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좌파 까기(2) -김규항 2

김규항 이야기는 오늘로 마치려고 한다. 사실 이번에 하고자 하는 말은 김규항에 대한 것이 아니라 김규항이 구사하는 개념과 용어들에 대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규항의 인격은 다소 편협하지만 그래도 배울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구사하는 '진보'개념이 사람들을 호도한다는 것이다. 개념을 논쟁적인 의미를 담고 사용하지 않고 판단의 준거로 사용해 버리면, 결국 자신이 내린 그 개념의 정의 안에 감금당하고 마는 셈이다. 사실 이 개념은 김규항 뿐 아니라 모든 B급 좌파들이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문사회 고전들 중 '진보'라는 단어가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책은 무엇일까? 마르크스의 자본론? 천만에. 직접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 아니면 알프레드 마셜의 "경제학 원리'일 것이다. 특히 마셜의 책은 '진보'로 시작해서 '진보'로 끝난다. 즉 B급좌파식으로 말하자면 이 진보라는 말은 원래 좌파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사도들"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좌파가 진보라는 말을 쓰지 말라는 건 아니다.

좌파든 우파든 간에 "인류의 상태가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을 믿고 있다면" 누구나 진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우파는 지금보다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생산과 분배가 이루어져서 보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진다면 그걸 진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좌파의 진보도 그닥 다르지 않다. 아니 사실상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다만 자본가의 이윤이 정당한 몫이냐 아니면 단지 착취에 불과하거나 잘 봐줘야 일종의 필요악이냐를 놓고 의견이 갈릴 뿐이다.

혹은 인류의 욕망 자체가 물질적인 욕망을 넘어서 보다 정신적이고 미적인 수준으로 고양되어 지금처럼 경제적 분배를 놓고 다투는 경지를 넘어서는 것을 진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놀랍게도 그 사람은 존 메이너드 케인즈다.

그러니 한 마디로 진보란 지금보다 나은 인류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느 것이 더 나은 상태인가를 놓고 이념이 갈릴 뿐이다. 따라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면 그게 사회주의자건 개량주의자건 관계없이 진보라 불릴 자격이 있다. 진중권도 진보고, 조국도 진보다. 물론 나도 진보며, 장관되기 전의 이주호도 진보다. 반면 미래에 대한 비전 없이 기득권에만 집착하는 한국교총과 교장단은 진보가 아니며, 민주노총과 노동귀족들도 진보가 아니며, 전교조 지도부들도 진보가 아니다. 그러고 보면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는 김규항은 다소 진보라 부르기 위태로운 지점에 있다.

사회주의를 말한다고 해서 꼭 진보는 아니다. 예컨데 요제프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결국은 관료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될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슘페터는 진보가 아니다. 그는 경제의 활력과 기업의 모험심이 차가운 집산주의로 응결된 결과로 사회주의를 말한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사회주의에 대한 묘사는 좌파의 그것과 다를바가 없다.
반미반제를 말한다고 해서 진보가 아닌 것은 당연하다. 김정일이나 카다피를 진보라고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테니.

물론 자본주의 너머를 사유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자본주의 너머를 사유하지 못한다고 해서 진보가 아닌 것은 아니다. 먼 훗날을 내다보는 진보나, 지금 실현 가능한 개선을 시도하는 진보나 소중하기는 마찬가지다. 사실은 후자가 더 소중하다. "자연은 도약하지 않기"때문이다.

게다가 자본주의를 부정한다고 해서 그게 진보인 것은 아니다. 그런 논리라면 마르크스야 말로 가장 보수적인 사상가다. "공산당 선언"의 거의 절반은 자본주의 예찬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가능한 토양을 자본주의가 만들었으며, 실상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는 껍데기만 남겨놓고 거의 공산주의화 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아니면 그 거대한 생산력의 사회화는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자본주의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그 다양한 신분과 계급을 모조리 철폐해서 소수의 자본가와 다수의 노동자로 단순화 했겠는가?

기실 사회주의는 이미 자본주의가 다 이루어 놓은 것에 거기에 알맞은 옷을 입히는 것에 불과하다. 이미 사회화된 생산수단을 사적소유로부터 해방시키고, 이미 소수의 자본가 외에는 평준화된 계급을 마저 평준화 하자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는 당시 경천동지할 발언을 퍼붓고 다니던 프루동이나 바쿠닌에 비하면 자본주의 찬양론자에 가깝다. 하지만 "소유하는 것은 도둑질하는 것이다."라며 절규했던 프루동이 마르크스보다 진보적인가? 심지어 19세기 초 자본주의에 대해 가장 적대적이었던 사람은 원조 보수주의자인 에드먼드 버크였다.

결국 마르크스는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에 충실했던 것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라는 토양이 충분히 성숙했을때 그것을 토대로 가능한 것이지, 용기와 반자본주의 결기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양질전환의 법칙도 마찬가지다. 물론 양적 변화만으로는 소위 "근본적 변혁"이 이루어졌다고 할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질적 변화는 양적변화가 누적된 결과다. 즉 근본적 변혁을 하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라 그 순간 순간 요구되는 변혁을 꾸준히 누적시키다가 어느 임계점에서 근본적인 변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혁명은 공격성과 폭력성을 갖춘 사람들이 계속 모여서 음모를 꾸미다가 한 순간에 터져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낡은 체제를 아래에서부터 하나 둘 바꾸어 나가다가 마지막에 화룡점정을 하는 것이(그 마저도 불필요할 수 있다) 다. 결국 체제의 변혁은 나중이고, 삶과 일상의 변혁이 먼저인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내 생각이고 이걸 강요할 뜻은 없다. 다만 근본적 변혁을 꿈꾼다는 이유로 소위 진보 진영에서 성골 행세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 "진보"라는 딱지는 무슨 신성불가침한 것이라서 아무나 붙일수 없는 그런게 아니라는 것만 강조해 두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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