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젊은 진보주의자에게

이 글은 고민하고 있는 어느 후배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자유. 이것처럼 정의 내리기 어려운 말이 또 있을까요? 또, 이렇게 정의 내리기 어려운 말을 목표로 삼은 투쟁이 과연 성공은 고사하고 성립이나 될 수 있을까요?
맑스의 자유는 무엇일까요? 맑스의 자유는 필연성의 인식 다음 단계에 찾아옵니다. 맑스의 필연성은 헤겔의 그것처럼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수반해야만 이루어지는 잠재적 필연성이니까요. 따라서 필연성을 인식하고서 그 필연성을 구현하기 위한 실천을 감행하고자 결단하는 과정에 바로 자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이건 제 독단일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자유 때문에 폭도와 혁명가가 다른 것이죠. 폭도에게는 자유가 없죠. 그들은 자신들의 충동과 감정, 순간적인 분노의 노예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혁명가는 과학적 인식과 오랜 반성 끝에 내린 결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니 자유로운 것이죠. 즉 맑스주의자의 자유는 흔히 말하는 “자유.” 혹은 한대수나 포크가수들이 말하는 “자유”와는 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죠. 흔히 말하는 “자유”는 자칫 잘못하면 충동의 복권으로 이어져서 폭도 수준이 되겠죠.

OOO님은 바로 이 점을 간과하신 것 같군요. 맑스주의자의 자유는 아무 때나 사회주의를 선언하고 사회주의적으로 살아갈 자유가 아닙니다. 만약 고려시대 때 그런 주장을 하고 그런 삶을 실천했다면 그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시대착오자입니다. 좀 차갑고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맑스주의자는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굳이 비중을 두자면 차가운 머리가 우선입니다.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결단. 이 두가지중 어느 한 가지만 기울어도 운동은 실패합니다.
그런데 OOO님은 마치 맑스처럼 생각하고 맑스처럼 생활하고 각성하는 것이 운동의 절대 조건인 것처럼, 아니 성공의 열쇠인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말씀 속에는 모든 국민이 맑스주의자가 되면 혁명이 이루어진다는 엉뚱한 결론이 녹아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건 공상적 사회주의이거나 아니면 관념론입니다.
진정한 맑스주의자는 부르주아와의 단절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회주의는 부르주아의 토양 위에서 성장합니다. 근대성이라는 터전 없는 사회주의는 결국 공산당 독재, 이름만 바뀐 왕정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이건 구소련과 북한의 역사가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부르주아에 대한 증오는 결코 운동의 동력이 될 수 없습니다. 맑스주의자는 자본주의 사회가 인류의 진보에 나름의 역할을 했음을 인정합니다. 다만 이제는 그 역할을 다 하고 그만 물러갈 때가 되었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이제 인류에게 순기능 보다는 역기능을 더 많이 안겨주고 있어서 고통의 근원이 되고 있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물러가지 않으려 하니 몰아내자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 얘기 좀 할까요?

제가 대학 들어간 해는 1987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른바 6월 항쟁의 주역이죠. 이 투쟁은 정말 대단했었죠. 하지만 그때 그 주역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그때 싸웠던 사람이나 구경했던 사람이나 아니면 자기 잇속만 차렸던 사람이나 결국은 똑 같은 사람들이 되었죠. 6월의 주역 386세대가 벤처의 선구자가 되어 이윤을 챙기기 위해 이전구투하는 자본주의의 돌격대가 되었죠. 저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투쟁이 추상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988년과 1989년에는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가 유행했던 시절이죠. 가히 학생운동의 황금기라 할만 했습니다. 과거의 무용담을 자랑하는 것은 우매한 일이 되겠지만 그 시절 저는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하는 곳이면 어디나, 강제 철거가 이루어지는 곳이면 어디나 달려가서 구사대와 혹은 철거반과 박 터지게 싸웠습니다. 나중에 관악 경찰서에 끌려가 기소유예로 겨우 풀려날 때 전경 중대장이 담배 한 보루 사 들고 위문을 다 왔으니. 정말 싸우다 정 든건지.......

사실 그 시절에는 “이 싸움이 나하고 무슨 상관인가?” 하며 고뇌하는 것 자체가 사치였고 부르주아적 망상이었습니다. 싸움은 당위였고 유일한 도덕 판단의 기준이었습니다. 1학년때는 투쟁판에 나서면 보통사람 나서지 않으면 비인간 대접을 받았고, 2,3학년 때는 투쟁 판에 나서면 착한사람 안 나서면 보통사람이었고, 4학년 때는 투쟁 판에 나서면 존경할만한 사람, 안 나서면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객관식 문제 풀이나 열심히 하고 교과서 외의 책이라고는 한 줄도 안 읽어본 고등학교 갓 졸업한 19살짜리 아이들이 무얼 안다고 나라 전체의 운명을 세계 전체의 운명을 두 어깨에 걸고 결연히 싸웠겠습니까? 그저 선배들 따라 줄줄 나간 거죠. 그러다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머리가 굵어지니까 슬슬 빠져 나가는 거지요. 그러니 이 싸움이 추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즘 대학생들은 처지가 다르죠. 80년대처럼 투쟁이 당위이자 보편이 아니라 오히려 이상한 일, 특이한 일 취급을 당하는 시대니 거기에 가담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고뇌가 있어야 하겠죠. 선배들 눈치 보느라 어쩔 수 없이 데모판에 따라가는 일은 없겠죠. 하지만 80년대는 그랬습니다.

저는 그 짓을 대학 졸업할 때까지 했습니다. 저는 한순간도 투쟁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끝내 이 투쟁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아니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회주의는 인류의 희망이고 자본주의는 인류의 저주이며 멸망의 보증수표이니 무슨 고민이고 자시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가장 결정적인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저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입으로는 아무리 계급의식을 나발 거려도 진짜 프롤레타리아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그렇습니다. 저는 빛나는 국립서울대학의 졸업장을 포기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아니 그건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부모 돈 받아서 대학 등록금은 꼬박꼬박 챙겨 내면서 돈 없어 대학 못간 노동자들 앞에서 노동해방의 동지들 어쩌고저쩌고 함께 노동해방의 그날까지 투쟁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정말 잘도 놀았던 것입니다. 저한테 물든 스물두 살 먹은 한 청년 노동자는 결국 제가 말한 대로 노동해방의 투쟁의 일선에서 힘써 싸우다가 회사 짤리고 어디에도 취직하지 못하고 결국 폐인 되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너 너무 그러지 마라. 어떻게 먹고 살려고 그러니?”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녀석이 싸우면 싸울수록 “그래. 잘한다. 너야말로 진정한 노동계급의 전위투사다!”라며 격려 했습니다. 허허.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한 게죠. 만약 내가 빚 투성이 부모 밑에서 이놈의 공장 월급으로 겨우겨우 먹고 사는 처지였다면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면서, 또 상류층 자제로서, 엘리트 대학 출신으로서 기득권은 포기하지도 않으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운운했던 것이 이미 추상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했다면 저는 마땅히 대학을 중퇴하고 강남지역의 중대형 아파트인 우리 집을 가출하고 부르주아인 아버지가 주는 돈은 10원도 받지 말고 공장에 가서 노동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 말에 책임을 지는 행동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지 못했습니다. 잃어버릴 기득권이 너무 컸던 것입니다. 

자. 이것이 제가 과거의 투쟁을 추상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는 자신의 행동을 투쟁이라고 부르기 위한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저의 투쟁은 과거 저의 투쟁에 비하면 확실히 안전하고 온건하고 부드럽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투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진정한 본질에서 우러나온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이제야 나는 구체적인 교사로서의 나 자신과 총체적인 사회 속에서의 나를 함께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대학생으로서, 즉 기득권 엘리트로서의 나 자신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어거지로 노동자의 의식만 머리에 담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의 운동과 투쟁은 이제 시작되었습니다. 과거의 추상을 넘어 구체적인 투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 후배님들은 저의 이 고뇌를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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