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4. 29.

중간고사 시험문제입니다.

한 번 풀어 보세요. 중3 사회입니다.

다음은 페리클레스의 연설문 중 일부이다. 당신은 이 글을 이용해서 스파르타인에게 민주주의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다. 그런데 스파르타인은 말 많은 것을 싫어해서 딱 세 문장으로만 말하라고 한다. 당신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10: 한 문장 당 3. 작성 점수 1)

우리의 정치체제는 권력이 소수가 아니라 다수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민주정치라고 부릅니다. 우리 법은 사적 분쟁을 해결하는 경우, 모든 사람의 평등한 정의를 보장합니다. 우리는 중요한 공직을 부여할 때 출신이 아니라 능력의 탁월함만을 고려합니다. 우리는 모든 성취와 재능을 환영하고 영예를 부여합니다. 우리는 국가에 봉사할 능력만 있다면 가난하다는 이유로 정치적으로 빛을 보지 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치 생활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나 일상생활에서도 자유롭고 개방적입니다. 우리는 이웃이 자기 방식대로 살아간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해를 끼치지 않음은 물론이려니와, 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불쾌한 표정조차 드러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생활에 대해 자유롭고 관용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적인 문제에서는 법을 준수합니다.

우리는 사적인 일 뿐 아니라 폴리스의 일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자기 사업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정치문제 전반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을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라 부르지 않고 우리와 아무 관계 없는 살마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아테네인들은 민회 안에서 정책을 의결하거나 적절한 토론에 회부합니다.

가장 나쁜 것은 적절한 토론을 거쳐 결론을 내기 전에 성급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우리와 또 다른 점입니다.

문장 1:

문장 2:

문장 3:

다음의 소설을 보고 물음에 답하십시오.(10: 3. 작성점수 1)

아라키스 이야기

아라키스는 사막으로 이루어진 행성이다. 이 행성에는 프레멘이라고 불리는 사나운 종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우주에서 제일가는 단검과 광선총의 명수들이었다. 이들은 누군가의 명령을 듣는 것을 워낙 싫어해서 어떤 정부도, 법도 없이 살아갔다. 그런데 이들은 가혹한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보다도 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공격해서 그의 물을 빼앗는 일이 빈번했다. 사막에서 물을 빼앗긴다는 것은 죽음이나 다름 없었다. 사태가 이렇다 보니 프레멘들은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 무조건 공격해서 물을 빼앗았으며, 이들은 모두 단검과 광선총의 명수였기 때문에 이들 간의 싸움은 반드시 누군가의 죽음으로 마무리 되었다. 결국 아라키스 사막은 잠시도 안심할 수 없는 전쟁의 땅이 되었다.

이런 상황을 도저히 견딜수 없었던 프레멘들은 이 싸움을 막기 위해 그들이 가진 모든 물을 한 군데 모아서 거대한 저수지를 만들고, 그들 중 한 사람을 뽑아서 무아딥이란 칭호로 부르기로 했다. 무아딥은 그 저수지를 관리하며, 프레멘들은 많건 적건 무아딥이 주는 양만큼만 물을 받아쓰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이들은 이렇게 해 놓고도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과연 평화는 올까? 이들은 여전히 평화를 위협할 요소가 남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1) 아라키스 행성의 자연 상태는 어떠했는가?

2) 이들은 왜 사회계약을 맺었으며, 그 계약의 내용은 무엇인가?

3) 과연 평화는 올까? 이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다음의 대화를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10)

천재 권박사는 타임머신을 발명했다. 그리고 그 타임머신을 이용해서 기원전 5세기 경의 그리스 인을 초빙해서 21세기의 대한민국의 정치를 보여준 뒤 그 소감을 물었다.

아데이만토스: 아무리 둘러보아도 당신네 현대인(이렇게 불러도 된다면)은 민주정치가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소.

지니어스 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데이만토스: 민주정치란 무엇입니까? 다수가 권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봐도 당신들은 다수가 아니라 국회라 불리는 소수가 권력을 가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건 과두정이지 민주정이 아닙니다. 어떻게 5000만 명의 운명을 겨우 300명이 결정한단 말입니까? 우리 아테네에서는 중요한 결정을 모든 시민이 다 같이 모여서 토론을 통해 결정합니다. 그래서 민주정치인 것입니다.

지니어스 권: 300명을 당신네 시대의 귀족 같은 것으로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들은 엄연히 시민이며, 시민들을 대표하여 그 자리에 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임기는 4년에 불과해서 4년마다 시민의 심판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데이만토스: 하지만 그 심판 자체도 이미 권력을 가진 집단에게 유리하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니어스 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우 공정하게 시민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는 선거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데이만토스: 그 말씀은 결국 시민들은 4년에 한 번 씩만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나머지 날 동안에는 저 300명에게 완전히 맡겨버린다는 뜻 아닙니까? 그들이 시민들을 위해 일할지 자신들을 위해 일할지 어떻게 압니까?

지니어스 권: 우리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집회, 시위, 언론, 출판을 통해 자유롭게 여론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300명은 여론에 신경 쓰지 않으면 4년 뒤를 기약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데이만토스: 귀만 기울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니어스 권: 또한 우리는 각종 결사체나 시민단체를 구성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그 300명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또 우리 의견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귀국에 비해 손색없는 민주정치를 운영할 장치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여성도 참정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귀국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죠.

1) 아데이만토스가 자기네 나라가 대한민국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주장한 근거는 무엇인가?(3)

2) 지니어스 권은 대한민국의 민주정치는 아데이만토스의 고대 아테네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그것이 가능한 제도적인 장치로 두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들은 무엇인가?(3. 작성 점수 1)

제도 1:

제도 2:


수고하셨습니다.

2011. 4. 23.

이 사람들이 나를 뭘로 보고서?

2008년 참실련이라는 전교조내 다수파를 떠난 뒤, 한 동안 그쪽 동네와는 거리를 두고 살았다. 걸려오는 전화도 묵살했으며, 때로는 신문이나 잡지에 전교조에 대해 상당히 날선 비판의 글을 싣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 쑥스럽게도 2011년 들어 결국 전교조를 다시 찾게 되었다. 2010년 진보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가 시원하게 밀어붙여지지 않는 상황, 혼선과 갈지자 행보가 계속 이어지는 상황, 현장에서 진보교육감에 대한 실망감이 높아지는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진보적 교육자들의 유언, 무언의 압력 때문이었다. 그들의 압력을 요약하면 "이 사람아. 자네가 은둔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였다.

사실 나도 진보교육감 주변을 맴도는 전교조 명망가, 진보진영 명망가들의 하이에나 같은 모습을 보면서 위기감을 느끼곤 했다. 그들의 속셈이 너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주저하게 만든 것은 두가지였다.

1) 자칫 나 역시 저 하이에나의 하나처럼 될 지 모른다는 우려
2) 내가 서울사대 출신이라는 점
3) 더더군다나 주류 사회에서 요구하는 스펙도 모두 갖추었다는 점

특히 2)번의 우려가 컸다. 서울대 패권주의의 폐단이 가장 극명한 곳이 교육계이며, 당연히 그 중에서도 서울교육이기 때문이다. 이 패권주의는 어찌나 그 위세가 당당한지 서울대 출신인 공정택 조차 사대가 아니라 상대라는 이유로 소외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니 중앙대 출신의 유인종 교육감의 어려움이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 어려움의 빈틈을 공정택 등 동향라인이 치고 들어갔던 것이다.

어쨌든 교육감은 엄청난 권력이 있는 자리이며, 교육청은 권력의 복마전이다. 거기 발을 잘못 들여 놓으면 헛된 야심과 욕망 때문에 평생 운동가로 쌓아온 부동심도 흔들려서 순식간에 신기루 같은 권력을 쫓는 하이에나로 전락할 수 있다. 더군다나 나는 눈만 살짝 돌리면 바로 주류로 전향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다른 하이에나의 전향은 그저 손가락질만 받으면 그만이지만, 내가 전향한다면 그건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두 마리 해충이 있다면 그 중 덜 해로운 벌레를 고르라는 스피노자의 말처럼, 어차피 하이에나 판이라면 덜 해로운 하이에나가 맴돌게 하는게 더 나을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차피 권력자 주변에 하이에나가 맴돈다면, 고기 찌꺼기만 얻어먹는 하이에나 보다는 때로 전투력에도 보탬이 되는 하이에나가 맴도는 게 더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다른 하이에나들 보다는 좀 더 성능 좋은 하이에나가 될 것이라는 점은 그들조차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최근 나의 적극적인 행보에 대한 간단한 이유다. 그래서 요즘 연락 끊고 지냈던 전교조 원로님들에게 연락도 시도해 본다. 어차피 하이에나라면 그래도 투지가 남아있는 하이에나를 찾기 위해. 하지만 그들은 영 탐탁치 않은 모양이다. 마치 내가 숨어 지내다가 진보교육감 당선 되니까 슬그머니 숫가락 하나 더 얹으려고 자기들한테 "줄을 대려는 줄" 아는 모양이다. 어쩌면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나에게 투사한 다음 나를 미워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들은 진보교육감 임기내에 확대될 것이 분명한 내부형 공모교장을 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려는데, 나름 강력한(?) 경쟁자가 뛰어드는 것을 경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아끼는 지인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면서 "욕심을 감추고 있는 운동가들이 너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지나온 삶을 반점이라도 돌아본다면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의 이익과는 무관하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조금 굽히고, 조금 빈말하면 지킬수 있는 자리, 그 따위것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다. 나는 교장이 되려는 사람이 아니라 교장이라는 자리를 별볼일 없게 만들어서 아무도 교장이 안되려고 하는 그런 체제를 만들려는 사람이다. 그러니 나는 거기에 숫가락을 얹을 생각이 없다. 나는 어떤 자리를 통해 보상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보상 받는 사람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연구하고 책을 쓰는 학자이지, 자리를 차지하는 정치적 인물이 아니다. 불행이라면 그야말로 순진한 학자가 아니라 그런 정치적인 다툼을 읽고 수를 쓰는 능력이 있다는 점, 그리고 사람들은 나의 학자로서의 능력에는 관심이 없고, 저런 책사로서의 능력만 빌려 쓰려고 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은 그 능력을 빌려 쓰고는 즉시 나를 외면하곤 했다.

참실련... 내가 그들을 박찼다고 해서 그들은 나에게 원망해선 안된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없다. 2005~2006년 교찾사의 강경노선이 조합원들을 염증나게 하고 정치투쟁 위주의 전교조에 염증을 느낀 조합원들이 대거 이탈할때 "전문성, 대안"이라는 새 프레임을 들이 밀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들은 기억해야 한다. 내가 피땀흘려 쓴 수십쪽의 문건을 전교조 원로분들이 자기들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을 용인한 것은 그 문건을 바탕으로 새로운 전략을 세워서 참신한 집행부가 들어서길 바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 글만 훔치고, 내 글의 정신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교원평가라는 외통수를 빠져나갈수 있는 "대안적 교원평가 모델 개발"이라는 수를 제시했고, 실제 그 모델을 개발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모델을 개발해 놓고는 "교원평가 수용론이냐?" 하는 교찾사의 공세가 두려워 그걸 감추었다(그들은 정작 교원평가가 법제화 되자 그제서야 우리도 대안이 있다 하면서 들이밀었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대안을 들이 밀어도 그건 노무현 정부때 들이 밀었어야 했다). 그러고도 내가 그들과 함께 하리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너무 뻔뻔한거다. 내가 그들 집행부에서 얼마나 큰 내상을 입었는지 저 무심한 원로들은 알지 못하리라.

그래도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 분노와 원한을 누르고 연락을 해 보는 것이다. 그들의 싸늘한 반응이 과연 나에게 무슨 영향을 줄까?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한다. 나는 지금 바쁘다. 지금은 엄청나게 빠른 행보를 가져가야 할 때다. 내가 그들에게 연락하는 것은 이 중요한 시기에 조금이라도 더 힘을 모으기 위한 절박함 때문에 나의 자존심을 굽히는 것이다. 나의 몇년만의 생뚱맞은 연락을 반갑게 맞이하는 분들은 함께 짐을 지는 것이며, 그렇지 않은 분들은 설득할 시간이 없으니 두고 가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전교조 원로 선배들에게 해직과 고난의 보상을 교장 한번 되어 보는 것으로 받을 생각 말고, 교장이라는 블랙홀을 해체하는 것을 통해 받자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싶다.

2011. 4. 19.

뭐가 정책 홍보고 이념 선전이라는 것일까?

동아일보 기사 타이틀의 요염함이 이제는 조선일보를 능가하는 것 같다. 게다가 그 창조성은 조선일보는 물론 H학교의 S교수마저 능가하고 있다. 그 압권을 보여주는 기사가 바로 "이념교육장 된 4. 19 민주 올레" 라는 기사다.

이것도 법적으로는 신문이니 저작권은 존중해 주기 위해 본문은 링크 걸어준다. 하지만 저들 트래픽 늘려줄 필요 없으니 굳이 저 링크로 들어가지는 말고 나의 요점정리를 보기 바란다.


이 기사의 요점은 이렇다.

1. ‘4·19 민주올레’가 서울시교육청 주최로 16일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렸다.(이건 단지실 기사)

2.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여러분의 교육감 곽노현”이라고 스스로를 소개..... 중고교생 900여 명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행사장이 이승만 대통령 하야에 큰 역할을 했던 교수단 시위대의 출발지라며 행사의 의미를 설명했다.(여기까지도 사실 기사... 그리고 4.19에 대해 보편적으로 동의하는 내용)

3. “지금 같은 자유롭고 풍요로운 시대는 목숨을 내던지며 독재에 맞선 4·19혁명 열사들이 만든 것입니다........ 오늘 체험학습으로 서울 곳곳에 있는 4·19혁명의 정신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혹시 이걸 보고 이념 교육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하긴 이념교육이긴 하다. 민주주의도 분명 이념이니까. 그렇다면 동아일보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가르치지 말라는 뜻일까? 아니 언제부터 이념=나쁜것 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아마 유인촌이 자주 그런 표현을 한 것 같은데, 이념=나쁜것이라는 정치적 신념 역시 이념이다. 그리고 모든 공교육은 이념을 가르친다. 모든 시민, 교사, 학생은 나름의 정치적 이념이 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념 중 민주주의는 가장 보편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이념이다. 설마 이걸 가르치지 말라는 것인가?

4. 이어 곽 교육감은 “민주올레를 만든 분”이라며 이해찬 전 국무총리를 소개했다. 이 전 국무총리는 “효자동은 이승만 대통령이 학생들에게 총을 쏴서 100여 명이 죽어간 곳입니다. 요즘 중동에서 사람들 많이 죽는 것 봤죠? 그게 우리나라에서 시작됐습니다”라고 말했다.
행사 전에 곽 교육감은 “4·19 올레를 개발한 민간단체가 친노 단체라는 이유로 이 행사를 비난하는 건 헌법정신 계승을 위한 교육활동을 비난하는 겁니다. 헌법정신이 정치색?”이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여기서 슬슬 색깔이 나오네)


아하, 이제야 본색이 나온다. 결국 전 국무총리가 이 행사를 주관했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이건 정말 생트집이 아닌가? 보수애국(?) 단체의 천조국인 미국을 가 보라. 전직 대통령, 전직 부통령, 전직 국무장관이 지역사회에서 얼마나 열심히 청소년 교육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 이런 식이라면 오바마를 만나러 고등학생 대표가 백악관 들어가는 것도 티파티 등 보수단체에서 반대시위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공산주의같은 특정 이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악과 동일시 하는 시대가 지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동아일보의 이념자는 공산주의 수준도 아니고 "노무현"이다. 그들의 이념자는 "노무현"에 얼마나 가까운지로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노무현이 무슨 지하 게릴라 우두머리였나? 합법적인 전직 대통령 아닌가? 합법적인 전직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한 합법적인 전직 국무총리가 청소년들을 위해 봉사하면 박수는 치지 못할망정 무슨 이 해괴한 행패란 말인가? 이거야 말로 대한민국을 그리고 대한민국의 헌법을 자기들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송두리째 부정하는 이념적 패륜이 아닌가?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는지 동아일보는 이렇게 변명한다.

5. 지난해 이 행사를 시민단체인 ‘시민주권’(대표 이해찬 전 국무총리)이 진행하면서 반정권 성격의 집회로 흘렀고......학생 참여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음을 의식한 내용이다.

위의 곽교육감의 트위터로는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있었음을 알수 있을 뿐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는 없다. 오히려 이렇게 한심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말이죠 로 읽을수도 있다. 도대체 이렇게 교묘하게 사실을 호도하는 기사쓰기를 어디서 배웠는지 궁금하다.

6. 시교육청은 최근 학생들의 행사 참여를 창의체험활동으로 인정한다는 공문을 서울시내 일선 중고교에 보낸 바 있다.

이게 뭐 그리 신기한가? 이거 말고도 다양한 창의체험활동이 인정된다. 그나마 봉사활동 점수도 안주는 이 행사는 차라리 솔직하다. 그냥 가족행사, 가족여행도 인정되는 창의체험활동인데, 이걸 국가의 헌법 전문에 나오는 사건 현장에 바로 그날 모이겠다는데 당연히 인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걸 가지고 시비거는 신문은 대체 어느 나라 신문인가?

7. 이 전 총리 다음은 학생의 자유발언 시간. 경기도에서 왔다는 여고생이 무대에 올라 곽 교육감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그는 “곽 교육감님은 누구보다 학생 인권과 복지를 위해 애써주시는 분이다. 김상곤 교육감과 추구하는 정책이 비슷해 좋아한다”면서 호소했다. “입시 위주가 아닌 재능과 적성에 따라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세요. 체벌을 금지했지만 끝이 아닙니다. 아직도 감정적으로 학생을 때리는 선생님들이 계시니 지속적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야자(야간자율학습)도 자율이라지만 아직도 타율로 운영됩니다. 주민발의 중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서울학생인권 조례안도 시행될 수 있게 애써주세요. 교육감의 성향에 따라 지역별로 정책이 다른데 교육감님이 설득해 주세요.”

이건 학생의 발언이지 교육감의 발언이 아니다. 그런데 신문 기사 제목은 교육감이 자기 정책을 선전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정말 놀라운 상상력이다. 아마 이 여고생이 교육감이 되어 있는 미래라도 상상한 모양이다. 게다가 이 여고생이 김상곤, 곽노현을 동시에 언급하니 얼씨구나 하고 인용한 모양이다. 그런데 감정적으로 학생 때리는 교사 없애 달라고 호소하고, 학생인권조례 응원하고, 야간자율학습 강제하지 못하게 해 달라는 호소가 그렇게 못 들을 말인가? 이 기사 쓴 기자의 자녀부터 밤새도록 매 때려가며 공부시키는 그런 학교에 보내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이 대목에서도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다.

8.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공원 앞에서는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와 라이트코리아, 부모마음교육학부모회 등 6개 단체가 규탄 시위를 열었다. 이들 단체는 “민주올레 행사는 곽 교육감이 특정 정치세력에 이념교육의 장을 열어준 관치 동원”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이 행사가 특정이념교육이라는 근거는 딱 여기밖에 없다. 특정 단체가 그렇다고 주장했다는. 그렇다면 "이런저런 단체들이 이 행사를 이렇게 비난했다"가 기사 타이틀이 되어야 마땅하지 어떻게 이 행사가 이념교육장이 되었다고 쓸 수 있는가?

아하 그 비밀을 알았다. 저 뉴라이트 단체들이 자기들 이념 선전하러 학생들에게 위협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4.19 민주 올레 행사가 이념교육장이 되었다는 기사 타이틀은 정당하다. 저 단체들이 바로 이 행사를 이념 교육장으로 만들었다. 비록 학생들의 반응은 썰렁해서 교육 효과는 없었지만. 이런 취지로 썼다면 이 기사는 문맥이 다소 오해의 소지는 있지만 제목과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걸 게임계에선 이렇게 말한다. "팀 킬"

9. A고 교사는 “강제동원이 아니라지만 학생에게 창의체험활동 4시간 인정은 엄청난 매력”이라며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앞두고 자신의 정책 홍보를 제대로 한 게 아니냐”고 말했다.

이 교사가 누군지 궁금하다. 아마 교사가 아닌 모양이다. 어차피 수업 안하고 이런 저런 활동하는 토요일에 창의체험활동 인정이 뭐 그리 엄청난 매력이겠는가? 오히려 학교 수업보다 늦게 끝나는데? 차라리 봉사활동시간 4시간 인정이 훨신 더 큰 매력이라는 걸 3년 이상 경력의 교사는 다 안다. 아마 저 자는 교사를 참칭한 뉴라이트 회원이거나, 뉴라이트 하다가 교사자질이 훼손된 자이거나, 교직 감각이 둔해진 교감, 교장일 것이다.


어쨌건 이 기사는 참 재밌는 기사다. 이념교육의 장이 되었다는 근거는 기껐 몇몇 단체의 주장에서 인용하고, 정책홍보로 흘렀다는 주장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느 교사의 멘트에서 따 오고, 정작 행사 스케치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다. 이런 식이면 대통령이 사대강 행사할때 누군가가 "이명박은 친일파다"라고 집회하면 타이틀도 "친일 행사로 흐른 사대강 행사" 이렇게 되어야 할 지경이다. 그리고 행사 참석자들 중 누군가가 "일본에 대한 홍보는 제대로 했다"라고 말하면 부제로 "일본 홍보에 열중해"가 붙어야 할 것이다. 요즘 동아일보가 정말 많이 망가졌다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졌을 줄은 몰랐다.


출근길



우리 학교 아이들의 유난한 헤맑음의 원인은 둘인것 같다. 아름다운 학교 풍광 그리고 군것질할 매점이 반경 1킬로내에 없다는것.
복지란 물질을 제공하는게 아니라 삶을 아룸답게 해주는 것임을 다시 느낀다. 송파지역 주민들은 참으로 복받은 사람들이며, 공원으로 감싸인 우리학교 아이들도 복받았다. 이런게 복인데 왜 학부모는 엉뚱한걸 찾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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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4. 17.

교육희망선언

2007년 5월 전교조 전국교사대회때 전교조 위원장(당시 정진화) 이름으로 발표된 선언문입니다. 사실 작성자는 정진화 위원장이 아니라 저입니다. 이제는 꽤 시간이 지났으니 원작자를 공개해도 될듯 합니다. 그 당시 전교조 지도부는 이 글을 낭독은 했으되, 뜻은 새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교육희망 선언

교육은 원래 희망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가 어려운 지경에 빠질 때마다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희망을 찾으려 했다. 나폴레옹에게 초토화가 된 독일인들은 군대를 키우는 대신 학교를 세웠고, 일제의침략을 받던 우리 선조들은 “청년학도”에게 미래의 희망을 걸었으며, 마침내 우리는 교육의 힘으로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의폐허를 딛고 다시 일어 설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희망이 되어야 할 교육이 어느 새 절망이 되고 있다.학부모들은 희망도 신념도 없이 늘어만 가는 사교육비에 허리가 휘고, 아이들은 끝도 보이지 않고 의미도 찾을 수 없는 무지막지한입시교육에 시달리며 몸과 마음을 상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신뢰를 잃어버린 공교육과 교사들은 거의 공공의 적이 되어 온국민의 질타를 받고 권위마저 상실해 심지어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구타당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최근 들어 많은 학자들이 올바른 교육을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민주주의를완성할 수도, 지식·정보사회의 성장 동력을 키울 수도, 구성원들에게 공감과 행복을 줌으로써 공동체의 유대를 이룩할 수도 없다고입을 모으고 있다. 그러니 미래의 희망이 되어야 할 교육이 그리고 그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절망적상태에 빠지고 있다면 이는 단지 교육만의 절망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절망이다.

그러나 우리 교사들은 이러한 절망 앞에 그저 탄식하거나 냉소할 수 없다.교사들은 미래의 희망을 키우는 책무를 가지고 있다. 일찌기 뒤르켐은 학교는 새로운 시대의 성전이며 교사는 사제라고 하지않았던가? 우리는 이러한 장엄한 책무를 무거우면서도 자랑스럽게 받아들인다. 아울러 우리는 이러한 책무와 자랑을 바탕삼아 절망적인상황에서도 오히려 교육 희망의 꽃을 피우고자 하며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오늘날 한국 교육의 절망을 만들어내고 있는 첫 번째 이유는 교육 그 자체에 대한 목적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배우는 학생들도, 그 부모도, 심지어는 가르치는 교사들조차 교육 그 자체의 목적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틈을입시교육이 파고들어왔으며 모든 교육 고통, 교육 절망의 원인이 되었다. 당연히 가르치는 자가 이러한 사태에 책임이 큼을 통감하며바람직한 공교육의 패러다임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밝혀내고자 하며, 이를 학생, 학부모와 공유하고자 한다.

2. 오늘날 한국 교육이 절망을 만들어내고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아이들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교사도, 학부모도, 또 정부도 저 마다 좋은 교육이라고 내세운 것들이 추가 될 때 마다 오히려 학생들의 고통은 가중되고 있다.이는 결국 정작 배우는 아이들의 입장이 철저히 배제된 탓이다. 이에 우리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필요와 성장에 기여하고,인권을 보호하며 그들에게 행복한 교육, 희망의 미래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라는 구호아래 복지중심의 교육 패러다임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3. 오늘날 한국 교육이 절망을 만들어내고 있는 세 번째 이유는 교육이 사회 양극화의 도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한때 교육을 통해 열려있었던 계층이동의 희망은 굳게 닫혀버렸다. 이제 교육은 기존의 계층장벽을 더욱 확고히 하는 수단이되어버렸다. 소득에 따른 교육기회 격차는 점점 커지고 있으며, 당연히 산출의 격차도 커지고 있다. 이는 교육이 저소득층 아이들의희망을 시작부터 절망으로 바꾸고 있는 형국이다. 이에 우리는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이 타고난 계층과 관계없이 평등하게 질 높은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다.

4. 오늘날 한국 교육이 절망을 만들어내고 있는 네 번째 이유는 정부가 교육을 수단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지금 정부의 교육정책은 수월성과 인간자본론에 치우쳐 있다. 이는 교육받는 아이들의 삶의 질과 행복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그들을노동력으로만 교육은 상품으로만 간주하는 비인간적인 관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정부의 잘못된 교육정책을 바로잡고 올바른 교육복지수립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이다.

5. 오늘날 한국 교육이 절망을 만들어내고 있는 다섯 번째 이유는 교육 주체들 간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교육 주체들 간에 바라는 바와 필요로 하는 바가 서로 다를 경우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교육 현장은 서로가서로에게 불만인 상황이 되고 말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 학교 현장은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며, 이를 보장할 제도도 마련되어있지않다. 우리는 학생, 학부모와 적극적으로 소통할 것이며 이를 가로막는 모든 제도적 장벽의 철폐를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희망을 생산하고 행복을 제공하는 교육의 힘을 믿는다. 또한 이러한힘과 함께하는 교사들의 책무와 능력 그리고 긍지를 믿는다. 우리는 우리에게 지워진 긍지와 책임을 바탕으로 교육을 통한 21세기의희망을 창출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할 것이며, 이를 통해 아이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제공할 것이다.

디지털 교과서에 대해 썼던 칼럼

최근에 아이패드나 태블릿 피시에 교과서 내용을 담아두는 것이 과연 교육적인가를 놓고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논란은 2007년에도 있었다. 그래서 옛날에 이런 주제로 국민일보에 칼럼을 썼던 기억이 나서 뒤져보니 아직 원문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여기에 잠시 옮겨 본다.

(당시 칼럼)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공부다

교육인적자원부의 디지털교과서 사용화 계획을 놓고 논란이 분분하다. 한쪽에서는 디지털 교과서가 어디서나 학습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학습 환경을 제공하고, 학생들의 흥미와 학업성취도 향상시키며, 풍부한 학습 자료를 손쉽게 제공해 사교육비를 경감한다고 한다. 다른 쪽에서는 검증작업 없이 성급한 진행, VDT증후군, 인터넷 중독증 등의 신체적 정신적 위해 등을 이유로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 찬반 논거들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보도가 되었으니 새삼 재론하지 않겠다.

여기서는 디지털 교과서에 숨어있는 공부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따져보려 한다. 그 동안 공부는 주어진 시간에 많은 답을 구하고 암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른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똑 같은 시간에 더 많은 답을 알아 낸 학생이지, 답을 알아내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 학생이 아니며, 하물며 즐겁게 답을 찾는 학생도 아니었다. 과정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오히려 답을 구하는 과정이 짧으면 짧을수록 그것은 효율적인 것이며 더욱 좋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디지털 교과서는 답을 구하는 과정을 최소화 시키거나 사실상 제거해 버렸다는 점에서 이런 왜곡된 공부관의 극치다. 디지털 교과서는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답을 그것도 시대 변화에 따라 업데이트 해 가면서 학생들에게 주입할 수 있는 최적의 도구다. 하지만 클릭만 하면 답이 즉각 나오는 디지털 교과서, 지식을 만들어가고 찾아가는 과정을 모조리 컴퓨터에게 맡겨버리고 빨리빨리 답만 찾아가는 디지털 교과서가 향상시켰다는 학습효과가 학생의 정신적, 신체적 위해까지 감수하면서 얻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개발진들은 이 교과서가 답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솔루션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답을 찾는 이미 정해진 방법과 절차를 제공하는 것은 자기 주도적 학습이 아니라 사실상 답만 제공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공부란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공부는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며, 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 문제 해결력은 모니터를 주시하는 고독한 학습에서 얻어지지 않으며, 동료, 교사와의 협력, 토의, 상호비판의 과정을 통해 얻어진다. 이 과정 속에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것 까지가 문제 해결력이며 공부다. 모니터만 주시하고 가끔가다 메신저로나 생각을 주고받는 교실에서는 이런 경험을 기대할 수 없으며, 어떤 학부모도 이런 교실에 자녀를 보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는 러다이트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정보화 기술이 학생들에게 유용한 학습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이를 적극 활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보화 기술이 모든 학습과 공부를 획일적으로 포괄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마틴 셀리그만은 고대 그리스인이 우리보다 더 뛰어난 지식과 지혜를 가졌다고 단언했다. 정보기술의 홍수 속에 사는 현대인이 기껏 석판이나 도자기에 글자를 새긴 고대인보다 더 지혜롭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조금 달라진 생각)

그런데 최근에는 이 칼럼을 썼던 당시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일단 아이패드 같이 스스로 작용하는 도구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이다. 하지만 그 도구가 킨들 같이 그야말로 전자책 기능에 충실한 것이라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아이들 가방 무게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 같고. 하지만 교육에서 계속해서 편리와 효율을 추구하다보면 매우 중요한 것을 잃게 된다는 것, 그리고 교육은 솔루션을 제공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화가 없다.

그렇다면 역시 교육은 아날로그적인 것이 원칙일 것이다. 디지털은 다만 물리적인 한계나 부담을 줄이는 정도로 한정지어야 할 것이다.


몇 년 전에 썼던 참실련 탈퇴의 변

아직도 제가 참실련에 미련이 있는 걸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참실련의 몇몇 친우들과의 우정만이 남아있지, 참실련이란 정파 자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문득 2007년(8년이던가?) 엄청나게 긴 성토의 글을 남기고 참실련을 탈퇴했던 기억이 나서 옛 폴더를 뒤져 봤더니 그 글이 아직 남아 있네요. 일단 옮겨 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전교조, 혹은 유일한 희망
이 글은 여기 계신 분들의 심기를 몹시 거스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참에 아주 매장될 수도 있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이 글을 씁니다. 제 생각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글은 저 자신을 속이는 글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은 운동을 운운할 자격도 없는 법이죠. 제가 전교조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은, 바로 이 집행부가 스스로를 속이는 자가당착에 빠져있기 때문이며, 그 악순환의 고리를 이미 곪을대로 곪은 이 조직에서는 더 이상 끊을 수 없으리라 보기 때문입니다.
조금 지루하겠지만 제 옛날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저는 원래 조직 중심부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분회장이었습니다. 다만 전교조가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비판의 글을 간혹 쓰곤 했습니다. 그 글을 한국교육연구소에서 알게 된 심모 선생님이 가끔 참교연 카페에 어느 현장 분회장의 쓴소리라는 이름으로 올리곤 했습니다. 나중에 참교연에 가입한 뒤 그 글에 대한 반응을 보니 뜨끔하다, 찔린다, 떨린다등등이었습니다. 참교연에 가입한 뒤에도 지금까지 전교조 운동의 관행을 비판하는 글을 왕왕 올렸었고, 그러다가 이모 선생님, 김모 선생님, 황모 선생님, 그리고 중학교 때 은사님인 윤모 선생님 등 여러분이 저를 만나기를 희망하셨고, 몇 차례 접촉하면서 저의 문제의식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드린 이야기를 요약합니다.
.......교실에서 교육 실천과 전문성으로 말하지 못하는 교육운동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처음 전교조 창설 했을 때 시민들의 반응은 오죽 했으면 선생님들이 이렇게 데모까지 하겠느냐?” 였습니다. 즉 교실에서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에 거리에서도 지지를 받았던 것입니다. 지금은 선생들이 왜 거리에서 지랄들이냐?” 입니다. 교실에서 이미 배척받은 이상 거리에서 무슨 짓을 하건, 농성을 하건, 아니면 국회를 폭파를 하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교조는 교사들의 전문성을 지원하고 학생들의 올바른 성장의 권리를 보장하는 그런 단체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리고 투쟁의 방법도 농성이나 시위는 최대한 아끼고 대신 시범수업과 논문과 각종 심포지움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연구와 교육실천활동이 잘 조직되어야 하고 전교조는 가장 부유한 시민단체로서 이러한 연구와 교육활동을 지원해야 합니다. 이런 실천들이 누적되어서 전교조 교사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참 잘 가르치며, 교육의 방향을 잘 제시한다.”라는 평판이 다시 살아난다면, 그때는 가두가 아니라 청와대를 점거해도 욕먹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는 오죽하면 저 선생들이 저러겠어?” 하는 말이 들릴 것입니다.....
대략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그때 이모 선생님이 권선생과 만나고 나서 다시 활력이 돈다.”, 혹은 황모 선생님이 이제 뭔가 해 볼만하다는 자신이 생긴다.”는 말씀을 하실 때 전교조 가입한 1992년 이래 가장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찌어찌 하다가 본부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본부 전임을 완강히 거부했었습니다. 다만 교사들의 교육학을 수립하기 위해 학술지를 발간하는 일이 긴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정도 일이야 현장에서 맡을 수 있고, 본부에는 제 연봉 절반만 주어도 일 잘할 사무직원을 두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 집행부가 참교육 사업을 중심에 둘 것이라 강조하고 있고, 이를 위해 연구역량을 강화하는데 관심이 많다고 들었으며, 또 힘만 빠지는 각종 농성, 시위, 연가투쟁만 하고 도통 교육에는 어떤 비젼도 지원도 없는 전교조의 한심한 모습에 염증을 느낀 교사 대중들의 표를 가벼이 여기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결국 전임노릇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습니다. 남는 것은 회한과 원망 뿐입니다. 이런 조직에 내 힘을 보태는 것이 너무 싫습니다. 어느 왕년 활동가가 내 아이가 내가 전교조였다는 것을 잊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뼈 속 깊이 다가왔습니다.
참교육? 아이들의 행복을 위한? 죄다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포장은 화려합니다. 아이들 건강도 세우고, 교육희망도 세우고.... 그 정책을 수립하느라 고생하신 선생님들의 노고는 제가 옆에서 직접 봐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 건강도, 교육 희망도 누가 세웁니까? 일선 교사들입니다. 뭘 가지고 세웁니까? 수업입니다. 그럼 그 수업은 무엇을 가지고 짭니까? 교육학입니다. 기성의 교육학으로? 그건 안 되죠. 지배자들의 손길에서 아이들을 자립 시킬 수 있는 참된 교육학을 세워야 합니다. 어떻게요? 공부하고 토론하고, 실천하고 다시 피드백 하면서 해야 합니다. 이게 과연 얼마나 걸릴까요? 하루 종일 연구하고 연구해도 평생을 거의 걸어야 할 일일 것입니다(여기 카페 선생님들 중에는 이 평생을 걸어야 할 원점부터 교육학 다시 세우기 작업에 동참하신 용감한 분들이 계십니다).
이 고단한 작업은 지난 20년간 전교조 운동에 대한 통절한 비판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왜 비판해야 하냐고요? 20년이 지났음에도 아이들의 상황은 오히려 최악이고 사교육비는 하늘을 찌르고 교사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전교조는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습니다. 더더군다나 전교조 교사들은 보통 교사들보다 특별히 나을 것도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고, 참교육은 공허한 구호로 전락했고, 그것을 실천하던 선생님들의 동력은 각종 출판사와 교육청에 다 흡수되고 말았습니다. 사정이 이런데 지난 20년을 비판하지 않고, 지난 20년을 회고하면서 뿌듯해 하면서 무용담이나 자랑하고 있다면 그는 선생의 자격도 없는 자입니다. 오히려 난 참 열심히 운동했다. 그런데 왜 이 모양인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원점에서부터 다시 고민해야겠다.” 이래야 이게 제대로 된 선생입니다.
이런 고민들을 이미 많은 조합원들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지난 선거 압승의 동력입니다. 그리고 많은 조합원들이 그런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 집행부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뭐든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옛날부터 해왔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관행적으로 진행되는 일들은 모두 정지하고 따져 보아야합니다.
농성, 집회? 그 동안 이런 거는 수없이 많이 해오지 않았나요? 그거라면 오히려 한 수 위인 교찾사가 난리 버거지도 수없이 쳤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마다 상황은 악화되었습니다. 전교조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게 교찾사의 시위, 농성이 과격해서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도통 교실에는 관심 없고 걸핏하면 밖으로 기어 나와 뻘건 조끼 입고 하늘에 주먹질이나 하는 모습이 전혀 선생답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공청회 장을 난입하건, 아니면 천막 속에 멍거니 앉아있건 선생답지 못하긴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과격한 데모건, 덜 과격한 데모건 간에 말입니다.
참실련은 다만 순한 교찾사!” 누군가가(아마 2번진영의 누구였던듯)붙여 준 이 쪽팔리는 칭호, 이게 딱 현실을 한 마디로 보여주는 말임을 느꼈습니다. 어떤 결의 과정도 없이 마치 교육청에서 학교별로 과제 시달하듯 농성이 있다고 전달됩니다. 그러한 농성의 이슈에 동의 하는가 마는가는 아예 전제되어버립니다. 본부에서 일 하면 개인의 생각과 소신은 없는 것입니까? 우리가 옛날에 6월 혁명을 일으켰을 때 거리에 왜 나갔고, 명동 성당에서 왜 농성을 했습니까? 총학생회가 시켜서? 당번을 정해서? 당번을 정해서 해야 할 정도의 농성이고 시위면 이미 그건 날 샌 싸움입니다.
정말 그 이슈가 절절하고, 그 싸움에 동참함이 그야말로 시대의 의무처럼 다가온다면 당번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의기 넘치는 자는 앞장서고, 참여하지 않은 자는 지금 저처럼 적반하장 하는 것이 아니라 죄책감과 수치심에 잠자리를 뒤척일 것입니다. 비합법 시절에 가입은 못하고 후원회비만 걷어서 주면서도 못내 미안해하던 그 선생님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농성에 불참했다고 부끄러워하는 조합원은 심지어 본부에서조차 본 적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전임자들은 교육부에서 옛다, 전교조 마음대로 각 시도별로 학교 하나씩 정해서 참교육 해 봐라!” 할 때 정말 그걸 할 수 있을 만큼의 참교육 요원이 없다는 현실에는 자괴감들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조합원들도 조합 탈퇴하겠다는 말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도대체 이 집행부가 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무엇이었고, 조합원들은 왜 찍어주었습니까? 집회 시위를 좀 순하게 하는 것이 학생과 학부모에게 다가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공부하고 가르치는 그 기본적인 선생의 일. 이것을 충실히 하고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승부 걸겠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새 조직 이름도 참실련 아닙니까? 이건 참교육 사업을 여러 사업 중 하나로 두는 게 아니라 참교육 사업을 중심에 두고 나머지는 그것을 지원하는 역할이라는 의미 아니었습니까? 참실련이 참교육도 가끔 실현 하려고 하는 연대는 아니지 않습니까?
진보는 미래의 희망을 보여주지 못하는 한 설 땅이 없습니다. 진보는 따라서 미학적인 개념입니다. 진보적인 교육운동이라면 미래의 희망적인 교육의 상, 아름다운 교사의 상을 보여주고 바로 지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지금 젊은 교사들을 데리고 전교조 본부에 와 보십시오. 그리고 10여년 뒤 닮고 싶은 선생님이 있는 지 꼽아 보라고 하십시오. 자신 있습니까? 금연 건물을 자욱하게 채운 담배 연기 속에서 젊은 교사들에게 ! 너도 나이 먹거든 이렇게 되어라!” 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젊은 교사가 , 나는 언제 저렇게 되나?” 하며 부러워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니 본부 뿐 아니라 전교조 전체를 통틀어서 젊은 교사들에게 자신있게 보여 줄 간판 스타급교사들을 몇이나 확보하고 있습니까? 아니 그런 일에 관심이나 있었습니까?
2001년 까지만 해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꾸자꾸 투쟁가들에 의해 소외된 그 분들은 지금 전교조에 사실상 마음의 문을 닫았습니다. 연구역량 결집하려고 그런 분들을 접촉하고자 하였으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여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저의 능력부족이기도 하겠지만....전교조에서 빠져나갈 타이밍만 노리고 있는 교과연합들을 보면서, 그리고 그 사태에 전혀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지도부를 보면서 혼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사실은 한 번이군요).
다들 저더러 튀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전교조 교사는 늘 학교에서 튀는 교사였습니다. 그 튀던 분들이 이제는 경직되어 다른 튀는 동료를 억압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도서관으로 대학으로 출판사로 돌아다니지 말고 할 일이 없어도 사무실에 짱 박혀 있으라고 합니다. 갑자기 집회, 시위, 농성 생길지도 모르니 5분대기조 처럼 말입니다. 이건 바로 댁들이 그토록 욕해마지 않았던 원영만 집행부의 운영방식 아닙니까?
오히려 제대로 정신 박힌 운동단체라면 본부에 박혀 있지 말고 밖으로 좀 나가라고 등을 밀어야 할 겁니다. 에컨대 편집실장! 당신은 발로 취재해야 할 것 아니야? 그리고 광고도 직접 다니면서 따 와!”, “대협실장! 대협실장이 대내협력실장이야? 나가! 대외 협력을 해!”, “사립위, 초등위 등등. 이 건물에 사립학교, 초등학교가 있나? 나가서 직접 대중들을 만나!”, “연구소! 학술단체, 도서관, 대학으로 뛰지 못하겠어?” , “조직실장! 우리 조직이 서울에만 있나? 당장 지부로 지회로 돌아다녀!” 등등 말입니다. 그럼 본부에는 누가 남나요? 아침에 간단하게 메신저 등으로 미팅 한 뒤 현장으로 불나게들 뛰어 나가면 본부에는 사무처, 기관실만 남겠죠. 선생님들 수업하러 가고 텅 빈 교무실에 교감만 남는 것 처럼 말입니다. 사무처, 기관실은 곳곳에서 자기 영역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지원하고 그들 사이의 업무를 조정하고, 연락체계를 관리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살아있는 조직이고, 이게 창조적인 운동을 만들어 내는 조직의 모습입니다. 불행히도 이런 조직의 모습은 이미 개발원, 평가원, 그리고 신자유주의자들이 먼저 선점했습니다. 이 낡은 관료제 조직으로 그들을 당할 수 없습니다.
, 이렇게 말했더니 다들 그 말 자체는 옳다는군요. 그런데 그건 너무 이상적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군요. 옳은 말이고 이상적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거 많이 들어 본 말 아닙니까? 교장, 교감한테 말입니다. 걸핏하면 시기상조 운운하던 보수언론한테 말입니다. 어쩌면, 어느새 이렇게 닮아버렸단 말입니까?
정작 참교육을 세워야 할 사람들은 기껏 농성장의 대가리 하나로 취급하면서 참교육 운운하는 정책안은 빨리 만들어내라고 독촉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정책안이 나와도 그걸 수행할 일선 교사들이 없고 그걸 뒷받침 할 교육학적 기반도 없습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본부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선국면용이랍니다. 할 수 도 없고, 할 의지도 없는 참교육 실천을 대선 국면 때 선전용으로 구두선만 늘어놓겠다는 것입니다. 화려한 문서 만들고 기자회견 팡팡 하면서. 이런 위선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말이 생각납니다. 어느 열렬 조합원이 교장하고 싸우는데 교장이 당신의 모습은 활동가 같고, 선생 같지가 않다.”라고 했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활동가인데 그 영역으로 선생을 골랐습니까, 아니면 선생인데 제대로 선생질 하기 위해 모여서 활동가가 되었습니까?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선생입니다. 그것도 미래형 선생의 모습을 늘 보여주려는 그런 선생입니다. 그래서 참교육을 단지 구두선으로만 여기고, 실상은 20년간 늘 하던 대로 그냥 굴러가려는 지금 전교조의 모습을 견딜 수 없습니다.
아무 의욕도 없고,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전임기간이 끝나서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고 전임 기간이 끝나면 아마 저는 조합을 탈퇴할 것입니다. 전교조의 핵심에서 지낸 한 달 만에 제가 전교조 조합원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몸을 둘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해직까지 당하시고 고초를 겪으셨던 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정말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실 것입니다.
지금 전교조는 난파하고 있습니다. 여론이 조금 호의적으로 바뀌긴 했지만, 그 착한 말들이 알고 보니 모두 구두선에 불과했음이 밝혀지는 순간, 시쳇말로 뽀록나는 순간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럼 결국 이런 저런 현안 투쟁 줄줄 따라다니다가 또 조합원 줄고, 그렇게 한 5년 뒤에 자연사 하는 겁니다. 요행히 살아남아도 이미 운동의 생명은 끊어지고 관행적인 이익단체 하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난파선에서도 침몰하기 직전까지 선장, 항해장, 갑판장은 자기들의 명령권이 훼손될까봐 다른 배에 SOS를 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미련덩어리, 이제 끊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미 마음에서 지웠습니다. 죄송합니다.
, 제목에 있는 유일한 희망은 뭐냐고요? 바로 미련을 끊을 수 있다는 것이 희망입니다. 미련을 끊어야 출발이 가능하니까요.

새로운 시대의 교육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아 출항합니다

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