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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업무는 무능한 교사의 피난처다

교사의 주 업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이슈방이 토론이 종결되었네요. 그런데 교사의 승진 제도 역시 교사의 주 업무가 무엇인가라는 논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이슈방을 보니 정작 교사도, 학부모도, 학생도 아닌 학교 행정직원분들의 글이 상당히 많더군요. 하지만 그분들의 노고와 걱정에도 불구하고 법은 법인지라 어쩔수가 없을 것 같네요.


한번 정리해 볼까요? 초중등교육법 따르면 "교사는 학생을 교육"합니다. "교장은 교무를 통할하고 학생을 교육"합니다. 행정직원은 "행정사무와 기타사무"를 담당합니다. 교과부의 유권해석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교무란 교(가르칠교)무가 아니라 교(학교 교)무입니다. 즉 가르치는 것과 관련된 일은 교육이라 칭하고, 기타 학교 운영과 관련된 일을 교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무 안에 행정사무와 기타사무가 포함되는 것이죠. 그러니 교사들의 소위 "잡무"는 경감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폐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행정직원이 만약 교사들이 종전처럼 이런 저런 행정업무를 계속 맡아해야 하며, "교육관련"이란 애매한 용어를 빌미로 "교육"행위 이외의 일을 계속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불법"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교사들이 십시일반으로 맡아서 하던 이런 저런 잡무를 몽땅 행정직원에게 떠넘기면 그 일덩어리가 엄청날텐데, 그걸 어떻게 다 합니까? 바로 그래서 업무경감이란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흔히 교원 업무경감이라고 말할때 경감되는 업무는 행정직을 편하게 하자는 것이지 교사를 편하게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경감이 수업 경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닥치는대로 행정실로 이관하자는 것이 아니라 20% 이하로 축소시키고 폐지한 뒤에 기존의 행정업무와 통폐합하자는 것입니다.


그럼 왜 교사가 행정업무에 매달려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가르치는 일은 다른 일과 달리 계속해서 그 능력이 갱신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 능력이 갱신되려면 그 동안에 알았던것을 다시 되새겨야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던 결과를 반추해야 하며, 이 둘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새로운 지식과 교수법을 개발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가르치는 일은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애초에 학교의 어원인 스콜레도 그리스말로 "여가시간"이란 뜻입니다. 수업은 일종의 무대예술+학문입니다. 만약 어떤 가수가 연습하고 작곡하고 다른 음악을 들을 시간없이 계속 노래만 해야 한다면 절대 성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 창조적인 작업은 다소 멍때리는 시간에서 나오니까요.


그런데 공연을 할때는 스탭이 있습니다. 이 스탭의 역할은 아티스트가 최상의 상태에서 공연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학교에도 스탭이 있습니다. 바로 직원들이며, 교장, 교감입니다. 이들의 묵묵한 희생은 매우 중요하며 그 덕분에 교실이라는 무대에서 아름다운 교육이 꽃 필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교사들에게 스탭의 일을 나눠 하자고 요구한다면 아마 교사는 퍼포머도 스탭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허우적 거리다가 그냥 시간만 떼우는 월급쟁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놈의 연구 집에 가서 해라. 왜 근무 시간중에 연구하냐라고 말한다면 참으로 할말이 없어집니다. 모든 일은 가능하면 근무 시간 중에 해야죠. 5시 넘어 학교갔더니 아무도 없더라 운운하는 말도 참으로 안타까운 말입니다. 교사는 일과가 9시보다 먼저 시작합니다. 또 일반 회사와 달리 점심시간에 일을 놓을수가 없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급식실에 한번 가 보셨나요? 잠깐만 한눈팔면 줄이 밀리면서 나가자빠지기 일쑤입니다. 점심시간이라고 한가로이 식사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니 8시부터 17시까지 일했으면 당연히 퇴근하는게 마땅합니다. "우리 회사는 안그런다! 밤에 불켜고 일한다!" 그건 부당하게 잔업, 초과노동을 시키는 회사를 탓해야 하는게 정상 아닐까요? 근로기준법 잘 지키는 직장을 욕할 것이 아니라?


흔히 수십년된 내용을 계속 반복해서 가르치는 낡은 교사를 욕합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 교사에게 그 낡음을 갱신할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흔히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교사를 욕합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 교사에게 아이들을 생각할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고 소통하고 생각하는 일 외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선생들 놀고 먹는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교실에서 엉터리 수업을 하고도 그런 엉터리 교사들이 끄떡 없었던 까닭은 교사의 업무가 교육외에 하나 더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잡무라고도 불리는 각종 행정업무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엉터리 교사들은 수업은 개판을 치면서도 자신 만만해 할 수 있었습니다. "난 일을 잘한단 말이다. 수업따위" 이렇게 말하면서 말입니다. 즉 교육 말고도 또 다른 업무가 있다는 것은 이들 무능한 교사들에게 아주 든든한 피난처를 제공해 준 셈입니다. 비록 교육은 못해도 교무는 잘하는 교사라는 자부심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흔히 잡무라 부르는 일들의 폐해가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잡무가 사라지면요, 수업 떡치고 학생들에게 엉망인 교사들은 학교안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습니다. 교사도 사람인데 하루종일 부정적인 상호작용만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전에는 학생들과 부정적인 상호작용을 해도 내려오면 소위 행정일 잘 해서 교장, 교감 칭찬 듣고 그럭저럭 살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업무가 정상적으로 행정직에게 넘어가 버리면, 이 교사들은 공부하고 연구해서 잘 가르치는 길 외에는 살아남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장, 교감의 역할이 참으로 애매합니다. 교무도 통할하고, 학생도 교육하거든요. 과거에는 "교사는 교장의 명을 받아 학생을 교육한다"라고 법이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교장이 학생을 교육하는 것이며, 교사는 교장의 교육의 일부를 명받아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법에는 "교사는 법령이 정한 바에 따라 학생을 교육"합니다. 그러니 교사의 교육활동은 교장의 교육활동의 부분집합이 아니라, 국가교육과정의 부분집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장, 교감의 교육활동은 교사의 교육활동의 여집합이나 일정부분 교집합이 됩니다. 교사의 교육활동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교장, 교감의 역할은 교무통할 쪽으로 많이 치우칠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교장, 교감이 슈퍼맨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양쪽을 다 감당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교감, 교장이 되는 것이 교사에게 승진이라는 것입니다. 즉, 교무를 통할하는 자리, 각종 행정사무와 기타사무를 통할하는 자리로 가는 것이 승진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 행정직으로 가는 것이 승진으로 여겨진다면, 교사들은 과연 교육과 각종 행정잡무, 어느쪽에 더 큰 유인을 가지게 될까요? 정답은 뻔합니다. 행정직으로 가는 것이 승진으로 되어 있다면, 교사들은 수업과 행정잡무 어느쪽을 더 중요시 할까요? 역시 정답은 뻔히 정해져 있습니다.


이제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지금 학교에서 교사들은 교육 뿐 아니라 각종 행정잡무도 담당합니다. 그런데 교육활동은 교장, 교감이 직접 확인하기도 어렵고, 또 교장, 교감은 기본적으로 행정적인 지위입니다. 반면 행정잡무는 공문서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실적이 바로 확인되고, 또 교장, 교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행정잡무를 잘 처리하는 교사들이 승진해서 교감, 교장이 될 것입니다. 수업이야 개판을 치건, 소판을 치건 말입니다.


이래서 교원 업무의 합리화, 구조조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사들에게서 가르치는 일과 그 결과물을 관리하는 일만 남겨두고 싹 걷어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교장, 교감에게 비비면서 행정직으로의 승진을 꿈꾸었던 딸랑이 교사들의 앙상한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장, 교감은 다만 행정적인 업무의 책임자가 될 뿐 교사들에게 과거와 같은 제왕적 권력을 휘둘러서 19세기 학교를 만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잘 가르치는 교사들에게는 어떤 유인이 필요할까요?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고 잘 하는 사람에게 가르치는 기회만큼 큰 유인은 없습니다. 그래서 훌륭하게 잘 가르치는 베테랑 교사들에게는 신임교사나 젊은 교사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역할을 부여해 주면 됩니다. 흔히 헤드티쳐, 마스터티쳐라고 부르는 직책이 바로 그것이죠. 그리하여 학교에서 교육과정의 편성과 운영은 이들 헤드, 마스터티쳐들이 총 책임자가 되고, 교육이 아니라 학교 그 자체를 관리하는 업무는 교장이 총 책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일로 승진하고 싶은 사람은 헤드티쳐가 되고, 행정적인 일로 승진하고 싶은 사람은 교장이 되는 것입니다.


제도적인 부분은 좀 더 정교해야 하겠지만, 일단 방향을 이렇게 설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교육과 행정을 완전히 분리하고, 더 나아가 승진에서도 교육과 행정을 분리한다면 지금처럼 행정잡무 잘 처리하는 교사가 학교에서 인정받고, 교육에 헌신하는 교사가 오히려 소외되어 급기야는 생명력 없는 좀비교사로 늙어가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사들은 세계에서 유래없이 상위권에서 충원됩니다. 핀란드에서는 자기나라 교사들이 상위 30%에서 충원된다고 자랑하더군요. 우리나라는? 30%로는 어림 반푼도 없습니다. 최하 10%, 아마도 5% 이내에서 충원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데려다가 각종 종이뭉치에 스태플러나 박고, 엑셀 칸에 숫자나 집어넣는 일을 시키고, 그런 일 잘한다고 승진시킨다면 이건 정말 아깝고도 한심한 노릇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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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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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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