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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2) 여가시간의 우상

여가시간의 우상

교사가 되고자 희망하는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강력한 유인동기들 중 어쩌면 가장 막강한 것이 이것일 겁니다. 시간이 많다는 것, 즉 노동시간이 적다는 것 말입니다. 네. 실제로 교사들은 노동시간이 적은 편에 속합니다. 자본주의라고 하는 경제체제가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노동시장에서 판매함으로써 유지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같은, 혹은 더 많은 임금을 받으면서 더 적은 시간을 내어 놓고 있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다른 노동자들을 결과적으로 착취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마르크스가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했을 때 그 투쟁은 ‘부’를 놓고 투쟁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놓고 투쟁한 것입니다. 그것을 마르크스는 적절하게 ‘타인 노동의 전취’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배계급은 타인의 시간을 빼앗아 자신을 위해 노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시간은 생산과 무관한 시간, 즉 여가시간으로 만듭니다. 여가시간이 지겨우면 지배계급은 생산과정에 뛰어들어 나름 노동 하기도 하지만, 이때는 항상 많지 않은 시간, 그리고 직접적인 생산이 아닌 노동이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이런 점에서 나름 우아하게, 그것도 많지 않은 시간만 일해도 되는 교사는 지배계급이거나(음 이건 심하다), 지배계급으로부터 시간을 조금 나눠받은 지배계급의 조력자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사도 노동자다’라고 주장하면서 교사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유사성을 억지로 강조하는 집단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없는 유사성을 억지로 만들려고 하다보면 인지부조화에 빠지게 되며, 그 결과 어느 모로 보나 피지배계급으로는 보이지 않는 교사의 여러 조건을 매우 열악한 것으로 인식해 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진짜 노동자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매우 화가 나고 오히려 자본가보다 더 얄밉게 보일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전교조 활동가들이 돌 맞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진정 교사들이 노동운동을 하고자 한다면 자신들의 실제 조건, 실제 처지를 솔직하게 인정하는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혜택받고 있다. 이제 그 혜택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환원할지 고민하고자 한다.”이렇게 말입니다.

실제 형식적으로 교사의 노동시간은 매우 적습니다. 공립 중학교를 기준으로 보면 오전 8시30분에 일과가 시작되어 16시30분에 끝납니다. 교사는 점심시간도 근무시간으로 치기 때문에 사실상 7시간 노동제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비담임 교사라면 실제로는 9시부터 15시 까지가 근무시간입니다. 게다가 그 시간 중에도 하루 평균 90분 정도의 공강 시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행정 잡무가 시간을 빼앗기는 하지만, 언론 플레이 된 것만큼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루에 40분 정도면 능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교사의 하루 노동시간은 아무리 늘려 잡아도 5시간~6시간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1년중 수업이 행해지는 날은 205일에 불과합니다. 즉 1년에 160일을 쉬는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8시간 중 30%가 노는 시간인 노동 시간에 다시 근무일:휴가의 비율이 5:4인 직장. 이거 완전히 천국 아닙니까? 거기에다 이른바 철밥통에 긴 정년에 연금까지!   
더 이상 긴 말 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여유로운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판타지는 이미 대한민국 사회에 너무도 널리 퍼져서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미 다 아는 사실일 것이고, 이걸 노리고 교사가 되려는 것임을 굳이 숨기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 어느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교사가 반드시 50% 이상 참석하는 단체 맞선을 저 출산 대책이랍시고 내어 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늘 교사를 선호하는 신부감 1위에 올려놓는 남성들의 심리도 역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밖에서 돈도 벌어오면서 시간이 많아서 집안일도 다 할수 있는 색시.” 아주 우렁이 각시를 꿈꾸고 있나 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답변을 드릴까 합니다.

1)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2) 또 그래서도 안됩니다.
3)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조만간에 그 여유시간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 대답부터 풀어 보겠습니다. 
교육계에 아주 오래 된 격언이 있습니다. “교사는 제대로 하고자 한다면 시간이 한 없이 부족하고, 게으름을 피우고자 한다면 시간이 한 없이 남아 돌 것이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굉장히 진부한 말이긴 하지만 이 진부한 말 속에 일말의 진실이 들어 있습니다. 사실 저도 젊을 때는 진부한 것들을 무시한 경향이 있었지만, 진부한 것들이 그 긴 세월동안 전승되어 온 것에는 다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격언은 앞의 부분만 진실이고 뒷 부분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교사의 노동이 살아있고 또 성장하는(듀이는 이 둘을 동의어로 씁니다만)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사는 한 없이 부지런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한 없이 게으르기는 어려운 직업입니다. 그랬다가는 살아있고 성장하는 대상인 학생들로 부터 즉각 경멸과 무시라는 부정적은 반응을 받게 될테니까요. 물론 그 정도는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정서적으로 둔감해지거나 철면피가 되면 상관없겠지만, 철면피가 되는 것은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 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사들은 최소한 마냥 게으르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사들은 다음과 같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8시간 근무 시간 중 수업이 있는 네 시간 가량은 최소한 성실히 채우고 나머지 네 시간 동안 게으름 피우는 교사와, 나머지 네 시간은 물론 8시간 이외의 시간까지도 수업을 준비하고 피드백을 정리하는 교사. 그럼 최소한 수업이라도 채우는 교사들은 그럭저럭 자기 할 일 한 거 아니냐고 볼맨 소리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학생들을 사물로 간주한 대단히 무례한 발상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교사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을 상대로 노동합니다. 교사가 하는 일은 콘베이어 벨트에 서서 반복 작업을 하는 그런 단순 노동이 아닙니다. 그 어떤 교육학 이론도, 교수-학습 방법도 구체적인 학생들을 만나면 상황에 따라 변경되어야 하며, 이 과정 속에서 새로운 이론, 새로운 방법이 도출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떤 학생들을 만날지, 또 어떤 상황에 직면할지 미리 예측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업 방법이나 학습 목표는 매일, 매 순간 다시 정해져야 하며 새로 구상되어야 합니다. 일단 이 구상이 마무리 된다면 정작 교실에서 하게 되는 수업은 그 최종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교사의 일은 교실에 들어선 순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마무리 되는 것입니다. 교사의 일의 대부분은 수업 그 자체가 아니라 수업의 구상이며 수업에 대한 반성입니다. 그러니 교실에 있는 시간만 충실히 보낸 교사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의 절반만 한 셈입니다. 
하지만 이 절반의 성실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부족한 구상과 반성의 결과는 교실에서 바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충분히 숙고되지 않고,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수업에는 이내 흥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일단 흥미를 잃어버린 학생들 앞에서, 지루해서 몸을 뒤틀고 있는 학생들 앞에서 45분간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고역일 뿐 아니라 인간적인 모멸감까지 느끼게 만드는 끔찍한 경험입니다. 

그래서 절반의 성실에 만족하는 교사들, 즉 반성과 구상에 게으른 교사들은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하나는 교실 밖에 있는 시간을 ‘비는 시간’으로 보지 않고 ‘연구와 사색의 시간’으로 쓰는 것입니다. 방학을 ‘배움을 놓는 기간’인 방학(放學)이 아니라 ‘배움을 널리 구하는’ 방학(訪學)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고역의 45분 동안의 모멸감을 떨치기 위해 그 지루한 수업에 학생들을 강제로 집중시키는 것, 즉 ‘매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질은 하면 할 수록 학생들과의 상호작용만 악화시킬 뿐이며, 결국은 서로 증오하는 관계로 만드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여러 분 같이 젊은 교사의 경우 매질을 한다 할지라도 학생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지시 불응과 같은 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젊은 교사가 겪게 되는 정신적인 충격과 교직에 대한 환멸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따라서 재미있고 흥미있는 수업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여 구상하고 반성하는 것은 비단 학생들 뿐 아니라 교사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교실에서 학생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몸으로 느끼면서 활발한 상호작용을 즐기는 가운데 수업을 하는 기쁨은 경험해 보지 못한 다른 직종 종사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느껴질 정도로 대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기쁨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학습과 연구의 산물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하루 3 시간 남짖한 ‘비는 시간’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며, 그 나마 이 시간마저 수업 준비를 위한 학습과 연구에 할애하기 어려운 것이 한국 학교의 실정입니다. 각종 회의, 쓸모없는 행정 문서 꾸미기, 각종 전시성 사업 따위에 시간을 허비하다 보면 부아가 치밀어 오를 지경이며, 단지 시간을 허비한 것이 아니라 그 시간 만큼 연구와 학습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 됩니다. 

게다가 교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매 순간 순간의 수업 뿐 아닙니다. 교사는 당장의 수업에 직접적으로 쓰이지는 않을지라도 자기 분야와 교육학의 최신 동향과 연구 성과에 민감해야 합니다. 물론 교사가 그 분야나 교육학의 전문 학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사는 전문가로서의 소양은 계속해서 갱신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의학자와 임상의의 관계와 같습니다. 의사가 환자 치료하랴, 새로운 의학 이론 연구하랴 할 여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의사는 의학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흡수하여 환자를 치료하는데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교사가 사회학자일 필요는 없지만, 사회학의 새로운 성과를 흡수하여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 수준이 되어야 교과서나 교육과정에 갇히지 않고 도리어 더 넒은 시야에서 교과서나 교육과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게 되며, 상황에 따라 재구성 할 수 있게 됩니다. 교과서는 하나의 지침이자 방향타이지 교사가 알아야 하고 가르쳐야 할 내용의 전부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과서는 그 분야에서 가장 유능하다고 알려진 교사들이 주로 제작합니다. 따라서 전혀 무가치한 것이 아니며, 계속해서 진화하는 추세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 분야에서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계속해서 갱신하지 않는 교사는 진화하는 교과서 수준을 따라다니기에도 급급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게다가 교사는 신체도 건강해야 합니다. 교사는 인생 중 가장 활발한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사람입니다. 이 시기의 학생들은 결코 정적이지 않으며, 그 상호작용은 상당한 신체활동을 요구합니다. 정적인 교사, 정적인 수업은 제아무리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학생들에게 전혀 호소력을 가지지 못합니다. 따라서 교사는 활발한 신체 활동을 포함한 상호작용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학생들 앞에서 활기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강인한 체력마저 요구됩니다. 몸이 아프면 스트레스와 짜증이 누적되며, 이런 상태에서는 결코 활발하고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 정도쯤 되면 흔히 알려진 교사의 ‘여유 시간’이 거의 대부분 사라져 버린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교사는 퇴근 후의 시간도 결국 수업을 위해 할애해야 합니다. 연구에 몰두해야 하며, 또 신체 단련을 위해서도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게다가 다른 직종 종사자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방학은 거의 전적으로 자신의 학문적 성장을 위해 할애해야 합니다. 그러니 사실상 교사에게 남는 시간은 거의 없습니다. 교사는 노동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시간과 자원이 다른 직종에 비해 많기 때문에 직접 노동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을 뿐입니다. 예컨대 기능공은 한 번 익힌 기능을 공장에서 발휘하면 됩니다. 그리고 공장에서 일이 끝나면 피곤해진 심신을 휴식을 통해 재충전하면 됩니다. 하지만 교사는 사대, 교대에서 배운 것들이 몇년 안에 낡은 지식으로 전락하는 상황 속에서 일해야 합니다. 따라서 수업시간에 소모된 노동력의 재충전 이상의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대학 교수의 직접 노동시간이 교사보다 적은 이유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교수는 교육자라기 보다는 기본적으로 연구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사는 남는 시간을 앞에서 강조한 방식으로 알차게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식적으로 어떤 제재를 받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교사가 ‘전문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사는 여타의 전문직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알아서 잘 할 것”이라는 신뢰에 기반한 노무관리를 받습니다. 출퇴근부도 없으며, 업무 결과에 대한 세분화된 보고도 없습니다. 교사는 엄연히 공직자이지만 국장이 치루어지든, 을지 훈련이 실시되든 강 건너 불 처럼 보아도 됩니다. 심지어 다른 전문직들이 받는 “성과 평가”, 대학 교수들이 2년마다 제출해야 하는 “연구실적 평가”조차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교사는 마냥 게을러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게으른 교사들에 대한 징계는 교장이나 교육청이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징계는 학생들이 내립니다. 교과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지식수준, 그나마도 학생들의 언어로 해석하지 못하고 지루한 책읽기로 일관하는 교사, 늘 똑 같은 강의로 일관하는 교사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무기력, 수동성, 냉소, 무관심, 증오입니다. 한 두 사람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받아도 상처 받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하루에 수십, 수 백 명으로부터 이런 식의 부정적인 반응을 날이면 날마다 받고서도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걸 견딜 수 있다면 게을러도 상관은 없겠습니다만.
따라서 여러분들은 교사가 다른 직종 종사자들보다 여유시간, 즉 ‘일하지 않는’ 시간이 더 많을 것이라는 기대는 접어 두셔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축구선수가 일주일에 두 시간만 일하고 그 많은 연봉을 챙긴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착각입니다. 경기 시간만 축구 선수의 일이 아니듯, 수업 시간만 교사의 일이 아닙니다. 경기 시간 외의 훈련과 연습이 선수의 중요한 일이듯이 수업시간 외의 연구와 학습은 교사의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명선수와 평범한 선수의 차이는 시즌 중이 아니라 비시즌 기간을 보아야 알 수 있듯, 훌륭한 교사와 그렇지 않은 교사의 차이는 수업 시간보다 이른바 ‘비는 시간’을 보아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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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