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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2) 스승의 우상

1. 교사에 대한 일반론

1장. 교사에 대한 우상들

통념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올바른지 여부가 검증되지 않았으나 흔히 사람들이 그렇게 믿기 때문에 마치 보편적인 지식처럼 통용되는 그런 생각들을 일컫는것입니다. 이 통념이라고 하는 놈은 이렇게 겉 보기에는 보편적인 모양을 하고 있고, 또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럴듯하게다듬어져 있기 때문에 특히 위험합니다. 잘못된 통념은 고치기도 어렵거니와, 자칫하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도리어 거짓말장이로몰아버릴수도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잘못된 통념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어떤 지식도 제대로 받아들이기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이나 베이컨 같은위대한 학자들은 자신의 철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전에 먼저 마음에 들어있는 잘못된 믿음의 근원을 추적하고, 그것을 제거하는작업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칸트의 대표작이라는 『순수이성 비판』도 이성을 통한 지식의 확장이 아니라 이성 그 자체에 한계를지워주는 작업이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통념으로 굳어진상태에서는 잘못된 지식만 얻을 뿐입니다. 게다가 인간의 지성은 어떤 경험적 재료 없이, 단지 머리속에 있는 관념만으로도 계속해서새로운 잘못된 관념들을 만들어낼수 있는 저주받은 능력과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생각은 더욱 확장됩니다. 베이컨은이렇게 잘못된 지식을 만들어내게 만드는 마음의 장애들, 그릇된 신념들을 우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유명한 동굴의 우상, 극장의우상, 시장의 우상 따위가 그것이죠. 그래서 먼저 이 우상들을 제거해야 감각기관이 제공하는 경험을 왜곡되지 않게 제대로 지각할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교사란 무엇인가라고 묻기 전에 먼저교사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 그리고 교사에 대한 여러 오해와 편견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앞세우려 합니다. 즉 교사에 대한우상들을 제거하려 합니다. 이런 우상들 때문에 교직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교사가 되어서는 안 될사람이 교사를 희망하기도 하고, 꼭 교사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 교직을 멀리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제 교사에 대한 우상들을하나하나 제시해서 깨뜨릴 것입니다. 이렇게 우상이 깨어졌을때 교사의 실제 모습이 드러날 것이며, 그 모습이 마음에 드시는 분은남은 부분을 계속 읽어 나가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분은 거기서 책을 덮으면 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우상은교사 일반이 아니라 한국교사 일반에 대한 우상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가 매우 깊어서 여러 세대에 걸쳐 형성된 아주 고질적인우상들입니다. 이 우상들은 심지어 속담이나 경구의 형태로까지 정착하였기 때문에 우리 의식속에 더욱 깊게 파고들며, 그만큼근절하기가 어렵습니다. 저 역시 이 짧은 글로 그것들을 근절할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합니다만, 최소한 균열은 내어보려 합니다.
1) 스승의 우상
우리는 스승이라는 말을 참 자주씁니다. 군사부일체니, 스승의 은혜는 하늘과 같다느니, 교사가 아니라 스승이 되어라 하는 경구 속에서 이 스승이라는 말은교사들의 뇌리에 아주 선명한 흔적을 남기며, 일반인들의 교사상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스승’. 이 말처럼 교사들을가망없는 상황에서도 절망적인 몸부림을 치게 만들고, 마땅한 자기 권리마저 포기하면서 끝없는 희생을 하도록 만들고, 또학생들로부터 필요 이상의 존경을 기대하게 만드는 말이 또 있을까요? 또 많은 패기있고 선량한 젊은이들을 교직으로 유인하고, 또그들이 장차 부딪치게 될 각종 난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보람을 찾으며 분투하게 만드는 말로 이 ‘스승’만한 것이 다시 있을까요?
하지만 저는 이 ‘스승’이야 말로교사를 오해하고, 교사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는 가장 강력한 우상으로 첫손 꼽는 일에 일말의 주저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사와스승은 결코 동의어가 아닌데, 이게 마치 동의어, 심지어 교사가 스승의 부분집합인양 알려지면서 일어난 폐단이 너무도 크기때문입니다. 물론 교사가 스승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교사가 스승이 될 필요는 없고, 될 수도 없으며, 더욱이 교사가다른 직종에 비해 스승이 될 가능성이 더 높은 것도 아니며, 더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저는 상당한 부담을느낍니다. 라이트 밀즈는 사회학자들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믿고 안정감을 느끼는 통념들을 공격하고 해체하기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한 사람의 사회학자로서 그토록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이 말, 스승이라는 통념에도전하고 이를 해부하고 그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려 합니다. 사실 이 작업은 많은 훌륭하고 성실한 교사들을, 그리고 이상을 품고정진하는 젊은 교사 지망생들을 크게 실망시키고,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아무리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다고 해도 그것이 우상인 한, 진리의 재단 앞에서 파괴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 없습니다. 
스승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가르쳐서인도하는 사람” 혹은 “가르쳐주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무엇을 가르치는지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무엇이든 간에 가르치고 이끌 수 있으면 누구나 스승이라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린이도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는것입니다. 세 사람이 가면 그 중 나의 스승이 반드시 한 명 있다고 했던 공자의 말은 여기에 아주 잘 들어 맞습니다.
그럼 교사는 무엇이라고 되어있을까요? 교사는 1) 학술·기예를 가르치는 사람 2) 학교에서 일정한 자격을 가지고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요즘에는 이 말이 너무 넓게 적용되어 학교는 물론 어떤 기관에라도 소속되어 학생이나 아동에게 어떤 교육적 작용을 하는 사람전반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부분은 학술·기예, 일정한 자격입니다. 즉 교사는 가르치고자 하는 구체적인 학술이나 기예가 있는 사람이며, 가르치기 위해 필요한자격 요건을 충족시킨 자인 것입니다. 반면 스승은 그 내용이 무엇이 되었든 결과적으로 가르친 셈이 되면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우리가 흔히 “내 인생의 스승”이라는 말을 할때 그 스승은 나를 가르치고자 의도한 바 없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사는처음부터 어떤 특정한 분야를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존재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흔히5,60년대에 명인 밑에서 요리를 배운 주방장들은 일을 도우면서 어깨너머로 배웠다고 합니다. 이럴 경우 그 명인은 스승은 될 수있지만 결코 교사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명인은 자신의 일을 했을 뿐이며 제자들은 명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요리를배운 셈이 된 것입니다. 명인이 의도했을수도 있겠지만, 그 명인이 스승이 되느냐 마느냐의 기준은 가르칠 의도를 가지고 있었느냐여부가 아니라 제자들이 결과적으로 요리를 배웠느냐 여부에 있는 것입니다. 반면 명인이 아니라 요리학교의 교사라면 결코 그렇게어깨너머로 배우도록 방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요리를 가르칠 목적과, 요리를 가르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을 가지고서학생들을 접합니다.
이제 정리해 봅시다. 스승은 교육 그 자체를목적으로 하고 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교육적 효과를 보여준 사람을 일컫는 총칭입니다. 그 사람을 스승으로 인정할것인가 말 것인가는 순전히 배웠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선택입니다. 전혀 가르친 적이 없는데 누군가가 나를 스승으로 여길 수도있고, 열심히 가르쳤는데도 나를 스승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교육의 의도를 분명히 하고 그것을 전문적인 직업으로가지고 있는 사람은 교사입니다. 따라서 그 결과와 무관하게 교육을 목적으로 하였는가가 교사의 기준이 됩니다. 만약 그 결과학생들이 배운바가 전혀 없다면 그는 무능한 교사라고 불려야 할 것이지만, 어쨌든 교사는 교사입니다. 스승은 본인도 모르게 스승이될 수 있지만, 교사는 처음부터 자신이 교사임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즘 교사는 있어도 스승은없다.”라는 말은 결코 교사를 비판하는 말, 혹은 세태를 한탄하는 말로 쓰일 수 없습니다. 애초에 교사와 스승은 개념이 다르기때문입니다. 도리어 스승이 줄어드는 세태는 가르치는 일을 전문적인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이며, 이는 사회 분업의고도화를 반영하는, 즉 사회의 진보를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과거라면 우연히 비의도적으로 배웠을여러 지식과 기능이 의도적인 교육을 통해 전수되는 대상으로 바뀌는 현상이 매우 빠르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만큼스승은 줄어들고 교사는 늘어날 것입니다.
실제로 전통사회에는 교사는 적고 스승은많았습니다. 특히 사회의 분화 정도가 미약했던 우리나라의 전통사회에서는 ‘교육’이 전문적인 직업으로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조선시대에는 가르치는 일을 전업으로 삼은 직종이 없었습니다. 물론 가르칠 수 있는 자격에 대한 규정도 없었습니다. 물론 서당이나서원에서 유교를 가르치는 선생이 있기는 했지만, 원칙적으로 이들은 학자·관료와도 얼마든지 호환가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즉유교선생을 직업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선비들은 출사하면 관리가 되고 낙향하면 선생이 되었을 뿐이며, 그 바탕이되는 직업은 학자였습니다. 또 향교나 성균관에서 정식으로 국가의 녹을 받는 선생들이 있었고, 이들은 분명히 교육적 의도를 가지고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이들 역시 언제든지 전혀 다른 종류의 관직으로 발령이 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전문적인 교사와는 거리가멉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배움이 정해진장소, 정해진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전천후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의 상황인 것입니다. 그나마 선생이라 불리는 관직이 있었던 것은 유교 정도였고, 다른 분야의 교육은특별히 의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고용주나 선배로부터 일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식의 가르침은특정한 기능이나 학술뿐 아니라 삶의 방식, 가치관까지 전수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의도한 바가 아닙니다. 즉, 그 스승은제자에게 자신의 삶 자체를 본의 아니게 전수하는 것입니다. 아마 교사만 있고 스승은 없다라는 탄식은 교사들이 이런 역할까지감당하기를 기대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과는 의식적인 역할수행이 아니라는 점에서 교사뿐 아니라 사회의 어른이라면누구나 감당해야 할 역할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스승이 없다는 탄식은 교사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기성세대 모두에 대한 비난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왜 스승이 줄어들고 교사가늘어났을까요? 그것은 전통사회의 ‘스승질’을 통해 비의도적으로 우연히 전수되기를 기다리기에는 교육이 감당해야 할 기능, 범위,내용이 너무도 크고 전문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근대화의 결과입니다. 근대화는 곧 지식혁명이었습니다. 근대화는 일종의 신비와주문으로 감추어 졌던 지식의 봉인을 풀어서 이를 생산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 지식은 어떤 신비한 영역에 들어서는 특별한경험이 아니라 누구나 노력하면 획득할 수 있는 자원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근대화는 민족국가와 세계시장을 불러왔습니다. 자신이태어나서 살아가는 작은 지역사회만 경험했던 전통사회와 달리 근대인은 최소한 민족국가 규모의 세상, 더 나아가서는 전 지구적범위의 세상을 경험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적어도 한 사람의 시민이라고 불리기 위해 공유해야 하는 지식, 사고,정서의 양과 범위가 엄청나게 넓어졌습니다. 
당장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한 번살펴보십시오. 단지 유교 경전과 예절, 혹은 약간의 기능 정도만 익히면 되었던 ‘스승’의 시대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다양한영역들이 교육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학교 이상으로 올라가면 이제 도저히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전문적인 분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각 분야들은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하도록 기대되고 있는 각 과목 전공교사들에의해 분담됩니다. 전통사회와 달리 교육이 분업화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교육이 분업화가 되면서 교사10명이 500명의 학생을 가르칠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전통사회 식으로 ‘스승’의 방식으로 가르치려 했다면 교사 10명이100명의 학생도 가르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교육은 귀족의 특권일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가장진보적인 사상가였던 루소조차 진정한 교육은 맨투맨 교육 외에는 없으며, 한 스승은 평생에 걸쳐 한 명의 학생 이상을 가르칠 수없다고 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이걸 페스탈로치가 학급 시스템을 통해 수십 명으로 늘려 놓았던 것이고, 프랑스와 독일에서 앞다투어 근대 군대와 공장을 본뜬 분업 시스템을 도입하여 오늘날과 같은 학교를 만든 것입니다. 장인이 생산물에 대해 가지는 권리에비해 분업화된 공장에서 노동자가 가지는 권리가 턱없이 작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분업화된 학교의 교사 한 사람이 학생 한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과거 스승의 그것과는 비할바가 못됩니다. 이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교육이 더 이상 귀족의 특권이 아니게되고, 또 갈수록 가르쳐야 할 영역과 내용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일입니다. 물론 이건 산업사회의 이야기고,지식·정보사회에서는 또 다른 관점이 필요하지만 그건 뒤에서 다시 논하기로 하겠습니다.
물론 어떤 교사는 이렇게 분업화 된 속에서도몇몇 학생들에게 인생을 뒤흔드는 충격과 각성을 주어 평생의 스승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연한효과이지 그것을 목표로 삼아 추구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하늘과 같은, 부모와 같은 스승이 될 희망을 버릴 필요까지는없지만, 그것을 추구하기 보다는 합리적이고 전문적인 직업인으로서 교사가 되는 쪽이 보다 현실적일 것입니다. 이미 근대 사회가스승을 해체하고 여러 분야의 교사들로 재배치한 이상, “스승은 없고 교사만 있다”라는 말은 사실은 이미 당연한 현실을 다시기술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말이 자꾸 회자되는 것은 교사에게 필요 이상의 도덕적 압력을 가하여 무한정의노력동원을 강요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아주 비열한 선전선동입니다. 
사실 ‘스승’의 상은 오늘날 훌륭한시민을 양성하는데 썩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시민에게 필요한 자질은 의사결정능력과 비판적 사고력입니다. 이런 능력은전인격적인 스승의 인도를 받아서는 도리어 압살될 가능성이 큽니다. 너무도 큰 스승의 그림자는 학생들의 비판적인 의식이 자라나는데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학생들이 이런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절절하고 체계적인 자극을 주는것에 만족하는 교사들이 여기에더 적합합니다. 게다가 교사들은 마치 권력분립처럼 여러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한 교사가 설사 나쁜 영향을 준다하더라도 그것때문에 학생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하지만 스승은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 만난 스승은 천추의한이 될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 ‘스승’의 상은 가부장적인 전제권력이 있던 봉건시대의 교육자 상에 불과하며, 여기에 대한끊임없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려는 집단은 바로 그런 전제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심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잠재적 교육과정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여러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승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목표로 삼을 필요는 없으며, 또 스승이 되지 못했다고특별히 서운해 하지 않아도 됩니다. 혹 스승 대접을 받더라도 그것 때문에 자신이 더 좋은 교사가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때로는 스승의 날에 졸업생이 한명도찾아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그것이 교육의 성공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학생의 인생에 깊이 개입하는 스승과 달리,그들이 스스로 설수 있도록 거리를 두고 자극을 제공하는 교사는 졸업생들에게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훌륭하게 성장했는데 선생님의 고마움을 모르고 마치 자기 스스로 자란 것처럼 여길 때, 그것이야 말로 교사가 가장 완벽하게 자기책무를 다한 것 일겁니다. 여담입니다만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이면 스승의 날때 졸업생이 찾아오는 것이 그다지 반갑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전근대적인 ‘스승의 우상’은 반드시 타파되어야 하며, 혹시 스승이 되고자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하려는 혹은 이미 선택한 젊은이가 있다면 더 늦기 전에 다른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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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