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는 죽은 개가 아니다.

2년전에 구 블로그에 썼던 글을 옮겨 옴

요즘 한국에서 나름 좌파입네 하는 그러면서 동시에 지식인입네 하는 사람들의 유행중 하나가 하버마스 개무시하기다. 사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 전반에 대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은 무시보다는 무지가 적당한 표현이겠지만, 이런 저런데서 30쪽 정도에 비판이론 뭉쳐놓은 소개글 정도 읽고 대충 알았다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물화된 문화의 이데올로기적 억압을 예리하게 분석하였으나, 결국 비관론, 정적주의로 흘렀다." 이 한줄에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프롬, 마르쿠제, 하버마스를 몽땅 집어넣고 다 알았고 이미 극복했다고 여기는 것 같다. 특히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포스트구조주의 계열 이론에 집착할수록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해진다. 그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동일성을 프랑크푸르트 학파라는 이름아래 부여하다니, 자기기만이다.

그러나 영미권에서의 저항사상을 리뷰하면 할수록, 아니 프랑스 이외 지역의 저항사상을 리뷰하면 할수록 프랑크푸르트학파, 특히 그 중에서 아도르노와 하버마스의 그림자가 엄청나게 크게 펼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미국 좌파사상의 대부인 프레데렉 제임슨, 사파티스타 전도사인 홀러웨이에게서는 아도르노의 냄새가 펄펄난다. 파울루 프레이리, 마이클 애플, 헨리 지루는 한 눈에 마르쿠제와 하버마스의 영향이 느껴진다. 흔히 들뢰즈 주의자로 오해받는 안토니오 네그리는 실상 본인도 밝혔지만 하버마스에게 많은 빚을 졌으며 하버마스의 취약지점을 푸코의 신체 이론(삶-정치이론), 그리고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스피노자 정치철학으로 채워나간다. 네그리는 비물질노동, 지식정보시대의 토대를 분석한 맑스주의자이자 비판이론가지 결코 탈근대 사상가가 아니다.

특히 일반론적 철학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학의 영역에서 세밀하게 작업한 하버마스의 흔적은 나름 진보적인 기획을 모색하려는 모든 영역에서 부딪치게된다. 하버마스는 반드시 흡수해야 할 양분이자,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인 것이다. 그런데 많은 들뢰지안(?)들은 하버마스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고 있다. 회피하는건 좋은데 마치 극복한 것처럼 호도하며, 단순한 몇마디로 맥빠지고 정적주의적인, 그리하여 스승 아도르노의 부정의 힘을 다 까먹은 근대성의 대변자 쯤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대개 다른 프랑스 철학자들 흉내를 내느라 정작 하버마스를 읽지는 않은 경우가 많다.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들(정작 프랑스, 유럽에선 이미 유행이 끝난걸로 보임)중 다른 나라 철학자를 진지하게 읽고 검토한 사람은, 특히 독일 철학을 진지하게 연구한 사람은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료타르(경우에 따라 데리다도) 정도일 것이다. 푸코는 하버마스와 논쟁 도중에 마치 그제서야 알았던 것처럼 "아, 내 생각중 상당부분을 아도르노가 이미 했었군. 그를 진작 읽었더라면 내 수고를 많이 절약했을텐데..."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푸코가 슬그머니 아도르노의 생각을 가져다 썼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푸코는 그런식으로라도 교류를 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푸코는 하버마스의 취약지점을 보완할수 있는 이론적 도구를 제공할수 있다.어쨌든 결론은 비판이론 저작들을 꼼꼼히 독해하라는 것이다. 특히 하버마스는 그의 핵심개념인 "합리성"을 "교육가능성"과 거의 동의어로 쓰는 만큼 교육운동의 전망을 고민하는 사람은 반드시 숙달되고, 극복해야 하는 이론이다.

그러나 문제는 하버마스가 워낙 자기 생각을 잘 바꾸는 학자라서 읽어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의 초기 사상인 "정당성의 위기"와 최근 사상인 "탈형이상학적 사유"에서 어떤 공통성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네오 마르크스주의자의 저작인 "이론과 실천"과 90년대 저작인 "사실성과 타당성"역시 그 연결고리를 찾기 어렵다. 스승의 "부정변증법"을 너무 제대로 배웠는지, 하버마스는 좀 아니다 싶으면 자신의 체계나 학설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게 거의 특기다. 그 중 필생의 대 전환을 두번했는데 한번은 해석학적 전환, 또 한번은 언어학적 전환이다. 이 과정 속에 마르크스, 베버, 아도르노, 가다머 정도의 뿌리를 갖고 있던 하버마스의 사상은 윈치, 서얼, 오스틴, 뒤르켐, 파슨스, 기든스, 미드, 피아제, 아렌트, 루만 등의 사상을 아우르는 거대한 기획속에 놓이게 된다. 이 거대한 기획은 그의 대표작인 "의사소통행위이론"에 집대성된다. 이 "의사소통행위이론"이야 말로 따라서 19세기의 자본론이 갖고 있던 거대한 사상의 용광로라는 영광스러운 위치를 계승할만한 책인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 하기로 하자, 다만 요즘 하버마스를, 비판이론을 "죽은 개 취급"하는 "한국적인 풍토"가 너무 아쉬워서 몇마디 던지는 것이다. 들뢰즈 혼자 아무리 "변증법을 무너뜨렸다"고 주장해도, 여전히 변증법적 사유는 전세계 진보사상가들의 무기로서 벼려지고 있다. 실상 들뢰즈가 헤겔을 허물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의심스럽다. 그런 식의 헤겔비판(동일성으로 몰아붙이기)은 수십년 전에 아도르노가 "부정변증법"에서 거의 가공할만한 공격으로 가루를 내었던 것에 비하면 얌전한 뒷북에 불과하다. 심지어 아도르노는 헤겔의 체계뿐 아니라 실존주의의 "주체"조차 모나드 수준으로 축소된 동일성 체계의 찌꺼기로 몰아내어 버린다. 이 지점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했던 하버마스는 주체, 자아를 폐기하고 상호주관성, 주관적의미연관 등 이미 타자, 세계와 얽힌 행위자를 상정한다. 요즘 유행하는 리좀이니 네트워크니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버마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지배계급을 비판할때 그들이 "내맘이다 어쩔래?"라고 반박할때 그것을 분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나 탈근대 사상에 입각해서 지배질서를 비판할 경우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어렵다. 동일성 거부, 차이 그 자체에서는 어떤 진보적인 우월성을 내세우기 어렵다. 깡패 불러서 아들 복수해준 재벌 회장은 얼마나 파격적인가, 그 역시 차이이며 그는 말할 것이다. "내가 내 꼴리는대로 했다. 고리 탑탑한 도덕으로 날 뭐라하지 마라. 난 내 욕망에 충실했을 뿐이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반박하겠는가? 서로 "그래 내맘이다"하고 소리지르는 것 외에? 하버마스는 이런 상황을 봉쇄하기 위해 비판이 출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평생을 작업했던 것이다. 스승의 책 제목처럼 "한줌의 도덕(미니마 모랄리아)"이 필요했던 것이며, 그것을 "말"에서 찾은 것이다. "말을 하는 한", "말이 되는 조건"을 찾게 된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하고 외칠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는 대화와 의사소통행위를 구별해야 한다고 경고하지만....

"내 맘이다!","내 돈 가지고 내가 하겠다는데?", "그건 당신 생각이고, 이건 내생각이야, 끝." 이렇게 나오는 상대를 끝까지 몰아붙여 분쇄할수 있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확고한 토대와 무기는 이 어려운 질문들을 회피하는게 아니라, 여기에 직면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너무 축소되어서 바늘만큼 작아진다 할지라도(사실 그래서 좀 김빠지긴 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도깨비방망이보다는 직접 내 손에 잡을수 있는 바늘 하나가 더 날카로운 법이다.

하버마스의 죄라면 폼나고 문학적인 문장이 아니라 보고서같이 정확하고 다소 지루한 문장을 썼다는 것....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학종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학종 다음의 셀프학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