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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불평등의 관점을 전환하자

진보진영에서 말해서는 안 되는 교육 불평등
 
우리는 교육 불평등을 말하기 전에 교육을 말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교육이 A라면 우리가 말하는 교육 불평등은 A의 불평등이라야 한다. 그런데 현재 진보진영의 교육 불평등 관련 논란은 교육은 A라고 주장하면서 B의 불평등을 문제 삼고 있어서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흔히 진보진영은 현재 우리 교육이 왜곡된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입시교육이 아니라 참교육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진보진영은 그 왜곡된 교육의 결과에서 비롯된 불평등을 교육 불평등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 따져보자. 왜곡된 교육의 결과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상류층에게 더 많이 분배가 된다면 그것은 문제 삼을 수 있는 불평등이 아니다. 도리어 평등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입시교육을 교육으로 제대로 된 교육으로 인정하지 않는 집단은 입시에서의 불평등을 교육 불평등이라 부르지 말아야 한다. 높은 서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목표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참교육을 실천하겠다고 외친 집단이 있다면 저소득층 자녀가 서열 높은 대학에 가지 못했다고 해서(이게 비록 아무 문제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걸 들어 교육 불평등이라고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
 
진보진영에서 말해야 하는 교육 불평등
 
참교육을 가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면 교육 불평등 역시 이런 참교육의 혜택이 계급·계층간에 불공평하게 분배되고 있을 때 문제 삼아야 한다. 만약 입으로는 참교육을 말하면서 몸으로는 왜곡된 입시교육의 혜택을 요구한다면 이건 진보라는 말을 차마 입에도 담기 어려운 언어도단을 범하고 있는 꼴이 될 것이다. 만약 우리 주장대로 입시교육이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한다면 그런 잘못된 교육이라면 상류층 아이들이 그런 교육을 더 많이 받는 것이 무슨 교육 불평등이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주장하는 참교육에서 불평등이 나타날 때 이를 교육 불평등이라고 문제 삼아야 한다. 우리는 즉각적인 충동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조절하여 다른 사람의 승인을 받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도덕적인 능력을 교육이 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의 조건을 성찰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을 교육이 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즐길 수 있고 창의성을 발현할 수 있는 미적인 태도와 능력을 교육이 길러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바로 참교육이라고 주장해 왔다. 문제는 바로 이런 도덕적, 지적, 미적인 태도와 소양이 과연 계급간에 불평등하게 분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도덕적, 지적, 미적인 태도와 소양은 후천적인 것이기에 이는 교육의 문제가 되며, 이게 만약 하층계급에게 더 부족하게 나타나고 있다면 이게 바로 교육 불평등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미의 교육 불평등이 실재하는가? YES

1980년대에는 지배계급에 대한 반감에 젖은 나머지 객관적인 사실을 왜곡했다. 그래서 지배계급, 상류층은 악하고 민중은 선한 것처럼 착각했다. 사실이 그렇다면 불평등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다. 왜냐하면 근대사회에서 성공에는 미덕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성공하고 많은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 모두 도둑질을 했거나 부정하고 잔혹하거나 운이 좋아서 그랬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물론 일부 재벌 2세 등등이 있기는 하겠지만, 최상층의 거물들 말고 상위 20% 층의 상당수 (여러 전문직, 성공한 사업가 등)는 기본적으로 prudence(신중한 이해타산, 사려), temperance(절제), sympathy(공감)라는 능력이 없었으면 그 자리에 갈 수 없었다

빼어나게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성공은 당장의 욕망을 억제하여 여력을 축적하고, 그것을 훗날 보다 요긴한 곳에 신중하게 투입하며, 다른 사람들의 공감과 시인을 획득하여 사회적인 지위를 얻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이런 미덕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회에서는 하층계급이 성공에의 열망도 혹은 아예 체제를 바꿀 혁명적 결기도 없이 그저 시기와 분노로만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이 시기심과 분노에 호소하는 게 파퓔리즘: 교원평가가 이걸 이용해서 여론을 획득함. 전교조는 민중이 시기심과 분노의 상태에 있음을 망각하고 추상적이고 교과서적인 민중을 상정하다가 망함.민중에게 각성과 미덕을 요구하고 깨어나고 공부하라고 외치는 게 진보.)

실제 현실을 살펴보면 계급간의 불평등은 단지 재산과 소득의 불평등이 아니라 미덕의 불평등까지 퍼져있다. 가난은 선량과 소박 보다는 무지와 타락에 더 쉽게 연결된다. 만연하는 범죄를 들어 평등의 당위를 주장하면서 정작 가난한 집단의 도덕적 타락이라는 현상을 부정하는 것은 모순이다.(일찍이 레닌의 자생성과 의식성 테제, 혹은 혁명가가 되려면 민중을 불신하는 법을 배우라던 체게바라의 가르침, 그리고 사회변혁의 동력을 가장 가난한 계층이 아니라 당시에는 오히려 중산층에 가까웠던 문자해독력을 갖춘 숙련 노동자 집단에서 찾으려 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통찰력. 그리고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가장 높은 집단은 하층민... 지지자의 소득수준 가장 높은 정당은 진보신당)

문제는 원래 이런 미덕을 갖춘 부모의 자녀는 미덕을 악덕을 갖춘 부모의 자녀는 악덕을 갖추기 더 쉽다는 것이다. 즉 재산뿐 아니라 미덕이 대물림된다. 재산의 대물림은 부자3대 안간다는 속담처럼 미덕의 대물림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금새 평준화 된다. 그러나 미덕의 대물림은
 
실제 교사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공부 잘하는 애들은 이기적이고 인간성이 황이다? 부잣집 애들은 거만하고 무례하다? 이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설정이다. 현실은 그 반대임을 일선 교사들은 몸으로 알고 있다. 강남, 강동 교육청이 경합지역인 까닭이 설마 촌지 때문만일까? 일선 교사들은 알고 있다. 어떤 아이들이 인간성도 막장인지. , 이게 바로 진정한 교육 불평등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그나마 우리 나라의 교육 불평등은 미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좀 덜한 편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상류층은 미국이나 일본의 상류층보다 훨씬 무식하고 경망스럽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 혹은 영국처럼 상류층과 저소득층간의 넘사벽의 문화적 장벽이 비교적 약한 편이다. 어차피 상류층 아이들이나 저소득층 아이들이나 오페라 보면 골아떨어지긴 마찬가지라는 것이며,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을 읽어본 적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상류층이나 저소득층이나 시간과 돈의 여유가 생기면 하는 놀이가 술마시고 헤롱거리는 거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술이 양주냐 소주냐, 노래가 생음악이냐 노래방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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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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