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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희망선언

2007년 5월 전교조 전국교사대회때 전교조 위원장(당시 정진화) 이름으로 발표된 선언문입니다. 사실 작성자는 정진화 위원장이 아니라 저입니다. 이제는 꽤 시간이 지났으니 원작자를 공개해도 될듯 합니다. 그 당시 전교조 지도부는 이 글을 낭독은 했으되, 뜻은 새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교육희망 선언

교육은 원래 희망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가 어려운 지경에 빠질 때마다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희망을 찾으려 했다. 나폴레옹에게 초토화가 된 독일인들은 군대를 키우는 대신 학교를 세웠고, 일제의침략을 받던 우리 선조들은 “청년학도”에게 미래의 희망을 걸었으며, 마침내 우리는 교육의 힘으로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의폐허를 딛고 다시 일어 설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희망이 되어야 할 교육이 어느 새 절망이 되고 있다.학부모들은 희망도 신념도 없이 늘어만 가는 사교육비에 허리가 휘고, 아이들은 끝도 보이지 않고 의미도 찾을 수 없는 무지막지한입시교육에 시달리며 몸과 마음을 상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신뢰를 잃어버린 공교육과 교사들은 거의 공공의 적이 되어 온국민의 질타를 받고 권위마저 상실해 심지어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구타당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최근 들어 많은 학자들이 올바른 교육을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민주주의를완성할 수도, 지식·정보사회의 성장 동력을 키울 수도, 구성원들에게 공감과 행복을 줌으로써 공동체의 유대를 이룩할 수도 없다고입을 모으고 있다. 그러니 미래의 희망이 되어야 할 교육이 그리고 그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절망적상태에 빠지고 있다면 이는 단지 교육만의 절망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절망이다.

그러나 우리 교사들은 이러한 절망 앞에 그저 탄식하거나 냉소할 수 없다.교사들은 미래의 희망을 키우는 책무를 가지고 있다. 일찌기 뒤르켐은 학교는 새로운 시대의 성전이며 교사는 사제라고 하지않았던가? 우리는 이러한 장엄한 책무를 무거우면서도 자랑스럽게 받아들인다. 아울러 우리는 이러한 책무와 자랑을 바탕삼아 절망적인상황에서도 오히려 교육 희망의 꽃을 피우고자 하며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오늘날 한국 교육의 절망을 만들어내고 있는 첫 번째 이유는 교육 그 자체에 대한 목적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배우는 학생들도, 그 부모도, 심지어는 가르치는 교사들조차 교육 그 자체의 목적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틈을입시교육이 파고들어왔으며 모든 교육 고통, 교육 절망의 원인이 되었다. 당연히 가르치는 자가 이러한 사태에 책임이 큼을 통감하며바람직한 공교육의 패러다임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밝혀내고자 하며, 이를 학생, 학부모와 공유하고자 한다.

2. 오늘날 한국 교육이 절망을 만들어내고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아이들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교사도, 학부모도, 또 정부도 저 마다 좋은 교육이라고 내세운 것들이 추가 될 때 마다 오히려 학생들의 고통은 가중되고 있다.이는 결국 정작 배우는 아이들의 입장이 철저히 배제된 탓이다. 이에 우리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필요와 성장에 기여하고,인권을 보호하며 그들에게 행복한 교육, 희망의 미래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라는 구호아래 복지중심의 교육 패러다임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3. 오늘날 한국 교육이 절망을 만들어내고 있는 세 번째 이유는 교육이 사회 양극화의 도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한때 교육을 통해 열려있었던 계층이동의 희망은 굳게 닫혀버렸다. 이제 교육은 기존의 계층장벽을 더욱 확고히 하는 수단이되어버렸다. 소득에 따른 교육기회 격차는 점점 커지고 있으며, 당연히 산출의 격차도 커지고 있다. 이는 교육이 저소득층 아이들의희망을 시작부터 절망으로 바꾸고 있는 형국이다. 이에 우리는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이 타고난 계층과 관계없이 평등하게 질 높은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다.

4. 오늘날 한국 교육이 절망을 만들어내고 있는 네 번째 이유는 정부가 교육을 수단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지금 정부의 교육정책은 수월성과 인간자본론에 치우쳐 있다. 이는 교육받는 아이들의 삶의 질과 행복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그들을노동력으로만 교육은 상품으로만 간주하는 비인간적인 관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정부의 잘못된 교육정책을 바로잡고 올바른 교육복지수립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할 것이다.

5. 오늘날 한국 교육이 절망을 만들어내고 있는 다섯 번째 이유는 교육 주체들 간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교육 주체들 간에 바라는 바와 필요로 하는 바가 서로 다를 경우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교육 현장은 서로가서로에게 불만인 상황이 되고 말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 학교 현장은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며, 이를 보장할 제도도 마련되어있지않다. 우리는 학생, 학부모와 적극적으로 소통할 것이며 이를 가로막는 모든 제도적 장벽의 철폐를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희망을 생산하고 행복을 제공하는 교육의 힘을 믿는다. 또한 이러한힘과 함께하는 교사들의 책무와 능력 그리고 긍지를 믿는다. 우리는 우리에게 지워진 긍지와 책임을 바탕으로 교육을 통한 21세기의희망을 창출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할 것이며, 이를 통해 아이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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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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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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