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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3) 아이들의 우상

‘아이들’의 우상
내가 여기서 ‘아이들’이라고 특별한 인용 부호를 단 것은 이것을 일반명사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이들은 “저 공터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의미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우리 아이들을 살립시다.” 등의 용례에서, “아이들의 사랑과 믿음이 나의 교직생활 30년의 후원자였다.”라는 어느 선생님의 퇴임사에서 사용되는 아이들입니다.
이 말은 얼른 들으면 무척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박봉과 고달픈 업무에도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아이들’의 헤맑은 눈과 웃음만을 유일한 보상으로 삼아 알뜰 살뜰하게 보살피는 선생님의 상이 저절로 그려집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서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10년 전만 해도 이런 이유 때문에 교사가 되고자 했던 젊은이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불행히도 이것은 우상이며 잘못된 믿음입니다.
파울루 프레이리는 일찌기 이러한 관점을 ‘보육자적 관점’ 혹은 ‘보모적 교사관’이라고 부르면서 경계했습니다. 프레이리 같은 위대한 교육 사상가이자 교육 실천가가 왜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자’는 이 아름다운 생각을 오히려 경계했을까요? 혹은 이와 비슷한 사례로 유명한 혁명가 체 게바라가 혁명가가 되려는 청년들에게 제일 먼저 한 말은 “민중을 믿지 마라.”였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역시 “민중에 대한 사랑”, “민중에 대한 믿음과 헌신”을 위해 몸을 던진 청년들을 몹시 아연실색하게 했습니다. 여기서 던져주는 공통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지식인의 책무, 지식인의 위상과 관련됩니다. 교사는 ‘지식인’입니다. ‘사랑으로’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사실 교사가 아니라 ‘착한 어른’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교사가 꼭 더 잘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게다가 이 일은 부모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부모의 품에서 아이들을 떼어내어 학교라는 공간까지 끌고 와서 교사 앞에 앉혔을까요? 그것은 교사에게서 부모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어떤 특수한 책무와 능력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사가 고작 한다는 것이 사랑으로 아이들을 보살피고 예뻐해주는 일이라면 낭비도 이만저만한 낭비가 아닌 것입니다. 
체 게바라가 ‘혁명가’들이 이런 편향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민중과 사이좋게 지내는 민중의 벗이야 민중들 끼리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중들이 보지 못하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어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역할, 현실에 안주하는 민중들에게 때로는 불쾌하게 만드는 일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실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 그런 역할을 혁명가에게서 기대했던 것입니다.

교사는 근대 공교육 제도와 함께 형성된 직업적 교육자입니다. 즉 전문 교육자입니다. 이러한 전문 교육자를 양성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시대가 갈 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교사는 의사와 함께 공식적으로 학력을 제한하고 있는 유일한 직업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한다면 교사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전문적인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갖추기 위해 -비록 본래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대학의 교직과정이 존재하고, 교원 양성기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이 훌륭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분에게도, 또 일반 대학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여 학식이 높은 분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오직 교원양성기관 졸업자에게만, 그것도 치열한 경쟁시험을 거친 사람들에게만 교직의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아이들이 원하는 것과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 사이의 균형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많은 교사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침몰하고 마는데, 이는 이 중 어느 한 측면만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마냥 자기가 원하는대로 자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장차 ‘삶’이라는 이름으로 분투해야 할 ‘세계’, 즉 사회에서 쓸모있는 인간으로 자라야 합니다. 물론 이 세계니 사회니 하는 것의 범위를 무엇으로 보는가에 따라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크게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이 ‘필요한 것’이 ‘원하는 것’과 다르거나 충돌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교사들은 매우 자주 ‘필요한 것’을 아이들에게 강요합니다. 온갖 지루하고 힘든 일들을 강제로 요구하며 이 모든 것들이 다 ‘너 잘 되라고’ 시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건 그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아무리 미래의 삶을 이야기 하고 그것을 위해 싫더라도 ‘필요한 것’을 하라고 강요해도 아이들이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느끼지 않는 한, 아이들은 시늉만 할 뿐, 절대 그것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설사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필요하다고 느껴서 한 것이 아니라 강압에 굴복해서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교사가 아무리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말해봐야 아이들에게는 단지 강압일 뿐이며, 이렇게 되면 교사는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만 압제자에 불과하게 됩니다. 결국 아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을 강제한 교사는 아이들과 적대관계가 되며, 이들 사이에서는 갈등이 귾임없이 일어납니다. 이 때 많은 젊은 교사들은 그만 진심을 몰라주는 아이들에게 실망하면서 환멸을 느끼거나 냉담자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실망감을 토로하면서 자신을 갉아 먹습니다.
이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어처구니 없는 결과입니다. 이 과정은 무엇입니까?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의 내용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사랑의 이름으로 엄격한 강압을 일방적으로 부과하고, 갈등이 일어나자 일방적으로 사랑을 철회한 것입니다. 이것을 만약 남녀관계에 비유해 봅시다. 이것은 사랑이겠습니까 아니면 스토킹이겠습니까?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요리사의 예를 들어 봅시다. 사실 맛있고 훌륭한 요리의 기준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특급 셰프가 있는 것이겠죠. 하지만 어떤 요리를 제공할 것인가 하는 것은 셰프가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컨대 크림소스 스파게티는 이탈리아 요리의 수치라고 생각하는 셰프라 할지라도 손님이 그것을 주문했다면 일단 그 범위 안에서 솜씨를 뽐내어야 합니다. 셰프가 손님의 메뉴를 교정해 줄 권리는 없습니다. 심지어 “맛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요리해 주지 않겠다”며 봉사를 철회할 권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편향, 즉 학생의 요구를 절대화 하는 것 역시 위험합니다. 이것은 진보적 성향의 교사들, 혹은 ‘에밀’을 잘못 읽은 교사들이 자주 저지르는 오류입니다. 사실 선량한 교사들이 처음 교실에 들어서면 아이들의 헤맑은 모습에 감동을 받습니다. 실제 아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천사이며 각박한 세상에 피어난 꽃들이며, 아직 소멸되지 않은 꿈들이며, 정말 그 어떤 찬사와 미사여구를 다 사용해도 모자랄 것 같은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원래 교직에 뜻이 없고, 다만 사범대학을 다니기 때문에 교생실습을 나왔다가 뜻이 바뀌어 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고쳐먹는 경우가 적지 않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명심해야 하는 것은 아이들은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더군다나 미드의 이론을 빌리면 ‘일반화된 타자’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형성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성숙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교사의 깊은 뜻과 호의를 분명히 알고 있으며 좋아하고 고맙게 여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사가 원하는 바를 스스로 알아내어 보답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은 학생들의 요구를 잘 들어주는 교사에게 계속해서 요구할 것입니다. 물론 그에게 고마움과 친근함을 표시하기는 하겠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아이들은 수업시간을 무질서하게 만들 것이며 공부하지 말고 놀자고 떼를 쓸 겁니다. 마침내 교사가 참다 못해 “난 너희들이 하자는 대로 다 들어주었어. 그런데 왜 너희는 내 마음을 몰라주니?” 하며 화를 버럭 내고 눈물을 흘리는 지경까지 이르기까지 할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몇 번 반복되면 젊은 교사가 냉담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또 다시 셰프에 비유하자면 이 경우는 셰프가 ‘고객은 왕이다’라는 말을 너무 신봉한 나머지 메뉴 결정 뿐 아니라 레시피까지 손님에게 일임해 버린, 그리고 테이블 매너까지 손님에게 맡겨버린 경우입니다. 이렇게 되면 레스토랑의 존재가치는 사라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학교의, 교사의 존재가치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자,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이렇게 어렵습니다. 사실 여러분이 처음 학교에 가서 만나게 될 선배교사들의 모습은 상당히 냉담해져 있거나 무기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들 역시 젊은 시절에는 아이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의욕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분들 중에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도 커서 아이들을 괴롭히는 학교 현실에 맞서 싸우다가 해직과 복직을 반복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 사랑, 그 정열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심지어 그런 분들일수록 도리어 배신감, 상처, 환멸만 남아 있는 것 처럼 보이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아이들’이 그토록 사악하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 분들의 상처는 ‘아이들’을 ‘아이들로서’ 사랑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입은 것들입니다. 
아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부모와 교사의 공통분모라 할 수 있지만, 교사의 사랑은 지식에 기반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부모와 구별되는 것입니다. 교사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지식과 규범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지식에는 크게 세 가지가 포함됩니다. 1) 아이들에 대한 지식 2) 아이들의 필요에 대한 지식 3) 아이들을 필요한 것으로 이끄는 방법에 대한 지식.
이 중 첫 번째 지식을 통해 우리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주는 것을 아이들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 지식은 발달심리학과 사회학, 그리고 윤리학을 통해 아이들이 지금 단계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명확히 알게 되면, 둘 사이의 현실적인 차이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알게 되며, 따라서 이 차이를 좁히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 즉 세번째 지식이 그 쓰임새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런데 많은 교원양성기관이나 연수기관에서는 첫번째와 두번째 지식은 도외시한채 세번째 종류의 지식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또 교사들 역시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것을 찾으려는 조급함 때문에 첫번째, 두번째 지식에 대한 끈질긴 탐구를 생략한 채 각종 방법론만 터득하려는 경향을 보이곤 합니다. 이는 마치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떤 길을 달려야 할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동차 운전 기술만 부지런히 익히는 것과 같습니다. 부지런한 교사들일수록,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사들일수록 더욱 맹렬히 방법을 익히기 마련이니 그럴수록 상처가 더 커지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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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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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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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