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2) 여가시간의 우상

여가시간의 우상

교사가 되고자 희망하는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강력한 유인동기들 중 어쩌면 가장 막강한 것이 이것일 겁니다. 시간이 많다는 것, 즉 노동시간이 적다는 것 말입니다. 네. 실제로 교사들은 노동시간이 적은 편에 속합니다. 자본주의라고 하는 경제체제가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노동시장에서 판매함으로써 유지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같은, 혹은 더 많은 임금을 받으면서 더 적은 시간을 내어 놓고 있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다른 노동자들을 결과적으로 착취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마르크스가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했을 때 그 투쟁은 ‘부’를 놓고 투쟁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놓고 투쟁한 것입니다. 그것을 마르크스는 적절하게 ‘타인 노동의 전취’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배계급은 타인의 시간을 빼앗아 자신을 위해 노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시간은 생산과 무관한 시간, 즉 여가시간으로 만듭니다. 여가시간이 지겨우면 지배계급은 생산과정에 뛰어들어 나름 노동 하기도 하지만, 이때는 항상 많지 않은 시간, 그리고 직접적인 생산이 아닌 노동이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이런 점에서 나름 우아하게, 그것도 많지 않은 시간만 일해도 되는 교사는 지배계급이거나(음 이건 심하다), 지배계급으로부터 시간을 조금 나눠받은 지배계급의 조력자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사도 노동자다’라고 주장하면서 교사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유사성을 억지로 강조하는 집단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없는 유사성을 억지로 만들려고 하다보면 인지부조화에 빠지게 되며, 그 결과 어느 모로 보나 피지배계급으로는 보이지 않는 교사의 여러 조건을 매우 열악한 것으로 인식해 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진짜 노동자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매우 화가 나고 오히려 자본가보다 더 얄밉게 보일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전교조 활동가들이 돌 맞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진정 교사들이 노동운동을 하고자 한다면 자신들의 실제 조건, 실제 처지를 솔직하게 인정하는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혜택받고 있다. 이제 그 혜택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환원할지 고민하고자 한다.”이렇게 말입니다.

실제 형식적으로 교사의 노동시간은 매우 적습니다. 공립 중학교를 기준으로 보면 오전 8시30분에 일과가 시작되어 16시30분에 끝납니다. 교사는 점심시간도 근무시간으로 치기 때문에 사실상 7시간 노동제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비담임 교사라면 실제로는 9시부터 15시 까지가 근무시간입니다. 게다가 그 시간 중에도 하루 평균 90분 정도의 공강 시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행정 잡무가 시간을 빼앗기는 하지만, 언론 플레이 된 것만큼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루에 40분 정도면 능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교사의 하루 노동시간은 아무리 늘려 잡아도 5시간~6시간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1년중 수업이 행해지는 날은 205일에 불과합니다. 즉 1년에 160일을 쉬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8시간 중 30%가 노는 시간인 노동 시간에 다시 근무일:휴가의 비율이 5:4인 직장. 이거 완전히 천국 아닙니까? 거기에다 이른바 철밥통에 긴 정년에 연금까지!   
더 이상 긴 말 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여유로운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판타지는 이미 대한민국 사회에 너무도 널리 퍼져서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미 다 아는 사실일 것이고, 이걸 노리고 교사가 되려는 것임을 굳이 숨기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 어느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교사가 반드시 50% 이상 참석하는 단체 맞선을 저 출산 대책이랍시고 내어 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늘 교사를 선호하는 신부감 1위에 올려놓는 남성들의 심리도 역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밖에서 돈도 벌어오면서 시간이 많아서 집안일도 다 할수 있는 색시.” 아주 우렁이 각시를 꿈꾸고 있나 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답변을 드릴까 합니다.

1)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2) 또 그래서도 안됩니다.
3)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조만간에 그 여유시간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 대답부터 풀어 보겠습니다. 
교육계에 아주 오래 된 격언이 있습니다. “교사는 제대로 하고자 한다면 시간이 한 없이 부족하고, 게으름을 피우고자 한다면 시간이 한 없이 남아 돌 것이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굉장히 진부한 말이긴 하지만 이 진부한 말 속에 일말의 진실이 들어 있습니다. 사실 저도 젊을 때는 진부한 것들을 무시한 경향이 있었지만, 진부한 것들이 그 긴 세월동안 전승되어 온 것에는 다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격언은 앞의 부분만 진실이고 뒷 부분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교사의 노동이 살아있고 또 성장하는(듀이는 이 둘을 동의어로 씁니다만)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사는 한 없이 부지런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한 없이 게으르기는 어려운 직업입니다. 그랬다가는 살아있고 성장하는 대상인 학생들로 부터 즉각 경멸과 무시라는 부정적은 반응을 받게 될테니까요. 물론 그 정도는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정서적으로 둔감해지거나 철면피가 되면 상관없겠지만, 철면피가 되는 것은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 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사들은 최소한 마냥 게으르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사들은 다음과 같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8시간 근무 시간 중 수업이 있는 네 시간 가량은 최소한 성실히 채우고 나머지 네 시간 동안 게으름 피우는 교사와, 나머지 네 시간은 물론 8시간 이외의 시간까지도 수업을 준비하고 피드백을 정리하는 교사. 그럼 최소한 수업이라도 채우는 교사들은 그럭저럭 자기 할 일 한 거 아니냐고 볼맨 소리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학생들을 사물로 간주한 대단히 무례한 발상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교사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을 상대로 노동합니다. 교사가 하는 일은 콘베이어 벨트에 서서 반복 작업을 하는 그런 단순 노동이 아닙니다. 그 어떤 교육학 이론도, 교수-학습 방법도 구체적인 학생들을 만나면 상황에 따라 변경되어야 하며, 이 과정 속에서 새로운 이론, 새로운 방법이 도출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떤 학생들을 만날지, 또 어떤 상황에 직면할지 미리 예측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업 방법이나 학습 목표는 매일, 매 순간 다시 정해져야 하며 새로 구상되어야 합니다. 일단 이 구상이 마무리 된다면 정작 교실에서 하게 되는 수업은 그 최종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교사의 일은 교실에 들어선 순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무리 되는 것입니다. 교사의 일의 대부분은 수업 그 자체가 아니라 수업의 구상이며 수업에 대한 반성입니다. 그러니 교실에 있는 시간만 충실히 보낸 교사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의 절반만 한 셈입니다. 
하지만 이 절반의 성실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부족한 구상과 반성의 결과는 교실에서 바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충분히 숙고되지 않고,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수업에는 이내 흥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일단 흥미를 잃어버린 학생들 앞에서, 지루해서 몸을 뒤틀고 있는 학생들 앞에서 45분간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고역일 뿐 아니라 인간적인 모멸감까지 느끼게 만드는 끔찍한 경험입니다. 

그래서 절반의 성실에 만족하는 교사들, 즉 반성과 구상에 게으른 교사들은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하나는 교실 밖에 있는 시간을 ‘비는 시간’으로 보지 않고 ‘연구와 사색의 시간’으로 쓰는 것입니다. 방학을 ‘배움을 놓는 기간’인 방학(放學)이 아니라 ‘배움을 널리 구하는’ 방학(訪學)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고역의 45분 동안의 모멸감을 떨치기 위해 그 지루한 수업에 학생들을 강제로 집중시키는 것, 즉 ‘매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질은 하면 할 수록 학생들과의 상호작용만 악화시킬 뿐이며, 결국은 서로 증오하는 관계로 만드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여러 분 같이 젊은 교사의 경우 매질을 한다 할지라도 학생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지시 불응과 같은 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젊은 교사가 겪게 되는 정신적인 충격과 교직에 대한 환멸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따라서 재미있고 흥미있는 수업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여 구상하고 반성하는 것은 비단 학생들 뿐 아니라 교사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교실에서 학생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몸으로 느끼면서 활발한 상호작용을 즐기는 가운데 수업을 하는 기쁨은 경험해 보지 못한 다른 직종 종사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느껴질 정도로 대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기쁨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학습과 연구의 산물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하루 3 시간 남짖한 ‘비는 시간’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며, 그 나마 이 시간마저 수업 준비를 위한 학습과 연구에 할애하기 어려운 것이 한국 학교의 실정입니다. 각종 회의, 쓸모없는 행정 문서 꾸미기, 각종 전시성 사업 따위에 시간을 허비하다 보면 부아가 치밀어 오를 지경이며, 단지 시간을 허비한 것이 아니라 그 시간 만큼 연구와 학습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 됩니다. 

게다가 교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매 순간 순간의 수업 뿐 아닙니다. 교사는 당장의 수업에 직접적으로 쓰이지는 않을지라도 자기 분야와 교육학의 최신 동향과 연구 성과에 민감해야 합니다. 물론 교사가 그 분야나 교육학의 전문 학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사는 전문가로서의 소양은 계속해서 갱신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의학자와 임상의의 관계와 같습니다. 의사가 환자 치료하랴, 새로운 의학 이론 연구하랴 할 여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의사는 의학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흡수하여 환자를 치료하는데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교사가 사회학자일 필요는 없지만, 사회학의 새로운 성과를 흡수하여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 수준이 되어야 교과서나 교육과정에 갇히지 않고 도리어 더 넒은 시야에서 교과서나 교육과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게 되며, 상황에 따라 재구성 할 수 있게 됩니다. 교과서는 하나의 지침이자 방향타이지 교사가 알아야 하고 가르쳐야 할 내용의 전부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과서는 그 분야에서 가장 유능하다고 알려진 교사들이 주로 제작합니다. 따라서 전혀 무가치한 것이 아니며, 계속해서 진화하는 추세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 분야에서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계속해서 갱신하지 않는 교사는 진화하는 교과서 수준을 따라다니기에도 급급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게다가 교사는 신체도 건강해야 합니다. 교사는 인생 중 가장 활발한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사람입니다. 이 시기의 학생들은 결코 정적이지 않으며, 그 상호작용은 상당한 신체활동을 요구합니다. 정적인 교사, 정적인 수업은 제아무리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학생들에게 전혀 호소력을 가지지 못합니다. 따라서 교사는 활발한 신체 활동을 포함한 상호작용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학생들 앞에서 활기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강인한 체력마저 요구됩니다. 몸이 아프면 스트레스와 짜증이 누적되며, 이런 상태에서는 결코 활발하고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 정도쯤 되면 흔히 알려진 교사의 ‘여유 시간’이 거의 대부분 사라져 버린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교사는 퇴근 후의 시간도 결국 수업을 위해 할애해야 합니다. 연구에 몰두해야 하며, 또 신체 단련을 위해서도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게다가 다른 직종 종사자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방학은 거의 전적으로 자신의 학문적 성장을 위해 할애해야 합니다. 그러니 사실상 교사에게 남는 시간은 거의 없습니다. 교사는 노동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시간과 자원이 다른 직종에 비해 많기 때문에 직접 노동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을 뿐입니다. 예컨대 기능공은 한 번 익힌 기능을 공장에서 발휘하면 됩니다. 그리고 공장에서 일이 끝나면 피곤해진 심신을 휴식을 통해 재충전하면 됩니다. 하지만 교사는 사대, 교대에서 배운 것들이 몇년 안에 낡은 지식으로 전락하는 상황 속에서 일해야 합니다. 따라서 수업시간에 소모된 노동력의 재충전 이상의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대학 교수의 직접 노동시간이 교사보다 적은 이유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교수는 교육자라기 보다는 기본적으로 연구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사는 남는 시간을 앞에서 강조한 방식으로 알차게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식적으로 어떤 제재를 받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교사가 ‘전문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사는 여타의 전문직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알아서 잘 할 것”이라는 신뢰에 기반한 노무관리를 받습니다. 출퇴근부도 없으며, 업무 결과에 대한 세분화된 보고도 없습니다. 교사는 엄연히 공직자이지만 국장이 치루어지든, 을지 훈련이 실시되든 강 건너 불 처럼 보아도 됩니다. 심지어 다른 전문직들이 받는 “성과 평가”, 대학 교수들이 2년마다 제출해야 하는 “연구실적 평가”조차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교사는 마냥 게을러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게으른 교사들에 대한 징계는 교장이나 교육청이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징계는 학생들이 내립니다. 교과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지식수준, 그나마도 학생들의 언어로 해석하지 못하고 지루한 책읽기로 일관하는 교사, 늘 똑 같은 강의로 일관하는 교사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무기력, 수동성, 냉소, 무관심, 증오입니다. 한 두 사람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받아도 상처 받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하루에 수십, 수 백 명으로부터 이런 식의 부정적인 반응을 날이면 날마다 받고서도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걸 견딜 수 있다면 게을러도 상관은 없겠습니다만.
따라서 여러분들은 교사가 다른 직종 종사자들보다 여유시간, 즉 ‘일하지 않는’ 시간이 더 많을 것이라는 기대는 접어 두셔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축구선수가 일주일에 두 시간만 일하고 그 많은 연봉을 챙긴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착각입니다. 경기 시간만 축구 선수의 일이 아니듯, 수업 시간만 교사의 일이 아닙니다. 경기 시간 외의 훈련과 연습이 선수의 중요한 일이듯이 수업시간 외의 연구와 학습은 교사의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명선수와 평범한 선수의 차이는 시즌 중이 아니라 비시즌 기간을 보아야 알 수 있듯, 훌륭한 교사와 그렇지 않은 교사의 차이는 수업 시간보다 이른바 ‘비는 시간’을 보아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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