안 읽어본 고등학교 갓 졸업한 19살짜리 아이들이 무얼 안다고 나라 전체의 운명을 세계 전체의 운명을 두 어깨에 걸고 결연히 싸웠겠습니까? 그저 선배들 따라 줄줄 나간 거죠. 그러다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머리가 굵어지니까 슬슬 빠져 나가는 거지요. 그러니 이 싸움이 추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즘 대학생들은 처지가 다르죠. 80년대처럼 투쟁이 당위이자 보편이 아니라 오히려 이상한 일, 특이한 일 취급을 당하는 시대니 거기에 가담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고뇌가 있어야 하겠죠. 선배들 눈치 보느라 어쩔 수 없이 데모판에 따라가는 일은 없겠죠. 하지만 80년대는 그랬습니다.

저는 그 짓을 대학 졸업할 때까지 했습니다. 저는 한순간도 투쟁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끝내 이 투쟁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아니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회주의는 인류의 희망이고 자본주의는 인류의 저주이며 멸망의 보증수표이니 무슨 고민이고 자시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가장 결정적인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저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입으로는 아무리 계급의식을 나발 거려도 진짜 프롤레타리아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그렇습니다. 저는 빛나는 국립서울대학의 졸업장을 포기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아니 그건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부모 돈 받아서 대학 등록금은 꼬박꼬박 챙겨 내면서 돈 없어 대학 못간 노동자들 앞에서 노동해방의 동지들 어쩌고저쩌고 함께 노동해방의 그날까지 투쟁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정말 잘도 놀았던 것입니다. 저한테 물든 스물두 살 먹은 한 청년 노동자는 결국 제가 말한 대로 노동해방의 투쟁의 일선에서 힘써 싸우다가 회사 짤리고 어디에도 취직하지 못하고 결국 폐인 되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너 너무 그러지 마라. 어떻게 먹고 살려고 그러니?”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녀석이 싸우면 싸울수록 “그래. 잘한다. 너야말로 진정한 노동계급의 전위투사다!”라며 격려 했습니다. 허허.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한 게죠. 만약 내가 빚 투성이 부모 밑에서 이놈의 공장 월급으로 겨우겨우 먹고 사는 처지였다면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면서, 또 상류층 자제로서, 엘리트 대학 출신으로서 기득권은 포기하지도 않으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운운했던 것이 이미 추상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했다면 저는 마땅히 대학을 중퇴하고 강남지역의 중대형 아파트인 우리 집을 가출하고 부르주아인 아버지가 주는 돈은 10원도 받지 말고 공장에 가서 노동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 말에 책임을 지는 행동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지 못했습니다. 잃어버릴 기득권이 너무 컸던 것입니다. 

자. 이것이 제가 과거의 투쟁을 추상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는 자신의 행동을 투쟁이라고 부르기 위한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저의 투쟁은 과거 저의 투쟁에 비하면 확실히 안전하고 온건하고 부드럽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투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진정한 본질에서 우러나온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이제야 나는 구체적인 교사로서의 나 자신과 총체적인 사회 속에서의 나를 함께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대학생으로서, 즉 기득권 엘리트로서의 나 자신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어거지로 노동자의 의식만 머리에 담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운동과 투쟁은 이제 시작되었습니다. 과거의 추상을 넘어 구체적인 투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 후배님들은 저의 이 고뇌를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화도 고인돌 기행

작년 여름의 기행입니다.


강화도는 흔히 여행가들에게 수도권의 보물섬이라고 불립니다. 역사 유물만 하더라도 4000년 전 거석문화에서부터 고려를 거쳐 근현대사 유적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바다로 둘러싸인 자연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산, 마니산, 혈구산 등 훌륭한 산들도 있습니다. 오직 하나 흠이 있다면 서울에서 강화도까지 가는 길이 김포일대의 난개발로 인해 아주 지저분하다는 것....어쨌든 이번 답사 여행의 주제는 고인돌입니다. 일단 강화도 고인돌이라고 하면 강화 지석묘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고인돌 중 가장 원형이 잘 유지된 거대한 고인돌입니다. 게다가 간지나는 북방식 고인돌입니다.

여기서 출발해서 잠시 석조여래불입상 한 번 들러주신 뒤 부근리로 향합니다.


지석묘에서 석불까지는 약 2Km, 다시 석불에서 부근리 고인돌까지도 약 2Km 걷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발굴 중이라 자세히 둘러보지는 못했습니다.

부근리 고인돌에서 다시 한 20여분을 계속 걸어가면 마치 두꺼비같이 생긴 신삼리 고인돌이 나옵니다.

신삼리 고인돌을 뒤로 하고 왔던길을 되짚어 오다가 삼거리 고인돌 안내판을 따라 약 1.7 Km쯤 들어갑니다. 가다가 길이 산길로 바뀌기 때문에 의외로 힘이 듭니다. 저 멀리 능선 마루에 고인돌이 있습니다.
이 산꼭대기에 왜 이런 힘들고 무거운 고인돌을 세웠는지 참 이상한 일입니다. 아무래도 고인돌의 무덤 설보다는 제단 설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산길을 다시 한 40분을 올라가면 고려산 정상 못 미쳐서 고천리 고인돌군이 나옵니다. 고천리 고인돌 군을 둘러보고 적석사에서 내려가는 길에 저 아래 내가 저수지가 아득하게 내려다 보입니다.

내가 저수지 다 내려간 곳에 오늘의 하이라이트, 오상리 고인돌군이 길손을 맞이합니다. 세계 문화유산 코스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원형도 잘 유지되어 있고 아기자기한 고인돌들이 멀리 산과 어우러져서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스톤헨지 하나도 안 부럽다는,....


이렇게 해서 고인돌 기행이 마무리 됩니다. 8시30분에 시작해서 14시30분까지 꼬박 6시간, 그 중 관람하고 쉬고 먹는 시간을 빼면 순수하게 걸은 시간은 4시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대략 19Km정도 걷지 않았나 싶습니다. 중간에 산길이 끼여 있어서 몸은 상당히 피곤합니다. 그래도 너무 뿌듯하고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사회선생의 직업병이랄까? 난 이런식의 여행이 좋은데, 나 따라 한 번 따라다녀 본 분들은 거의 손을 내 흔들며 다시는 같이 안가겠다고 합니다. 쩝

내가면까지 내려가서 외포가는 버스 타고 해수사우나에서 피곤한 몸을 달래 줍니다. 그리고 강화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정말 매력없고 체증 심한 길을 견뎌냅니다. 다음에는 강화도의 고려유적 답사를 계획합니다.

2011. 2. 14.

안티 기독이 안 될 수가 없네

정말 이 땅의 기독교는 그 정체가 무엇인지....
제발 일부 광신도의 문제라고 어물쩡 넘어가지 말자. 이런 무리들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실제로 김경동이니 뭐니 하는 스타 목사들 역시 행동을 하지 않을 뿐 이와 비슷한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런 모습은 기독교의 어떤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다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기독교인의 이런 행패를 억제할 시민윤리나 질서가 있는거고 우리나라는 그게 취약한 상태에서 대통령마저 은근히 저런 행패에 동조할 거라 기대하니 기고만장해서 드러날 뿐이다.

2011. 2. 9.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6) 고달픔의 우상


고달픔의 우상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그 기원을 상고하기 어려운 속담이 있습니다. 교사의 일이 스트레스 덩어리임을, 그래서 모든 에너지가 다 소진되기 때문에 교사의 똥에는 남아있는 영양가가 하나도 없음을 비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거 정말 무서운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건 매우 잘못된 비유이기도 합니다. 이 비유 속에는 똥에 영양가가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고달프게 일하는 것이 마치 교사의 전형적인 모습인양 몰아 붙이는 은근한 강제가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문제 때문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이마에는 내천자가 새겨지고 몸은 파김치처럼 늘어진 채 간신히 집에 들어오고, 집에 들어와서도 밀린 숙제 검사하고, 자다가도 말썽부리는 녀석 야단치는 꿈 때문에 벌떡 일어나는 선생님, 그런 선생님이야 말로 참교사다라는 해괴한 믿음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이 우상도 의외로 널리 퍼져 있어서 신규 교사들 중에는 그야말로 아이들 속에 푹 빠져 들어서 휴식도 없이 매진하는 그런 정열을 보여주는 분들이 드물지 않게 있습니다.

고달프게 일하는 것이 당연한 교사의 상, 이것은 잘못된 믿음이며 우상입니다. 이 우상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모른척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사가 인간이라는 사실, 감정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굳이 루돌프 슈타이너 같은 인지학자들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인간의 신체, 정신, 그리고 감정이 상호연관되어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즉 고달픈 교사가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하기 어려우며, 냉철한 이성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헌신적으로 최선을 다해 교육에 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달프다고 느껴질 정도, 이마에 내천자가 새겨질 정도, 그야말로 똥도 메마를 정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흔히 나이 먹고 게을러진 교사들이 젊고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교사들에게 자주 하는 말 중에 “너도 나이 먹어봐라. 나도 젊었은 적에...”운운하는 말이 있습니다. 게으른 선배교사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그들의 말 속에 일련의 진리가 숨어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들도 젊었을 때는 매우 헌신적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쉽게 달아오른 불이 쉽게 꺼지며, 피로를 느끼고 있는 교사는 아이들에게 재앙이 됩니다.

특히 이 책을 읽고 있는 젊은이들의 상당수가 여성임을 감안한다면 이 충고는 더욱 중요해집니다. 왜냐하면 여성들에게는 그 정열을 전가할 우회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아이입니다. 저는 경력 초기에는 학교의 아이들에게 엄청난 정성을 쏟아 붓다가 출산 후에는 그 정성을 모조리 자기 아이에게 퍼부으면서 학교의 아이들에게 소홀해지는 그런 변절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변절이 아닙니다. 그건 당연한 귀결입니다.

흔히 직장여성들을 슈퍼우먼이라고들 하지만 세상에 슈퍼우먼은 없습니다. 특히 교육은 한 사람의 일생을 기울여야 하는 막중한 과업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자녀에게 다른 엄마들에 비해 소홀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만약 그것을 거부한다면 학교의 아이들에게 소홀해질 것입니다. 둘 다 지키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심신이 고달파질 것입니다. 그리고 고달픈 교사는 아이들에 어떤 상처를 줄지 모르는 시한폭탄같은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쩌란 말인가요? 해답은 남편에게 있습니다. 흔히 남자가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면 그가 가정에 조금은 소홀해도 용서가 됩니다. 그렇다면 여자는 왜 안됩니까? 생각해 봅시다. 어느 기업체에서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일하고 있는 대기업 사원인 남편과 국가의 인재를 기르는 교사인 아내, 어느 쪽이 더 가치로운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왜 가치로운 일을 하고 있는 아내가 남편의 한같 사업을 뒷바라지 하기 위해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다시피 해야 합니까? 여교사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전문성, 곤란성, 공공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남편에게 보다 많은 가사분담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은 남들 눈에는 고달플 정도의 일이라도 본인에게는 고달프지 않게 일을 바꾸어 놓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의 확장 뿐 아니라 일의 효율적인 배분과 조절을 통해 가능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의 목록을 나열해 보고 가치 우선순위에 따라 노력의 투자 정도를 배분합시다. 이때 가정, 육아가 교육보다 상위에 서게 되는 분은 학교를 떠나거나 아이가 상당히 자랄 때 까지 학교를 쉬셔야 할 분입니다.

교사는 부임하고 나서 3~4년의 적응기, 1년 가량의 회의·환멸기, 그리고 5~6년간의 원숙기(시기와 기간은 학설에 따라 다르지만)라는 발달의 단계를 거쳐간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학설들은 한 사람의 교사가 완성되어 최고의 전문성을 발휘하기 까지는 대략 20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실정은 어떻습니까? 4, 5년차때 닥쳐오는 회의·환멸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교직을 떠나거나 자녀양육과 병행할 수 있는 널널한 일자리 정도로 전락시키거나, 아니면 산 송장처럼 되어 시간표나 마지못하게 채우며 시간을 보내거나 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많은 젊은 교사들이 3~4년간 불필요한 과도한 정열을 쏟아붓다가 그만 고달픔의 포로가 되어버리는 것은 너무도 슬픈 일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정열이 과할수록 고달픔도 거치며, 고달픔이 거질수록 정신이 흐려지며, 흐려진 정신은 자칫 교사-학생 관계를 왜곡하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이는 결국 교육에 대한 심각한 환멸로 나타나 학교를 떠나게 만들거나, 이후 수십년간 월급도둑놈으로 출퇴근이나 반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자. 지금까지 교사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들을 몇가지만 짚어 보았습니다. 물론 교사에 대한 오해는 앞에서 소개한 것들이 다가 아니지만, 나머지 것들은 다른 주제를 다루면서 같이 언급하기로 합시다. 다만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먼저 꺼낸것은 여러분의 마음가짐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정도 읽고 나면 여러분은 과연 교사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말 것인지 망설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읽고도 더 읽을 용기가 남아있는 분들은 학교에 오셔야 할 분들입니다. 그 분들만 다음 페이지로 넘겨 주시기 바랍니다.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5) 째째함의 우상

쫀쫀함, 째째함의 우상

불과 10년전만 해도 교사가 되겠다고 희망하는 남학생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시절의 공기를 여전히 마시고 있는 부모들은 딸에게는 교사가 되라고 강요하다시피 하면서 아들이 교사가 되겠다고 하면 손사래를 칩니다. 심지어 자기 딸이 교육대학에 다닌다고 자랑하는 어느 어머니는 그런 한편 혹시 딸이 남교사와 결혼하게 될까봐 그게 제일 걱정이라고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합니다. 소위 “남자가 째째하게 선생이나 한다.”라는 통념 때문입니다. 수도권보다 지방에서, 또 영남권보다 호남권에서 이런 통념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럼 도대체 이런 해괴한 이데올로기는 어디서 왜 생긴 것일까요?
사실 교사가 큰 뜻을 품고 할 만한 일은 아닙니다. 교사는 뭔가 확인 가능한 큰 실적을 올리고, 경우에 따라 짜릿한 모험까지 감수해야 하는 그런 직업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게 좋은 사람은 문자 그대로 ‘벤처’기업을 창업하거나 종소기업의 기획팀 등에서 일하면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교사는 흔히 야망과는 거리가 멀고, 안정되긴 하지만 지루하고 활동의 폭도 집-학교로 한정되고, 만나는 사람도 교사나 학생들로 제한되어 세상물정에 어둡게되는 그런 직업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이런 통념은 부분적으로 사실인 면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통념이 유포된데는 사회적 편견 뿐 아니라 교사들 자신의 책임도 상당히 있습니다. 즉, 교사의 일 자체가 째째한 것이 아니라, 그 동안 교사들이 째째하게 일해왔기 때문에 이런 통념이 유포된 것입니다.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켰을때 미국의 극동담당자는 “한국인들은 쥐와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한국인에 대한 세계의 통념이었습니다. 한국인은 지도자를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쥐떼같은 겁장이들로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어떤 미국인도 한국인을 이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건 이후 518과 610을 통해 한국인의 역동성과 용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통념은 행동을 통해 뜯어고칠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교사는 째째하다 따위의 생각을 버리십시오. 교사는 학교-집을 오가면서 아이들이나 상대하는 작은 세계에서 지루하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면서 쪼잔한 일이나 한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다수 교사들이 여전히 째째하게 산다면 교사에게 주어지는 교사의 높은 대우는 곧 삭감되어 ‘째째한 수준’이 되고 말것입니다.
교육사를 한번만 훑어 보아도 교사는 표면적으로는 째째해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웅혼한 일을 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잇습니다. 이런 점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 동안 역사를 보는 관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역사는 항상 정치와 전쟁을 중심으로 알려졌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정복자를 웅혼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은 웅혼해 보이지만 실제 그가 한 일은 창조가 아닙니다. 오히려 파괴에 가깝습니다. 실제 역사를 이끈 사람들은 이런 파괴자가 아니라 그들이 이런 정복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창조자들이지만 이들은 역사의 전면에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창조자들의 관념이 널리 보급되고 대를 이어 전달되어 보편화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빠르게 진화할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생물학적 진화에만 의존하는 동물이 수십세대에 걸쳐야 하는 적응과정을 인간은 문화를 통해 단 한두세대만에 해치울수 있습니다. 집단 중 한 두사람의 창조적 존재가 있어도 이들의 업적은 문화로 보편화되고 세대를 거쳐 전수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인간이 “교육”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일 뿐 아니라 교육하는 동물인 것입니다. 인류가 이렇게 지구상에서 번성할 수 있는 것은 용기, 힘, 투쟁 따위가 아니라 문화와 교육의 힘인 것입니다.
용맹과 무력만을 숭상하고 문화와 교육을 등한시한 민족이 얼마나 허무하게 스러져 갔는지 우리는 힉소스, 히타이트, 아시리아, 흉노, 몽골의 성쇠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반면 무력에 의해서는 정복당했지만 사실상 정복자를 정복한 그리스와 중국을 통해서도 문화와 교육의 위대함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교육은 위대한 행위입니다. 그리고 교육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위대한 일을 담당하는 사람, 즉 교육자, 교사들이야 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인류 역사의 중추를 담당하는 웅혼한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 많은 교사들은 째째하거나 쪼잔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마냥 비난할 일은 아닙니다. 이는 그만큼 교사가 하는 일이 중요하고 섬세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너무도 중요한 인류의 위업이며, 그 영향은 사물이 아니라 사람에게 가해집니다. 그러니 교육은 함부로 자신의 용기를 뽐내고 통큼을 자랑하며 객기를 부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교육은 오히려 항상 신중한 판단과 정교한 선택에 직면해야 하는 일입니다. 물론 저는 우리 나라 교사들이 지나치게 째째하다는 점에서는 동의 합니다. 그들에게 용기, 대담성, 창의성이 지나치게 부족함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것을 다 갖추기가 어렵다면 째째할지언정 신중하고 사려깊은 교사가 무모하고 대담하지만 째째하지는 않은 교사보다는 더 바람직한 교사가 될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교육자 뿐 아니라 심지어 장군들에게까지 적용됩니다. 용맹함과 신중함을 겸비하기가 어렵다면 그 중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용맹한 장수 보다는 신중한 장수가 군대를 지휘하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예를 보십시오. 그 분은 결코 용맹한 장수가 아니었습니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서기 전에는 출격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소위 “째째”해 보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조정은 수군이 궤멸된 다음에야 그의 째째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째째함을, 신중하고 사려깊음, 그리고 섬세하고 꼼꼼함으로 받아들여야지 결코 비겁하고 우유부단함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미칠 영향과 위험을 우려하여 째째해 보일정도로 조심스러운 선택을 하는 것이지, 다른 이유 -동료들의 비난, 행정적인 규제, 교장의 압력, 관행이나 관례-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교육적 결과라는 잣대에 의거해서 째째하게 좌고우면해야 하며, 또 이 잣대에 의거해서 때로는 용감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젊은 여러분에게는 유감스러운 말씀입니다만 대개는 대담한 선택보다는 째째한 선택이 올바른 경우가 많습니다. 남이 뭐라고 손가락질 하더라도 교사는 결코 객기를 부려서는 안 됩니다. 교직생활의 대부분은 이 째째한 선택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확신이 섰다면, 그리고 그것이 교육적으로 마땅한 것이라고 결정되었다면 여러분은 대담해 지는데 조금의 두려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규범은 오직 하나 교육입니다. 교육이 여러분을 주저하게 만들고, 교육이 여러분을 대담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육적으로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쾌한 답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교육에 대해서는 상충하는 여러 주장들이 대립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옳기도 하고 모두 그르기도 합니다. 이 중 한 관점에 입각해서 대담하게 행동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다른 관점에 의해 신중해야 한다는 반대 주장도 가능한 것이 교육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용감해지기 전에 먼저 째째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의 현 상태가 어떤지 째째하게 살펴보아야 하며, 여러분이 처한 교육적 환경, 여러분의 선택이 가져올 결과, 또 다른 대안의 가능성도 째째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입장을 가진 교사들과도 째째하게 토의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여러분의 입장이 처음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도출된 최종 입장이 있다면, 이 때가 여러분이 째째함을 그만두고 용기있게 밀고 나가야 할 순간입니다.

사업가는 과감한 선택을 하지 않으면 엄청난 이익을 놓칠수 있습니다. 물론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면 막대한 손실을 입을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업가는 기대되는 이익과 예상되는 리스크를 비교합니다. 그래서 한 푼이라도 이익 쪽이 크면 용감하게 달려 나갑니다. 하지만 교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익이 손실보다 큰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이익은 크지 않더라도 손실이 없는 쪽이 교사가 선택해야 할 방향입니다. 그래서 교육에는 공리주의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교사는 학생들의 총효용 입장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불리한 학생 입장에서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업가에게 안 팔리는 상품은 버려야 할 대상이지만, 교사에게 가장 불리한 학생은 오히려 가장 공들여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사는 불리한 학생이 가장 적게 나오는 안이 나올때까지 계획을 수정하고 수정해야 합니다. 이건 사람을, 더군다나 미래를 짊어질 사람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사는 째째합니다. 하지만 그 째째함은 위대하고 영웅적인 째째함이며 인류의 미래를 밝히는 째재함입니다. 여러분은 째째해질 수 있는 용기와 그 째째함을 유지할 수 있는 끈기와 절제를 가져야 합니다.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4) 박봉의 우상

박봉의 우상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20세기에는 특히 1970~80년대에는 ‘박봉’이라는 말이 많은 교사들의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면벌부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꽤 오랜 시간동안 국민들의 동정과 온정적인 대우를 끌어낸 주된 자원이기도 하였습니다. ‘박봉에 시달리는’ 이 한 마디면 웬만한 잘못은 눈감아도 되는게 되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교사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1997년까지는 “박봉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아이들을 가르치는....”이라는 담론이 성립 가능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까지도 정말 교사가 박봉이었는지 의심하는 입장입니다만. 하지만 2009년 현재 교사의 보수 수준은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결코 박봉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교사는 지금 보험사에서, 은행에서, 해외여행사에서, 자동차 판매사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잠재고객층입니다. 치과에 가서 진료를 해도 교사라는 것이 밝혀지면 갑자기 아말감 보철은 선택지에서 사라지고 특수 세라믹과 금 중에서 선택하도록 유도됩니다. 시장은 정직하고 냉정합니다. 교사가 정말 박봉이라면 이런 대접을 받지 않겠죠. 하긴 현실적인 요즘 젊은이들은 이미 이 정도는 다 알고 교직을 선택했겠죠.
그럼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볼까요? 1996년 당시 우리나라 1인당 GDP는 약 12,000 달러였습니다. 당시 환율은 1000원 정도 되었으니 1200만원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 경력 5년차였던 제가 받은 연봉은 1600만원 정도 되었으니 3:4 정도의 비율이 나옵니다. 즉 경력 5년차 교사가 1인당 평균 소득의 1.3배를 벌었다는 뜻입니다. 그럼 10년 뒤인 2006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인당 GDP는 대략 16,000 달러, 환율도 1000원 정도였으니 1600만원이 됩니다. 그리고 당시 경력 5년차 교사의 연봉은 2400만원이 넘었습니다. 따라서 2:3, 즉 평균 소득의 1.5배를 받았습니다. 이건 기준 근속연수인 경력 15년차 교사의 연봉이 아니라 젊은 교사들의 연봉이라는 걸 유념합시다. 경력이 15년이 넘으면 1인당 국민소득의 3배에 육박합니다. 교사들이 이 정도로 고소득을 올리는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다는 사실을 알아둡시다. 아, 독일이나 핀란드 교사들이 상당히 고소득층에 속하긴 하지만, 그 나라는 교사의 가방끈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길다는 것도 유념해 두고요. 하긴 88만원 세대가 운위되는 2009년인데, 1995년에도 100만원 이상을 20대 초임자가 수령했던 직장을 박봉이라고 부르는 것도 아스트랄한 이야기긴 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교사가 박봉이라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직도 남아있는 박봉의 논리가 문제입니다. 이는 교사 사회 내부에서 또 외부에서 작동하는 기괴한 메카니즘입니다. 교사들의 내면에는 뿌리 깊은 박봉 심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처음 교사가 되면 가장 놀랄 일 중 하나가 바로 선배 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그 기묘한 피해의식, 그리고 끝도 없는 불만일 것입니다. 자신을 선택받고 승리한 5%라고 생각할 젊은 교사들에게는 정말 남사스럽고 혐오스러운 모습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월급날만 되면 사방에서 터지는 월급 타박은 듣기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물론 한국인의 3/4이 자신이 하는 일에 비해 봉급이 너무 적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다지만, 교사들의 월급 불만은 정말 그냥 들어넘기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월급 타박을 많이 하는 교사일수록 정작 다른 직장의 임금이나 근로조건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로 고령층 교사들인데 교사가 박봉이던 시절에 교직에 입직해서 “교사=박봉”이라는 인식이 아주 내면화되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이들은 자신의 연봉은 항상 실수령액(세금과 연금기여금 공제된 액수)을 기준으로 보고, 다른 직종의 연봉은 세전소득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거야 그저 나이 먹은 교사들의 잘못 형성된 습관이려니 하면 됩니다. 하지만 더 위험한 것은 사회적으로 형성된 “박봉의 교사” 우상입니다. 이것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동정적 측면으로 박봉에 시달리는 교사들을 가여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단언컨대 여기에 대해 고마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동정심이란 그것을 받는 자가 아니라 하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즉, 동정심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정서적 보상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크건 작건간에 교사를 존경하고 어려워했던 어린 시절을 공유합니다. 그런데 그 크기만 했던 선생님을 “박봉”이라고 측은하게 여길 수 있을때 비로소 자신의 위치가, 자신의 성공이 실감나는 것이며 살 맛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1970, 1980년대 중산층들에게 “박봉의 노동자”, “박봉의 공무원”이라는 담론은 별로 유포되지 않았고, “박봉의 교사”라는 말만 애처로운 어조를 띤채 널리 공유되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 아래에 노동자, 공무원이 있는 것과 교사가 있는 것을. 후자가 훨씬 더 어깨가 으쓱거리지 않습니까? 교사는 중산층인가 중하층인가를 가르는 아주 중요한 척도였던 것입니다. 이건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서도 교사는 중산층의 여성이 계급을 유지하고, 노동계급의 남성이 장차 계급을 상승 시킬 수 있는 직업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박봉의 교사 우상은 중산층의 허위의식과 교사들의 피해의식이 결합되어 만든 괴담에 불과합니다.
그러다가 1997년 이후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교사는 더 이상 중산층과 중하층의 기준이 아닙니다. 교사는 이제 중산층과 상류층의 경계에 서 있습니다. 이건 우리 나라의 수 많은 “나도야 중산층”들에게 큰 타격이 되었습니다. 이 나도야 중산층들은 아무리 자기들 처지가 딱해도 “그래도 선생들 보다야 났지” 이 마음 하나로 버텨왔습니다. 교사의 박봉은 중산층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마지노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교사는 저 위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교사를 “중하층”으로 간주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어제의 중산층들에게 이렇게 교사의 위치가 올라가 버린 상황은 자신들의 몰락에 대한 확인 사살과도 같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에게 교사에 대한 질투와 증오심이 빠르게 쌓여갑니다. 이때부터 박봉의 교사 우상은 동정이 아니라 하나의 규범적 성격을 띠게 됩니다. 즉, 교사는 마땅히 박봉이라야 하며, 박봉이 아니라면 훨씬 더 유능해져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교사에게 박봉이 되라고 요구하기는 어려우니, 교사가 보수에 비해 너무 무능하고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퍼부어대는 것입니다.
물론 교사들이 받는 것에 비해 너무 산출이 초라하다는 지적은 타당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사가 무능하고 부도덕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사실 교사들이 가장 무능하고 부도덕했던 시절은 지금이 아니라 1990년대 이전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창 촌지가 극성을 부리는 시절에는 “박봉의 교사”라며 측은히 보다가 상위 5%들의 직장이 된 지금 새삼스레 무능하다, 부도덕하다고 삿대질을 하는 것일까요? 결국 문제는 무능과 부도덕이 아니라 박봉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상당수 교사들까지 동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박봉이라는 이유로 나도 중산층들에게 심리적 우월감을 제공한 대가로 우호적 여론 속에서 마음껏 나태해도 되었던 과거를 그리워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봉급이 얼마가 되었든 간에 무조건 박봉이라고 우기며, 또 박봉이라고 믿고싶어합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교육운동을 한다는 많은 전교조 교사들도 이 박봉의 우상에 관한한 낡은 교사들과 한편이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많은 어제의 중산층들은 교사가 박봉이 되기를, 그게 안된다면 고용조건, 근로조건이라도 나빠져서 그들과 비슷하거나 더 열악해지기를, 그럼으로써 자신을 드높이고 위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잠깐 생각해 봅시다. 의사, 회계사, 변호사, 또 교사의 유사업종인 교수들의 봉급이나 대우에 대해 중산층들이 저런 격렬한 반응과 적대감을 보인 적 있나요? 왜 여타 전문직들에 비하면 사실은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있는 교사들에게만 유독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요? 그것은 불행히도 그들이 의사, 변호사의 일과 달리 교사의 일은 특별하지 않은 것으로, 즉 기회만 준다면 자신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치과의사를 들어봅시다. 우리 동네에 아주 번창하는 치과의원이 있습니다. 시쳇말로 송파구 돈을 다 쓸어담는다고 해도 될 정도로 잘 나가는 치과의원입니다. 그 의사는 나이도 30대 후반이지만 아마 엄청난 재산을 모았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재산을 부러워 할 것입니다. 하지만 “네가 저 일 할래?”하고 석션이나 드릴을 건네준다면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물러 설 것입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받는다 해도 남의 입 속에 고개를 들이대고서 바늘구멍같은 치근관을 쑤시는 일을 하루 종일 하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고, 또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여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반면 많은 사람들은 교사의 일을 “그까짓 애들 가르치는 일 따위”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사를 시기합니다.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 따위를 하면서 왜 그렇게 많은 보상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교사는 통계청 직업 분류에는 전문직으로 되어있지만 사회 통념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사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사들 스스로가 기껏 중하위직 공무원이나 사무직 정도로 자신을 여기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교사보다 월급도 더 많이 받고 방학도 더 길며 수업시수는 절반밖에 안되는 교수들이 맞을 매와 욕을 교사가 홀로 맞고 듣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 책임의 상당부분은 한국 중산층의 허위의식 뿐 아니라 교사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박봉의 박자도 꺼내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매우 좋은 대우를 받고 있음을 기꺼이 인정하십시오. 그 대신 교사가 그 정도 대우를 받을만하며 사실은 그 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당당하게 주장하십시오. 그 대신 그 말이 부끄럽지 않도록 전문직다운 모습과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교직단체에서는 그런 전문직다운 모습과 일을 잘 조직하여 사회적으로 퍼뜨리고 기여하면 됩니다. 만약 교사가 보육자에다가 잔소리꾼, 그리고 교과서 앵무새로 머무른다면 당연히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헌신적인 보호자, 창의적이면서 성실한 연구자, 그리고 존경받고 사랑받는 교육자가 된다면 이 정도는 대우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이런 교사가 되고, 또 다른 교사들이 그런 여러분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껴(아직 이들에게 그런 염치가 남아있을지는 회의적이지만) 이렇게 되려고 노력한다면 저 지긋지긋한 박봉의 우상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3) 아이들의 우상

‘아이들’의 우상
내가 여기서 ‘아이들’이라고 특별한 인용 부호를 단 것은 이것을 일반명사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이들은 “저 공터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의미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우리 아이들을 살립시다.” 등의 용례에서, “아이들의 사랑과 믿음이 나의 교직생활 30년의 후원자였다.”라는 어느 선생님의 퇴임사에서 사용되는 아이들입니다.
이 말은 얼른 들으면 무척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박봉과 고달픈 업무에도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아이들’의 헤맑은 눈과 웃음만을 유일한 보상으로 삼아 알뜰 살뜰하게 보살피는 선생님의 상이 저절로 그려집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서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10년 전만 해도 이런 이유 때문에 교사가 되고자 했던 젊은이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불행히도 이것은 우상이며 잘못된 믿음입니다.
파울루 프레이리는 일찌기 이러한 관점을 ‘보육자적 관점’ 혹은 ‘보모적 교사관’이라고 부르면서 경계했습니다. 프레이리 같은 위대한 교육 사상가이자 교육 실천가가 왜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자’는 이 아름다운 생각을 오히려 경계했을까요? 혹은 이와 비슷한 사례로 유명한 혁명가 체 게바라가 혁명가가 되려는 청년들에게 제일 먼저 한 말은 “민중을 믿지 마라.”였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역시 “민중에 대한 사랑”, “민중에 대한 믿음과 헌신”을 위해 몸을 던진 청년들을 몹시 아연실색하게 했습니다. 여기서 던져주는 공통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지식인의 책무, 지식인의 위상과 관련됩니다. 교사는 ‘지식인’입니다. ‘사랑으로’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사실 교사가 아니라 ‘착한 어른’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교사가 꼭 더 잘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게다가 이 일은 부모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부모의 품에서 아이들을 떼어내어 학교라는 공간까지 끌고 와서 교사 앞에 앉혔을까요? 그것은 교사에게서 부모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어떤 특수한 책무와 능력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사가 고작 한다는 것이 사랑으로 아이들을 보살피고 예뻐해주는 일이라면 낭비도 이만저만한 낭비가 아닌 것입니다. 
체 게바라가 ‘혁명가’들이 이런 편향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민중과 사이좋게 지내는 민중의 벗이야 민중들 끼리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중들이 보지 못하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어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역할, 현실에 안주하는 민중들에게 때로는 불쾌하게 만드는 일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실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 그런 역할을 혁명가에게서 기대했던 것입니다.

교사는 근대 공교육 제도와 함께 형성된 직업적 교육자입니다. 즉 전문 교육자입니다. 이러한 전문 교육자를 양성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시대가 갈 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교사는 의사와 함께 공식적으로 학력을 제한하고 있는 유일한 직업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한다면 교사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전문적인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갖추기 위해 -비록 본래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대학의 교직과정이 존재하고, 교원 양성기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이 훌륭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분에게도, 또 일반 대학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여 학식이 높은 분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오직 교원양성기관 졸업자에게만, 그것도 치열한 경쟁시험을 거친 사람들에게만 교직의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아이들이 원하는 것과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 사이의 균형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많은 교사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침몰하고 마는데, 이는 이 중 어느 한 측면만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마냥 자기가 원하는대로 자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장차 ‘삶’이라는 이름으로 분투해야 할 ‘세계’, 즉 사회에서 쓸모있는 인간으로 자라야 합니다. 물론 이 세계니 사회니 하는 것의 범위를 무엇으로 보는가에 따라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크게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이 ‘필요한 것’이 ‘원하는 것’과 다르거나 충돌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교사들은 매우 자주 ‘필요한 것’을 아이들에게 강요합니다. 온갖 지루하고 힘든 일들을 강제로 요구하며 이 모든 것들이 다 ‘너 잘 되라고’ 시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건 그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아무리 미래의 삶을 이야기 하고 그것을 위해 싫더라도 ‘필요한 것’을 하라고 강요해도 아이들이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느끼지 않는 한, 아이들은 시늉만 할 뿐, 절대 그것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설사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필요하다고 느껴서 한 것이 아니라 강압에 굴복해서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교사가 아무리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말해봐야 아이들에게는 단지 강압일 뿐이며, 이렇게 되면 교사는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만 압제자에 불과하게 됩니다. 결국 아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을 강제한 교사는 아이들과 적대관계가 되며, 이들 사이에서는 갈등이 귾임없이 일어납니다. 이 때 많은 젊은 교사들은 그만 진심을 몰라주는 아이들에게 실망하면서 환멸을 느끼거나 냉담자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실망감을 토로하면서 자신을 갉아 먹습니다.
이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어처구니 없는 결과입니다. 이 과정은 무엇입니까?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의 내용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사랑의 이름으로 엄격한 강압을 일방적으로 부과하고, 갈등이 일어나자 일방적으로 사랑을 철회한 것입니다. 이것을 만약 남녀관계에 비유해 봅시다. 이것은 사랑이겠습니까 아니면 스토킹이겠습니까?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요리사의 예를 들어 봅시다. 사실 맛있고 훌륭한 요리의 기준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특급 셰프가 있는 것이겠죠. 하지만 어떤 요리를 제공할 것인가 하는 것은 셰프가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컨대 크림소스 스파게티는 이탈리아 요리의 수치라고 생각하는 셰프라 할지라도 손님이 그것을 주문했다면 일단 그 범위 안에서 솜씨를 뽐내어야 합니다. 셰프가 손님의 메뉴를 교정해 줄 권리는 없습니다. 심지어 “맛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요리해 주지 않겠다”며 봉사를 철회할 권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편향, 즉 학생의 요구를 절대화 하는 것 역시 위험합니다. 이것은 진보적 성향의 교사들, 혹은 ‘에밀’을 잘못 읽은 교사들이 자주 저지르는 오류입니다. 사실 선량한 교사들이 처음 교실에 들어서면 아이들의 헤맑은 모습에 감동을 받습니다. 실제 아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천사이며 각박한 세상에 피어난 꽃들이며, 아직 소멸되지 않은 꿈들이며, 정말 그 어떤 찬사와 미사여구를 다 사용해도 모자랄 것 같은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원래 교직에 뜻이 없고, 다만 사범대학을 다니기 때문에 교생실습을 나왔다가 뜻이 바뀌어 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고쳐먹는 경우가 적지 않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명심해야 하는 것은 아이들은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더군다나 미드의 이론을 빌리면 ‘일반화된 타자’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형성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성숙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교사의 깊은 뜻과 호의를 분명히 알고 있으며 좋아하고 고맙게 여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사가 원하는 바를 스스로 알아내어 보답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은 학생들의 요구를 잘 들어주는 교사에게 계속해서 요구할 것입니다. 물론 그에게 고마움과 친근함을 표시하기는 하겠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아이들은 수업시간을 무질서하게 만들 것이며 공부하지 말고 놀자고 떼를 쓸 겁니다. 마침내 교사가 참다 못해 “난 너희들이 하자는 대로 다 들어주었어. 그런데 왜 너희는 내 마음을 몰라주니?” 하며 화를 버럭 내고 눈물을 흘리는 지경까지 이르기까지 할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몇 번 반복되면 젊은 교사가 냉담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또 다시 셰프에 비유하자면 이 경우는 셰프가 ‘고객은 왕이다’라는 말을 너무 신봉한 나머지 메뉴 결정 뿐 아니라 레시피까지 손님에게 일임해 버린, 그리고 테이블 매너까지 손님에게 맡겨버린 경우입니다. 이렇게 되면 레스토랑의 존재가치는 사라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학교의, 교사의 존재가치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자,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이렇게 어렵습니다. 사실 여러분이 처음 학교에 가서 만나게 될 선배교사들의 모습은 상당히 냉담해져 있거나 무기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들 역시 젊은 시절에는 아이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의욕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분들 중에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도 커서 아이들을 괴롭히는 학교 현실에 맞서 싸우다가 해직과 복직을 반복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 사랑, 그 정열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심지어 그런 분들일수록 도리어 배신감, 상처, 환멸만 남아 있는 것 처럼 보이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아이들’이 그토록 사악하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 분들의 상처는 ‘아이들’을 ‘아이들로서’ 사랑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입은 것들입니다. 
아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부모와 교사의 공통분모라 할 수 있지만, 교사의 사랑은 지식에 기반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부모와 구별되는 것입니다. 교사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지식과 규범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지식에는 크게 세 가지가 포함됩니다. 1) 아이들에 대한 지식 2) 아이들의 필요에 대한 지식 3) 아이들을 필요한 것으로 이끄는 방법에 대한 지식.
이 중 첫 번째 지식을 통해 우리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주는 것을 아이들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 지식은 발달심리학과 사회학, 그리고 윤리학을 통해 아이들이 지금 단계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명확히 알게 되면, 둘 사이의 현실적인 차이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알게 되며, 따라서 이 차이를 좁히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 즉 세번째 지식이 그 쓰임새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런데 많은 교원양성기관이나 연수기관에서는 첫번째와 두번째 지식은 도외시한채 세번째 종류의 지식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또 교사들 역시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것을 찾으려는 조급함 때문에 첫번째, 두번째 지식에 대한 끈질긴 탐구를 생략한 채 각종 방법론만 터득하려는 경향을 보이곤 합니다. 이는 마치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떤 길을 달려야 할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동차 운전 기술만 부지런히 익히는 것과 같습니다. 부지런한 교사들일수록,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사들일수록 더욱 맹렬히 방법을 익히기 마련이니 그럴수록 상처가 더 커지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2) 여가시간의 우상

여가시간의 우상

교사가 되고자 희망하는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강력한 유인동기들 중 어쩌면 가장 막강한 것이 이것일 겁니다. 시간이 많다는 것, 즉 노동시간이 적다는 것 말입니다. 네. 실제로 교사들은 노동시간이 적은 편에 속합니다. 자본주의라고 하는 경제체제가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노동시장에서 판매함으로써 유지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같은, 혹은 더 많은 임금을 받으면서 더 적은 시간을 내어 놓고 있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다른 노동자들을 결과적으로 착취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마르크스가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했을 때 그 투쟁은 ‘부’를 놓고 투쟁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놓고 투쟁한 것입니다. 그것을 마르크스는 적절하게 ‘타인 노동의 전취’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배계급은 타인의 시간을 빼앗아 자신을 위해 노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시간은 생산과 무관한 시간, 즉 여가시간으로 만듭니다. 여가시간이 지겨우면 지배계급은 생산과정에 뛰어들어 나름 노동 하기도 하지만, 이때는 항상 많지 않은 시간, 그리고 직접적인 생산이 아닌 노동이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이런 점에서 나름 우아하게, 그것도 많지 않은 시간만 일해도 되는 교사는 지배계급이거나(음 이건 심하다), 지배계급으로부터 시간을 조금 나눠받은 지배계급의 조력자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사도 노동자다’라고 주장하면서 교사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유사성을 억지로 강조하는 집단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없는 유사성을 억지로 만들려고 하다보면 인지부조화에 빠지게 되며, 그 결과 어느 모로 보나 피지배계급으로는 보이지 않는 교사의 여러 조건을 매우 열악한 것으로 인식해 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진짜 노동자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매우 화가 나고 오히려 자본가보다 더 얄밉게 보일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전교조 활동가들이 돌 맞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진정 교사들이 노동운동을 하고자 한다면 자신들의 실제 조건, 실제 처지를 솔직하게 인정하는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혜택받고 있다. 이제 그 혜택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환원할지 고민하고자 한다.”이렇게 말입니다.

실제 형식적으로 교사의 노동시간은 매우 적습니다. 공립 중학교를 기준으로 보면 오전 8시30분에 일과가 시작되어 16시30분에 끝납니다. 교사는 점심시간도 근무시간으로 치기 때문에 사실상 7시간 노동제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비담임 교사라면 실제로는 9시부터 15시 까지가 근무시간입니다. 게다가 그 시간 중에도 하루 평균 90분 정도의 공강 시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행정 잡무가 시간을 빼앗기는 하지만, 언론 플레이 된 것만큼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루에 40분 정도면 능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교사의 하루 노동시간은 아무리 늘려 잡아도 5시간~6시간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1년중 수업이 행해지는 날은 205일에 불과합니다. 즉 1년에 160일을 쉬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8시간 중 30%가 노는 시간인 노동 시간에 다시 근무일:휴가의 비율이 5:4인 직장. 이거 완전히 천국 아닙니까? 거기에다 이른바 철밥통에 긴 정년에 연금까지!   
더 이상 긴 말 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여유로운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판타지는 이미 대한민국 사회에 너무도 널리 퍼져서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미 다 아는 사실일 것이고, 이걸 노리고 교사가 되려는 것임을 굳이 숨기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 어느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교사가 반드시 50% 이상 참석하는 단체 맞선을 저 출산 대책이랍시고 내어 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늘 교사를 선호하는 신부감 1위에 올려놓는 남성들의 심리도 역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밖에서 돈도 벌어오면서 시간이 많아서 집안일도 다 할수 있는 색시.” 아주 우렁이 각시를 꿈꾸고 있나 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답변을 드릴까 합니다.

1)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2) 또 그래서도 안됩니다.
3)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조만간에 그 여유시간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 대답부터 풀어 보겠습니다. 
교육계에 아주 오래 된 격언이 있습니다. “교사는 제대로 하고자 한다면 시간이 한 없이 부족하고, 게으름을 피우고자 한다면 시간이 한 없이 남아 돌 것이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굉장히 진부한 말이긴 하지만 이 진부한 말 속에 일말의 진실이 들어 있습니다. 사실 저도 젊을 때는 진부한 것들을 무시한 경향이 있었지만, 진부한 것들이 그 긴 세월동안 전승되어 온 것에는 다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격언은 앞의 부분만 진실이고 뒷 부분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교사의 노동이 살아있고 또 성장하는(듀이는 이 둘을 동의어로 씁니다만)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사는 한 없이 부지런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한 없이 게으르기는 어려운 직업입니다. 그랬다가는 살아있고 성장하는 대상인 학생들로 부터 즉각 경멸과 무시라는 부정적은 반응을 받게 될테니까요. 물론 그 정도는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정서적으로 둔감해지거나 철면피가 되면 상관없겠지만, 철면피가 되는 것은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 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사들은 최소한 마냥 게으르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사들은 다음과 같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8시간 근무 시간 중 수업이 있는 네 시간 가량은 최소한 성실히 채우고 나머지 네 시간 동안 게으름 피우는 교사와, 나머지 네 시간은 물론 8시간 이외의 시간까지도 수업을 준비하고 피드백을 정리하는 교사. 그럼 최소한 수업이라도 채우는 교사들은 그럭저럭 자기 할 일 한 거 아니냐고 볼맨 소리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학생들을 사물로 간주한 대단히 무례한 발상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교사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을 상대로 노동합니다. 교사가 하는 일은 콘베이어 벨트에 서서 반복 작업을 하는 그런 단순 노동이 아닙니다. 그 어떤 교육학 이론도, 교수-학습 방법도 구체적인 학생들을 만나면 상황에 따라 변경되어야 하며, 이 과정 속에서 새로운 이론, 새로운 방법이 도출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떤 학생들을 만날지, 또 어떤 상황에 직면할지 미리 예측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업 방법이나 학습 목표는 매일, 매 순간 다시 정해져야 하며 새로 구상되어야 합니다. 일단 이 구상이 마무리 된다면 정작 교실에서 하게 되는 수업은 그 최종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교사의 일은 교실에 들어선 순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무리 되는 것입니다. 교사의 일의 대부분은 수업 그 자체가 아니라 수업의 구상이며 수업에 대한 반성입니다. 그러니 교실에 있는 시간만 충실히 보낸 교사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의 절반만 한 셈입니다. 
하지만 이 절반의 성실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부족한 구상과 반성의 결과는 교실에서 바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충분히 숙고되지 않고,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수업에는 이내 흥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일단 흥미를 잃어버린 학생들 앞에서, 지루해서 몸을 뒤틀고 있는 학생들 앞에서 45분간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고역일 뿐 아니라 인간적인 모멸감까지 느끼게 만드는 끔찍한 경험입니다. 

그래서 절반의 성실에 만족하는 교사들, 즉 반성과 구상에 게으른 교사들은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하나는 교실 밖에 있는 시간을 ‘비는 시간’으로 보지 않고 ‘연구와 사색의 시간’으로 쓰는 것입니다. 방학을 ‘배움을 놓는 기간’인 방학(放學)이 아니라 ‘배움을 널리 구하는’ 방학(訪學)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고역의 45분 동안의 모멸감을 떨치기 위해 그 지루한 수업에 학생들을 강제로 집중시키는 것, 즉 ‘매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질은 하면 할 수록 학생들과의 상호작용만 악화시킬 뿐이며, 결국은 서로 증오하는 관계로 만드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여러 분 같이 젊은 교사의 경우 매질을 한다 할지라도 학생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지시 불응과 같은 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젊은 교사가 겪게 되는 정신적인 충격과 교직에 대한 환멸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따라서 재미있고 흥미있는 수업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여 구상하고 반성하는 것은 비단 학생들 뿐 아니라 교사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교실에서 학생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몸으로 느끼면서 활발한 상호작용을 즐기는 가운데 수업을 하는 기쁨은 경험해 보지 못한 다른 직종 종사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느껴질 정도로 대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기쁨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학습과 연구의 산물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하루 3 시간 남짖한 ‘비는 시간’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며, 그 나마 이 시간마저 수업 준비를 위한 학습과 연구에 할애하기 어려운 것이 한국 학교의 실정입니다. 각종 회의, 쓸모없는 행정 문서 꾸미기, 각종 전시성 사업 따위에 시간을 허비하다 보면 부아가 치밀어 오를 지경이며, 단지 시간을 허비한 것이 아니라 그 시간 만큼 연구와 학습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 됩니다. 

게다가 교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매 순간 순간의 수업 뿐 아닙니다. 교사는 당장의 수업에 직접적으로 쓰이지는 않을지라도 자기 분야와 교육학의 최신 동향과 연구 성과에 민감해야 합니다. 물론 교사가 그 분야나 교육학의 전문 학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사는 전문가로서의 소양은 계속해서 갱신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의학자와 임상의의 관계와 같습니다. 의사가 환자 치료하랴, 새로운 의학 이론 연구하랴 할 여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의사는 의학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흡수하여 환자를 치료하는데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교사가 사회학자일 필요는 없지만, 사회학의 새로운 성과를 흡수하여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 수준이 되어야 교과서나 교육과정에 갇히지 않고 도리어 더 넒은 시야에서 교과서나 교육과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게 되며, 상황에 따라 재구성 할 수 있게 됩니다. 교과서는 하나의 지침이자 방향타이지 교사가 알아야 하고 가르쳐야 할 내용의 전부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과서는 그 분야에서 가장 유능하다고 알려진 교사들이 주로 제작합니다. 따라서 전혀 무가치한 것이 아니며, 계속해서 진화하는 추세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 분야에서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계속해서 갱신하지 않는 교사는 진화하는 교과서 수준을 따라다니기에도 급급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게다가 교사는 신체도 건강해야 합니다. 교사는 인생 중 가장 활발한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사람입니다. 이 시기의 학생들은 결코 정적이지 않으며, 그 상호작용은 상당한 신체활동을 요구합니다. 정적인 교사, 정적인 수업은 제아무리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학생들에게 전혀 호소력을 가지지 못합니다. 따라서 교사는 활발한 신체 활동을 포함한 상호작용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학생들 앞에서 활기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강인한 체력마저 요구됩니다. 몸이 아프면 스트레스와 짜증이 누적되며, 이런 상태에서는 결코 활발하고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 정도쯤 되면 흔히 알려진 교사의 ‘여유 시간’이 거의 대부분 사라져 버린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교사는 퇴근 후의 시간도 결국 수업을 위해 할애해야 합니다. 연구에 몰두해야 하며, 또 신체 단련을 위해서도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게다가 다른 직종 종사자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방학은 거의 전적으로 자신의 학문적 성장을 위해 할애해야 합니다. 그러니 사실상 교사에게 남는 시간은 거의 없습니다. 교사는 노동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시간과 자원이 다른 직종에 비해 많기 때문에 직접 노동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을 뿐입니다. 예컨대 기능공은 한 번 익힌 기능을 공장에서 발휘하면 됩니다. 그리고 공장에서 일이 끝나면 피곤해진 심신을 휴식을 통해 재충전하면 됩니다. 하지만 교사는 사대, 교대에서 배운 것들이 몇년 안에 낡은 지식으로 전락하는 상황 속에서 일해야 합니다. 따라서 수업시간에 소모된 노동력의 재충전 이상의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대학 교수의 직접 노동시간이 교사보다 적은 이유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교수는 교육자라기 보다는 기본적으로 연구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사는 남는 시간을 앞에서 강조한 방식으로 알차게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식적으로 어떤 제재를 받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교사가 ‘전문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사는 여타의 전문직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알아서 잘 할 것”이라는 신뢰에 기반한 노무관리를 받습니다. 출퇴근부도 없으며, 업무 결과에 대한 세분화된 보고도 없습니다. 교사는 엄연히 공직자이지만 국장이 치루어지든, 을지 훈련이 실시되든 강 건너 불 처럼 보아도 됩니다. 심지어 다른 전문직들이 받는 “성과 평가”, 대학 교수들이 2년마다 제출해야 하는 “연구실적 평가”조차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교사는 마냥 게을러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게으른 교사들에 대한 징계는 교장이나 교육청이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징계는 학생들이 내립니다. 교과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지식수준, 그나마도 학생들의 언어로 해석하지 못하고 지루한 책읽기로 일관하는 교사, 늘 똑 같은 강의로 일관하는 교사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무기력, 수동성, 냉소, 무관심, 증오입니다. 한 두 사람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받아도 상처 받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하루에 수십, 수 백 명으로부터 이런 식의 부정적인 반응을 날이면 날마다 받고서도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걸 견딜 수 있다면 게을러도 상관은 없겠습니다만.
따라서 여러분들은 교사가 다른 직종 종사자들보다 여유시간, 즉 ‘일하지 않는’ 시간이 더 많을 것이라는 기대는 접어 두셔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축구선수가 일주일에 두 시간만 일하고 그 많은 연봉을 챙긴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착각입니다. 경기 시간만 축구 선수의 일이 아니듯, 수업 시간만 교사의 일이 아닙니다. 경기 시간 외의 훈련과 연습이 선수의 중요한 일이듯이 수업시간 외의 연구와 학습은 교사의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명선수와 평범한 선수의 차이는 시즌 중이 아니라 비시즌 기간을 보아야 알 수 있듯, 훌륭한 교사와 그렇지 않은 교사의 차이는 수업 시간보다 이른바 ‘비는 시간’을 보아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2) 스승의 우상

1. 교사에 대한 일반론

1장. 교사에 대한 우상들

통념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올바른지 여부가 검증되지 않았으나 흔히 사람들이 그렇게 믿기 때문에 마치 보편적인 지식처럼 통용되는 그런 생각들을 일컫는것입니다. 이 통념이라고 하는 놈은 이렇게 겉 보기에는 보편적인 모양을 하고 있고, 또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럴듯하게다듬어져 있기 때문에 특히 위험합니다. 잘못된 통념은 고치기도 어렵거니와, 자칫하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도리어 거짓말장이로몰아버릴수도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잘못된 통념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어떤 지식도 제대로 받아들이기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이나 베이컨 같은위대한 학자들은 자신의 철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전에 먼저 마음에 들어있는 잘못된 믿음의 근원을 추적하고, 그것을 제거하는작업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칸트의 대표작이라는 『순수이성 비판』도 이성을 통한 지식의 확장이 아니라 이성 그 자체에 한계를지워주는 작업이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통념으로 굳어진상태에서는 잘못된 지식만 얻을 뿐입니다. 게다가 인간의 지성은 어떤 경험적 재료 없이, 단지 머리속에 있는 관념만으로도 계속해서새로운 잘못된 관념들을 만들어낼수 있는 저주받은 능력과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생각은 더욱 확장됩니다. 베이컨은이렇게 잘못된 지식을 만들어내게 만드는 마음의 장애들, 그릇된 신념들을 우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유명한 동굴의 우상, 극장의우상, 시장의 우상 따위가 그것이죠. 그래서 먼저 이 우상들을 제거해야 감각기관이 제공하는 경험을 왜곡되지 않게 제대로 지각할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교사란 무엇인가라고 묻기 전에 먼저교사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 그리고 교사에 대한 여러 오해와 편견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앞세우려 합니다. 즉 교사에 대한우상들을 제거하려 합니다. 이런 우상들 때문에 교직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교사가 되어서는 안 될사람이 교사를 희망하기도 하고, 꼭 교사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 교직을 멀리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제 교사에 대한 우상들을하나하나 제시해서 깨뜨릴 것입니다. 이렇게 우상이 깨어졌을때 교사의 실제 모습이 드러날 것이며, 그 모습이 마음에 드시는 분은남은 부분을 계속 읽어 나가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분은 거기서 책을 덮으면 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우상은교사 일반이 아니라 한국교사 일반에 대한 우상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가 매우 깊어서 여러 세대에 걸쳐 형성된 아주 고질적인우상들입니다. 이 우상들은 심지어 속담이나 경구의 형태로까지 정착하였기 때문에 우리 의식속에 더욱 깊게 파고들며, 그만큼근절하기가 어렵습니다. 저 역시 이 짧은 글로 그것들을 근절할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합니다만, 최소한 균열은 내어보려 합니다.
1) 스승의 우상
우리는 스승이라는 말을 참 자주씁니다. 군사부일체니, 스승의 은혜는 하늘과 같다느니, 교사가 아니라 스승이 되어라 하는 경구 속에서 이 스승이라는 말은교사들의 뇌리에 아주 선명한 흔적을 남기며, 일반인들의 교사상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스승’. 이 말처럼 교사들을가망없는 상황에서도 절망적인 몸부림을 치게 만들고, 마땅한 자기 권리마저 포기하면서 끝없는 희생을 하도록 만들고, 또학생들로부터 필요 이상의 존경을 기대하게 만드는 말이 또 있을까요? 또 많은 패기있고 선량한 젊은이들을 교직으로 유인하고, 또그들이 장차 부딪치게 될 각종 난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보람을 찾으며 분투하게 만드는 말로 이 ‘스승’만한 것이 다시 있을까요?
하지만 저는 이 ‘스승’이야 말로교사를 오해하고, 교사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는 가장 강력한 우상으로 첫손 꼽는 일에 일말의 주저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사와스승은 결코 동의어가 아닌데, 이게 마치 동의어, 심지어 교사가 스승의 부분집합인양 알려지면서 일어난 폐단이 너무도 크기때문입니다. 물론 교사가 스승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교사가 스승이 될 필요는 없고, 될 수도 없으며, 더욱이 교사가다른 직종에 비해 스승이 될 가능성이 더 높은 것도 아니며, 더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저는 상당한 부담을느낍니다. 라이트 밀즈는 사회학자들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믿고 안정감을 느끼는 통념들을 공격하고 해체하기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한 사람의 사회학자로서 그토록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이 말, 스승이라는 통념에도전하고 이를 해부하고 그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려 합니다. 사실 이 작업은 많은 훌륭하고 성실한 교사들을, 그리고 이상을 품고정진하는 젊은 교사 지망생들을 크게 실망시키고,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아무리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다고 해도 그것이 우상인 한, 진리의 재단 앞에서 파괴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 없습니다. 
스승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가르쳐서인도하는 사람” 혹은 “가르쳐주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무엇을 가르치는지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무엇이든 간에 가르치고 이끌 수 있으면 누구나 스승이라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린이도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는것입니다. 세 사람이 가면 그 중 나의 스승이 반드시 한 명 있다고 했던 공자의 말은 여기에 아주 잘 들어 맞습니다.
그럼 교사는 무엇이라고 되어있을까요? 교사는 1) 학술·기예를 가르치는 사람 2) 학교에서 일정한 자격을 가지고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요즘에는 이 말이 너무 넓게 적용되어 학교는 물론 어떤 기관에라도 소속되어 학생이나 아동에게 어떤 교육적 작용을 하는 사람전반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부분은 학술·기예, 일정한 자격입니다. 즉 교사는 가르치고자 하는 구체적인 학술이나 기예가 있는 사람이며, 가르치기 위해 필요한자격 요건을 충족시킨 자인 것입니다. 반면 스승은 그 내용이 무엇이 되었든 결과적으로 가르친 셈이 되면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우리가 흔히 “내 인생의 스승”이라는 말을 할때 그 스승은 나를 가르치고자 의도한 바 없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사는처음부터 어떤 특정한 분야를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존재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흔히5,60년대에 명인 밑에서 요리를 배운 주방장들은 일을 도우면서 어깨너머로 배웠다고 합니다. 이럴 경우 그 명인은 스승은 될 수있지만 결코 교사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명인은 자신의 일을 했을 뿐이며 제자들은 명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요리를배운 셈이 된 것입니다. 명인이 의도했을수도 있겠지만, 그 명인이 스승이 되느냐 마느냐의 기준은 가르칠 의도를 가지고 있었느냐여부가 아니라 제자들이 결과적으로 요리를 배웠느냐 여부에 있는 것입니다. 반면 명인이 아니라 요리학교의 교사라면 결코 그렇게어깨너머로 배우도록 방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요리를 가르칠 목적과, 요리를 가르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을 가지고서학생들을 접합니다.
이제 정리해 봅시다. 스승은 교육 그 자체를목적으로 하고 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교육적 효과를 보여준 사람을 일컫는 총칭입니다. 그 사람을 스승으로 인정할것인가 말 것인가는 순전히 배웠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선택입니다. 전혀 가르친 적이 없는데 누군가가 나를 스승으로 여길 수도있고, 열심히 가르쳤는데도 나를 스승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교육의 의도를 분명히 하고 그것을 전문적인 직업으로가지고 있는 사람은 교사입니다. 따라서 그 결과와 무관하게 교육을 목적으로 하였는가가 교사의 기준이 됩니다. 만약 그 결과학생들이 배운바가 전혀 없다면 그는 무능한 교사라고 불려야 할 것이지만, 어쨌든 교사는 교사입니다. 스승은 본인도 모르게 스승이될 수 있지만, 교사는 처음부터 자신이 교사임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즘 교사는 있어도 스승은없다.”라는 말은 결코 교사를 비판하는 말, 혹은 세태를 한탄하는 말로 쓰일 수 없습니다. 애초에 교사와 스승은 개념이 다르기때문입니다. 도리어 스승이 줄어드는 세태는 가르치는 일을 전문적인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이며, 이는 사회 분업의고도화를 반영하는, 즉 사회의 진보를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과거라면 우연히 비의도적으로 배웠을여러 지식과 기능이 의도적인 교육을 통해 전수되는 대상으로 바뀌는 현상이 매우 빠르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만큼스승은 줄어들고 교사는 늘어날 것입니다.
실제로 전통사회에는 교사는 적고 스승은많았습니다. 특히 사회의 분화 정도가 미약했던 우리나라의 전통사회에서는 ‘교육’이 전문적인 직업으로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조선시대에는 가르치는 일을 전업으로 삼은 직종이 없었습니다. 물론 가르칠 수 있는 자격에 대한 규정도 없었습니다. 물론 서당이나서원에서 유교를 가르치는 선생이 있기는 했지만, 원칙적으로 이들은 학자·관료와도 얼마든지 호환가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즉유교선생을 직업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선비들은 출사하면 관리가 되고 낙향하면 선생이 되었을 뿐이며, 그 바탕이되는 직업은 학자였습니다. 또 향교나 성균관에서 정식으로 국가의 녹을 받는 선생들이 있었고, 이들은 분명히 교육적 의도를 가지고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이들 역시 언제든지 전혀 다른 종류의 관직으로 발령이 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전문적인 교사와는 거리가멉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배움이 정해진장소, 정해진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전천후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의 상황인 것입니다. 그나마 선생이라 불리는 관직이 있었던 것은 유교 정도였고, 다른 분야의 교육은특별히 의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고용주나 선배로부터 일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식의 가르침은특정한 기능이나 학술뿐 아니라 삶의 방식, 가치관까지 전수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의도한 바가 아닙니다. 즉, 그 스승은제자에게 자신의 삶 자체를 본의 아니게 전수하는 것입니다. 아마 교사만 있고 스승은 없다라는 탄식은 교사들이 이런 역할까지감당하기를 기대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과는 의식적인 역할수행이 아니라는 점에서 교사뿐 아니라 사회의 어른이라면누구나 감당해야 할 역할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스승이 없다는 탄식은 교사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기성세대 모두에 대한 비난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왜 스승이 줄어들고 교사가늘어났을까요? 그것은 전통사회의 ‘스승질’을 통해 비의도적으로 우연히 전수되기를 기다리기에는 교육이 감당해야 할 기능, 범위,내용이 너무도 크고 전문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근대화의 결과입니다. 근대화는 곧 지식혁명이었습니다. 근대화는 일종의 신비와주문으로 감추어 졌던 지식의 봉인을 풀어서 이를 생산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 지식은 어떤 신비한 영역에 들어서는 특별한경험이 아니라 누구나 노력하면 획득할 수 있는 자원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근대화는 민족국가와 세계시장을 불러왔습니다. 자신이태어나서 살아가는 작은 지역사회만 경험했던 전통사회와 달리 근대인은 최소한 민족국가 규모의 세상, 더 나아가서는 전 지구적범위의 세상을 경험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적어도 한 사람의 시민이라고 불리기 위해 공유해야 하는 지식, 사고,정서의 양과 범위가 엄청나게 넓어졌습니다. 
당장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한 번살펴보십시오. 단지 유교 경전과 예절, 혹은 약간의 기능 정도만 익히면 되었던 ‘스승’의 시대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다양한영역들이 교육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학교 이상으로 올라가면 이제 도저히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전문적인 분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각 분야들은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하도록 기대되고 있는 각 과목 전공교사들에의해 분담됩니다. 전통사회와 달리 교육이 분업화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교육이 분업화가 되면서 교사10명이 500명의 학생을 가르칠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전통사회 식으로 ‘스승’의 방식으로 가르치려 했다면 교사 10명이100명의 학생도 가르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교육은 귀족의 특권일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가장진보적인 사상가였던 루소조차 진정한 교육은 맨투맨 교육 외에는 없으며, 한 스승은 평생에 걸쳐 한 명의 학생 이상을 가르칠 수없다고 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이걸 페스탈로치가 학급 시스템을 통해 수십 명으로 늘려 놓았던 것이고, 프랑스와 독일에서 앞다투어 근대 군대와 공장을 본뜬 분업 시스템을 도입하여 오늘날과 같은 학교를 만든 것입니다. 장인이 생산물에 대해 가지는 권리에비해 분업화된 공장에서 노동자가 가지는 권리가 턱없이 작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분업화된 학교의 교사 한 사람이 학생 한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과거 스승의 그것과는 비할바가 못됩니다. 이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교육이 더 이상 귀족의 특권이 아니게되고, 또 갈수록 가르쳐야 할 영역과 내용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일입니다. 물론 이건 산업사회의 이야기고,지식·정보사회에서는 또 다른 관점이 필요하지만 그건 뒤에서 다시 논하기로 하겠습니다.
물론 어떤 교사는 이렇게 분업화 된 속에서도몇몇 학생들에게 인생을 뒤흔드는 충격과 각성을 주어 평생의 스승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연한효과이지 그것을 목표로 삼아 추구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하늘과 같은, 부모와 같은 스승이 될 희망을 버릴 필요까지는없지만, 그것을 추구하기 보다는 합리적이고 전문적인 직업인으로서 교사가 되는 쪽이 보다 현실적일 것입니다. 이미 근대 사회가스승을 해체하고 여러 분야의 교사들로 재배치한 이상, “스승은 없고 교사만 있다”라는 말은 사실은 이미 당연한 현실을 다시기술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말이 자꾸 회자되는 것은 교사에게 필요 이상의 도덕적 압력을 가하여 무한정의노력동원을 강요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아주 비열한 선전선동입니다. 
사실 ‘스승’의 상은 오늘날 훌륭한시민을 양성하는데 썩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시민에게 필요한 자질은 의사결정능력과 비판적 사고력입니다. 이런 능력은전인격적인 스승의 인도를 받아서는 도리어 압살될 가능성이 큽니다. 너무도 큰 스승의 그림자는 학생들의 비판적인 의식이 자라나는데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학생들이 이런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절절하고 체계적인 자극을 주는것에 만족하는 교사들이 여기에더 적합합니다. 게다가 교사들은 마치 권력분립처럼 여러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한 교사가 설사 나쁜 영향을 준다하더라도 그것때문에 학생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하지만 스승은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 만난 스승은 천추의한이 될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 ‘스승’의 상은 가부장적인 전제권력이 있던 봉건시대의 교육자 상에 불과하며, 여기에 대한끊임없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려는 집단은 바로 그런 전제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심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잠재적 교육과정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여러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승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목표로 삼을 필요는 없으며, 또 스승이 되지 못했다고특별히 서운해 하지 않아도 됩니다. 혹 스승 대접을 받더라도 그것 때문에 자신이 더 좋은 교사가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때로는 스승의 날에 졸업생이 한명도찾아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그것이 교육의 성공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학생의 인생에 깊이 개입하는 스승과 달리,그들이 스스로 설수 있도록 거리를 두고 자극을 제공하는 교사는 졸업생들에게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훌륭하게 성장했는데 선생님의 고마움을 모르고 마치 자기 스스로 자란 것처럼 여길 때, 그것이야 말로 교사가 가장 완벽하게 자기책무를 다한 것 일겁니다. 여담입니다만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이면 스승의 날때 졸업생이 찾아오는 것이 그다지 반갑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전근대적인 ‘스승의 우상’은 반드시 타파되어야 하며, 혹시 스승이 되고자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하려는 혹은 이미 선택한 젊은이가 있다면 더 늦기 전에 다른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시대의 교육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아 출항합니다

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