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불평등의 관점을 전환하자(2)

 
개천에서 용 나지 않는 것은 교육 불평등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이건 진보적인 교육운동 단체들이 잘 빠지는 함정이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게 가능하도록 만드는게 과연 교육평등인가? 그건 오히려 기존의 체제를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개천에서 용 나는게 어려워진게 문제가 아니다.
옛날 민중가요 중에 못 배워 땅만 파는, 우리 부모 원망 하랴?” 하는 가사가 있었다. 이젠 이런거 잊어버리자. 이건 왜곡된 교육관이며, 우리가 그토록 비판해 마지 않는 입시교육의 원조다. 진정 지적인 진보진영이라면 민중의 이런 소박한 감상에 동정은 할지언정 동조해서는 안된다.
개천에서 용 난적이 있기나 할까?” 용이 없거나 어디나 개천이던 시절에나 가능할 뿐이다. 교육을 통해서는 개천에서 용 날 수 없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 정상이다. 다만 우리 나라는 1894, 1910, 1945, 1950, 1998년 등 거의 매 세대마다 나라가 초토화되고 기존의 질서가 무너져서 전국이 개천이 되고, 용이 모조리 죽어버린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착시현상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매우 드물고, 다시 와도 안 된다.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화된 나라에서의 사회학적 연구 결과는 매우 냉정하다. 그 중 블라우와 덩컨의 경로 모형, 그리고 콜맨 보고서의 결과는 충격적이다. 이 결과들은 한 마디로 어떤 학생이 장차 성공하느냐 마느냐에서 교육은 거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학업성취도에서조차 학교, 교사 변인은 별 기여를 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유의한 변인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뿐이었다. 즉 부모가 용이면 용이고, 부모가 미꾸라지면 미꾸라지인 것이다.
만약 개천에서 용난다를 기반으로 교육 불평등을 말하려면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필살기인 인간자본론을 수긍해야 한다. 그것은 학교교육에서 생산력과 무관한 영역을 몽땅 제거해서 효율화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동의하는가? 그러나 실제 학교 교육은 현실 사회에서 잘살기 위해 필요한 능력과 덕목과 무관한 것들이 많으며, 또 그런 것들로만 이루어진 학교 교육은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것인가?
 
그건 절대 아니다. 우리는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즉 입시교육의 평등을 요구하거나 허황된 개천에서 용나기 신화를 거부하는 대신 우리가 그토록 주장해온 참교육에서의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즉 저소득층 자녀들이 부모 수준에 제한되지 않고, 그 이상의 덕성과 지성과 감수성, 그리고 신체관리 능력을 갖추도록 길러내어야 한다. 부모는 어쩌다 생긴 여가시간을 술, 담배, 막장 드라마에 탕진할 지언정, 그 자녀까지 그 수준에서 헤매게 하지 말자는 것이다. (입학사정관 제도와 수능 평이화는 이 점에서 지배계급의 아주 교묘하고 음험한 한 수다) 교사는 저소득층 자녀가 더 높은 성적을 올리게 하면서 교육 불평등을 해소 할 수 없으며, 그건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교사는 저소득층 자녀가 덕성, 지성, 감수성을 함양하도록 할 수는 있으며, 만약 그렇게 함양된 학생이 어떤 목적이 있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동기화 된다면 성적은 저절로 올라간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그 동안 교육 불평등 해소 노력이라고 불려오던 것을 포기함으로써, 즉 교육을 통해 소득격차를 줄인다는 환상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 이렇게 저소득층의 자녀들이 부모의 수준을 넘어 지배층에게 결코 뒤질 것이 없는 지성과 덕성을 갖추게 된다면, 그래서 그 사회가 이런 지성과 덕성을 갖춘 피지배층으로 가득하다면 그 사회는 강력한 평등에의 요구에 직면할 수 박에 없기 때문이다. 즉 교육이 불평등 해소에 기여한다면 이는 그 사회를 보다 민주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나설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길러내기 대문이지 더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기 때문이 아니다. 교육 평등이 사회 평등에 미치는 영향은 사회 전반적인 개혁이 가능하게 한다는 데 있지, 결코 교육받으면 더 잘살게 되는데 있지 않다. 따라서 교육운동은 지성인 교사들이 끊임없이 비판적 의식을 일깨우는 속에서 사회적 평등의 열망과 조건을 개척하는 것이지 공교육 제도의 기회 균등을 요구하는 것에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요구해야 하고 또 실천해야 하는 교육 불평등 해소의 방안은 명백하다. 그것은 저소득층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클레멘트 운동이다. 서울시 교육청의 문예체 진흥 교육 방안은 이 점에서 매우 적절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나라의 교사들은 클레멘트 운동의 주체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대상에 더 가깝다. 우리는 먼저 이렇게 주저앉아 있는 교사들부터 일으켜 세워야 한다. 교사들의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교사들이 먼저 덕성, 지성, 감수성, 체력으로 충만한 집단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충분히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교육 평등을 향한 교사운동의 첫걸음은 우선 교사들이 모였을 때 연예가 중계나 자식 이야기나 하지 말고 지성인다운, 문화인다운 대화를 나누고, 교무실의 풍토가 지적이고 문화적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무궁한 지적, 도덕적, 문화적 보고가 되어주는 것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사교육 받느라고 바쁜 상류층 자녀들은 맘대로 하라고 두자. 그걸 부러워하거나 그것 때문에 경쟁에서 뒤쳐진다고 조바심 내지 말자. 따지고 보면 그렇게 되면 참교육을 저소득층이 더 많이 받게 되는 것 아닌가?
 
그 결과는 용이 되어 개천을 빠져나가려는 미꾸라지가 아니다. 개천의 가치를 인식하고 개천을 더 살기 좋게 만들려는 깨어있는 미꾸라지들이며, 용의 착취와 억압을 근절하기 위해 떨쳐 일어서는 미꾸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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