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6. 27.

기껏 진보교육감 비판이라고 나온게 매때리기인가?

바야흐로 진보교육감 취임 1주년을 맞이하여 조중동이 분주하다. 이걸 축하할 수는 없고 뭐라고 까기는 해야 하겠는데, 까자니 마땅한게 없다.

이를테면 무상급식, 이건 교육감만의 사안이 아니고 잘못하면 전국적 이슈로 휘말리니 조심스럽다. 혁신학교. 이건 원칙적으로 조중동도 반대하기 어려운 사안이다. 그러니 기껏 딴지 건다는게 혁신학교는 전교조 학교냐 정도인데, 이것도 승진가산점 안받고 더 고생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모인 교사들이 하필이면 전교조였네 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고르고 고른것이 마침내 "체벌"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학교에서 애들 때려야 한다는 주제가 대 조선일보 사설까지 올라간 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이슈가 이제 사설까지 올라왔다.


이 사설의 논리는 간단하다. 좌파교육감이(곽노현, 김상곤 두 교육감 보다 훨씬 더 왼쪽에 있으면서도 좌파로부터 개량주의자 소리를 듣는 필자 입장에선 놀라운 표현이다) 학생 인권 세운다는 미명하에 교권을 추락시켜서 공교육이 무너진다, 공부 하겠다는 학생들의 인권도 인권이다 뭐 대충 이런 논리다.

그러면서 제목도 아주 선정적으로 뽑았다. "매 맞는 교사, 무너지는 교실"

그런데 참 얄궂기도 하다. 하필이면 그 사례로 꼽은 고교생 교사 안면가격 사건은 보수교육감 중 가장 수구적이라는 울산에서 일어난 사례다. 조선일보의 그 뛰어난 취재능력으로 어째서 서울이나 경기에서 진보교육감 당선 이후 늘어난 교권침해 사례를 찾아내지 못하고 하필 보수감 지역의 사건을 머리로 올렸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만약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체벌 금지 때문에 교권이 무너졌다고 주장하려면 다음의 두 가지를 입증해야 한다.

첫째, 최근 몇년 사이에 교사에 대한 폭언, 폭행 사례가 의미있게 증가했어야 한다.
둘째, 체벌이 줄어들때 마다 교사에 대한 폭언, 폭행 사례가 늘어난다는 유의미한 통계자료가 제시되어야 한다. 게다가 이건 다른 변인들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예컨대 일제고사 때문에 학생들의 스트레스가 증가되었거나, 혹은 막장 드라마의 영향이거나....

또 교실이 무너졌다는 표현도 일간지 사설에서 함부로 나불거릴만한 단어가 아니다. 난 20대때 때리기도 했다. 젊고 미숙하기에 아이들에게 얕잡히지 않으려고 더 그랬던것 같다. 40대 중반인 지금 애들은 나를 "정색마왕"이라고 부른다. 웃고 있다가도 꾸짖을 일이 있으면 너무도 엄하게 정색하기 때문에 정말 무섭다는 것이다. 물론 때리는건 물론 업드려 뻣쳐, 심지어 손들기나 무릎꿀리기조차 한적 없다. 그러나 내 교실은 무너지긴 커녕 정말 살아 움직이는 교실이다.

그 이유는 내가 잘났거나, 내가 학생을 잘 다루는 비법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학생들과 소통하고, 학생들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래포가 형성된 교실은 체벌이 필요 없다. 그리고 이런 래포는 교사가 학생과 마음껏 소통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길때 비로소 가능하다. 나는 나이가 40줄 넘어 교장, 교감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된 다음에야 바로 이런 자유와 래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애들은 조용히 있으나 아무도 수업은 하지 않고, 선생도 학생도 모두 침묵 속에 시간 가기만 기다리는 교실.. 바로 그게 무너진 교실이다. 아니 그건 무너진 정도가 아니라 죽어버린 교실이다. 학생이 때론 교사에게 태클도 걸고 항의도 하고, 그러면서 협상도 하느 교실, 이건 무너진게 아니라 살아 약동하는 교실이다.

죽은 교실은 물론 무너지지 않는다. 이미 죽었는데 뭐가 더 무너지겠는가? 그런데 이런 교실이 교육보다는 행정에 관심이 많은 교장, 교감, 그리고 보수적인 교육관료들 눈에는 질서잡히고 안정적인 교실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교실은 때론 휘청거린다. 그리고 그 휘청거림을 함께 바로잡고 다 같이 성장한다.

그러고 보니 교사가 맞는다. 교권이 무너진다 등의 이야기는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2006년에도 똑 같은 사례로 지역신문에서 개탄했으니


공교롭게도 5녀전이나 지금이나 교사가 얻어맞고 교권이 무너지는 지역은 진보교육감과 가장 거리가 먼 지역들이다. 그렇다면 교권을 추락시킨 장본인은 오히려 보수교육감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사실 그럴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그들은 실제 교권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제고사에 대해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하루아침에 해직교사를 만들어버리고, 성실하게 교육하는 교사보다는 돈 봉투 갖다 바치는 교사를 더 높이 평가하고, 갖가지 전시성 사업 벌려서 드러내기 좋아하는 교사는 유능한 교사로, 바깥에 눈돌리지 않고 아이들에게만 신경쓰는 교사는 안일하고 무능한 교사로 탈바꿈 시키는 상황이 교권 유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자기들은 뒷짐지고, 교사들에게 교사들조차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가지자지 학생 사생활 간섭과 통제로 내몰고 있는데, 이게 교권 유린이 아니면 무엇인가? 어린 학생들을 다만 교육감 실적 올리기 위해 8시 9시까지 남겨서 보충수업을 시키고, 여기에 대한 교사들의 의견은 일절 무시하고 있으니 이게 교권 유린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또 어느결엔가 교육수요자란 말을 퍼뜨려서 교사를 교육자에서 일개 교육 서비스 상품 판매자로 격하시키고, 학부모를 공동교육자에서 위대한 "고객님"으로 바꾸어 버렸으니, 이게 교권유린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아니, 고객이 서비스 회사 점원에게 막말좀 하고 손좀 썼기로서니 뭐가 문제인가? 고객은 왕 아닌가? 교육수요자란 용어를 거침없이 쓴 신문에서 교권 추락을 운운하니 참 우습기까지 하다.

이렇게 교과부가, 교육청이 교권을 무시하고 있으니 학생이 교사를 무시하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최근들어 교사에 대한 폭행이 의미있게 증가했다는 증거를 본적이 없다. 하지만 만약 있다면 그 원인은 교사를 말단 공무원 취급한 관료주의와 보수교육감들, 그리고 교사를 서비스 판매점 점원으로 만들어버린 신자유주의 교육정책 입안자들이 바로 그 원인제공자라고 말할 것이다.

사실 진보교육감 취임 1주년을 맞이하여 보수언론에서 뭐라고 공격할지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상대가 세게 나와야 나도 흥이 나는 법인데, 그들의 실력이 이 정도 밖에 안되니 더 이상 대거리할 흥이 사라지고 말았다.

2011. 6. 20.

진보교육감 사용법

요즘 전교조 활동가들 사이에서 진보교육감 무용론, 진보교육감 배신론이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주로 강경파로 분류된 분들이 그러는데, 그들의 논리는 대체로 이렇습니다.

1) 비리 사학재단을 한 칼에 날리지 않고 있다.
2) 해직교사들을 복직시키는데 소극적이다.
3) 일제고사, 교원평가, 성과급 철폐에 미온적이다.
4) 이런 저런 일들을 벌여서 선생을 귀찮게 한다.
5) 경쟁교육을 철폐하지 않는다.
6) 귀족학교, 특목고를 확 정리하지 않는다.

대략 이런 정도인데, 안타깝게도 어떤 교육을 해라, 어떤 학교를 만들어라에 대한 비전은 찾아볼수 없고, 결국 이익집단으로서 교사의 모습만 보입니다. 설사 그렇지 않다해도, 여기에는 진보교육감에 대한 다음과 같은 그릇된 관점이 보입니다.

1) 진보교육감 도구주의: 이 관점은 진보교육감을 특정 교육운동 의견그룹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도구로 보는 관점입니다. 진보교육감 자신의 비전이나 견해는 무시되며, 이 의견그룹의 주장과 어긋나면 즉시 "사이비 진보"로 규정됩니다. 하지만 진보의 스펙트럼이 넓듯이 진보교육감의 스펙트럼도 넓습니다. 따라서 진보교육감과 진보교육운동 진영은 각자 나름의 견해를 가지고 논쟁하고 토론하면서 지평을 함께 넓히고 방향을 조정해 나가야 합니다. 어느 한 쪽의 입장을 강요하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폭력입니다.

2)진보교육감 해결사주의: 이 관점은 진보교육감을 뽑아 주었으니 이제 그 동안 제기되어 온 문제들을 확 풀어라 하는 주의입니다. 이게 노무현 대통령을 거꾸러뜨린 논리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진보교육감의 정치적 위상은 매우 미약합니다. 장학사, 장학관으로 득실거리는 교육청에 섬처럼 들어갔을 뿐입니다. 그 영토를 넓혀주는 것은 오히려 바깥에 있는 진보교육운동 진영입니다. 즉 진보교육감이 뽑혔기 때문에 교육운동 진영의 노력이 비로소 빛을 발할 조건이 생긴 것이지, 그 동안 운동권이 노력했으니 이제 교육감이 해결해라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진보교육감도 한 사람의 교육운동가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도 나름의 교육에 대한 비전, 운동전략 등이 있습니다. 활동가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비전과 상호조정해야 합니다. 대화를 요구하는 것은 옳으나, 입장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2)의제를 계속해서 만들고 선점해야 합니다. 진보교육감은 교육자가 아닙니다. 교육의제는 결국 학교 현장에서 발굴되어야 합니다. 이건 교육감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 교육감을 교육운동진영으로 불러들이는 방법 이것외에 없습니다. 의제가 없는 곳에 선출직이 갈 이유는 없습니다.

3)전문성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교육운동가들은 교육전문가들입니다. 이 부분이 일종의 정치인인 진보교육감이 가장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교육전문가로서 지원할 수 없는 교육운동가들은 안되었지만 진보교육감과 더불어 할 일이 많지 않습니다.
4) 실천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진보교육감은 보수적인 세력의 대표를 선거에서 물리쳐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자기 역할을 다 한 셈입니다. 이겨주지 않았습니까? 그 다음은 진보교육자들이 교육현장에서 실천사례를 만들어서 진보교육의 영역을 넓혀가고 계속 새로운 의제를 개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혹자는 진보교육감과 교사와의 대화에서 입장차이가 크고 진보성이 미진하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지난 교육감때 우리는 교육감은 커녕 본청 장학관 만나기도 힘들었습니다. 이미 이것만으로도 큰 변화입니다. 그 다음 변화는 교육감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여주고 교육감이 지원하는 형태로 일어나게 됩니다.

한 마디로 진보교육감을 뽑았으니 뭔가 되겠거니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진보교육감을 뽑았으니 뭔가 해봐야겠다,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짤릴 걱정 없이 이런 저런 새로운 교육실천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보다 더 진보적인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2011. 6. 18.

체벌금지 조치에 대한 1년 전 생각과 지금의 생각

곽노현 교육감과 김상곤 교육감을 진보좌파 교육감이라 부르면서 그들의 인권조례, 체벌금지 때문에 교사들의 교육이 불가능할 지경이라는 조선일보의 선동이 또 시작되었네요.


이게 사실 정당성은 전혀 없는 기사입니다. 왜냐면 지난 3년간 체벌없이 인민군도 무서워서 못쳐들어온다는 대한민국 중2, 중3 담임을 계속해온, 그리고 이 놈들을 데리고 지루한 강의가 아니라 온갖가지 다양한 수업을 시도해 온 나 같은 선생들도 많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교사들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게으른 웰빙과 교사들에게는 꽤 호소력이 있는 주장입니다. 이제 한국교총은 교장, 교감이 아니라 이들 웰빙과 교사들의 대변인으로 나서고자 작정한 모양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지난해 체벌금지 조치는 정치적으로는 에러였습니다. 애초에 법으로 허용된적이 없는 체벌을 굳이 기자들 불러놓고 금지라고 할 이유도 없었고, 체벌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교사들의 지지를 모으는 시도도 부족했고(기자회견장에 이런 분들이 같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체벌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이루어져 왔는가에 대한 성찰도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태는 곽노현 교육감 보좌진들의 아마츄어리즘의 상징으로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 다행히 요즘에는 진성 진보교사들(전교조 원로들 같은 기회주의자들이 아닌)이 하나 둘 은거를 깨고 나오면서 비서, 보좌진이 이벤트성 불뚝질이라는 시민운동식 사고는 더 이상 안치고 있습니다. 오히려"학생, 교사, 학부모의 학교장 평가 강화"라는 대박을 하나 냈죠. 이건 조선일보 사설에까지 올라가면서 누가 진보고 누가 보수냐가 확연하게 구별되는 논쟁을 이끌었습니다. 물론 교장을 옹호하는 쪽이 여론에선 밀렸죠.

문득 2010년 11월에 체벌금지조치에 대해 이글루스에 썼던 포스팅이 생각나서 이리 옮겨 옵니다. 일부 내용은 지금 현실과 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그냥 고스란히 퍼다 놓습니다.

===이하 2010년 11월 포스팅 퍼온 것===

요즘 포스팅 할만한 여력이 없습니다. 네티즌들 말로 잉여력이 없다고 해야 하나요? 그나마 대안교과서 작업 같이 하는 분들 중 어떤 분은 정교수 승진때문에 정신 없고, 어떤 분은 다치기까지 하셔서 일정이 한 달 쯤 미뤄져서 말미가 났습니다. 그래서 가장 긴급한 이슈 하나를 짚어보려고 합니다.

오늘 체벌이 금지라고 "공식적으로 발표"가 났습니다. 이걸 굳이 언플식으로 발표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또 지역에 따라서는 이걸 빌미로 광분하는 녀석들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동료나 하급생들에게는 체벌 이상의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학생들이 도리어 교사에게 "이거 뭐야, 체벌이잖아?" 이런 식으로 대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가르치는 학교는 송파구에 있는 학교라서 그런지 워낙 애들이 순둥해서 별 반응없이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또 저 역시 체벌이라는 것을 최근 10년간 한 손에 꼽을 정도로 했기 때문에 별 느낌 없이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교사들은 분명 곤욕을 치루었을 것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나는 체벌을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 뿐 아니라 체벌이 반인권적이라는데는 상당히 많은 교사들이 동의합니다. 일부 비진보(차마 그 분들에게 보수라는 말을 쓸 수 없네요)적인 교사들이 체벌에 집착할뿐, 대부분의 교사들은 체벌금지의 취지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게 어떤 식으로 폐지되는가 하는 과정과 방법에 있습니다.

체벌을 하지 않으면 벌점과 학부모 소환, 그리고 성찰교실을 운영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벌점은 학생들이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학부모 소환. 안오면 그만입니다. 미국처럼 학교에서 학부모 소환을 했는데 안오면 크게 경을 치는 그런 시스템이 없는 한, 학부모가 바쁘다, 그 새끼 내논 자식이다 이따구로 나오면 답이 안나옵니다. 퇴학? 중학교는 의무교육입니다. 7일간 등교정지 외에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성찰교실? 누가 그 교실을 지킵니까? 교장, 교감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교장, 교감이 그일 하겠답니까? 그 일 하라고 했더니 교육감 면전에서 집단퇴장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중3쯤 되면 상당히 노는 학생은 거의 청소년이 아니라 전문 범죄꾼 수준까지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부 변태성 교사들을 제외하면 체벌이라도 사용하려는 교사들은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을 위해서 그것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사랑의 매 따위는 없습니다. 이때 학생들을 위해서라는 말은 얻어 맞는 학생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머지 다른 학생들을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권리는 학습권입니다. 그런 학습권을 단 서너명의 산만한 학생들만 나대도 거의 완벽하게 침해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런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의 재산권과 신체의 안전권을 훼손하기도 합니다. 즉 삥 뜯고 깝니다. 소수의 문제학생의 인권을 위해 다수의 선량한 학생들의 인권이 침해되어도 이를 방지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제는 교사 자신의 안전까지 위협받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의 교사는 동네 북입니다. 학부모가 와서 깽판을 쳐도 제지할 길이 없습니다. 학생의 아버지라는 남자가 스포츠 머리를 무스칠을 해서 빳빳하게 올리고 가죽점퍼를 입고 와서 담임 멱살을 잡아도 괜찮은 나라가, 학생의 어머니가 담임 머리채를 잡고 따귀를 쳐도 괜찮은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미국이나 영국 같았으면 그런 학부모는 그날로 인생이 끝장 났을 겁니다. 게다가 교장, 교감, 그리고 그들과 편승한 교육관료들은 교사를 행정말단직원 취급합니다. 심지어 행정실 직원조차 자기들과 같은 급에 놓고 업무 관할을 놓고 네일이네 내일이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이제 껄렁대는 학생들까지 기어 오릅니다.

자, 이제 교사들은 어떤 존재가 되는건가요?

여기에 바로 교사들의 반발에 대한 답이 있는 것입니다. 교사들은 결코 체벌에 집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체벌 사용하지 않고도 아이들 잘 다루는 나같은 교사들도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체벌 폐지가 이런 방식으로 내리먹여질때는 체벌을 하지 않는 교사, 반대하는 교사, 체벌 폐지를 위해 운동을 했던 교사들조차 그냥 두리뭉쳐져서 교사집단으로 취급 받게 됩니다. 이건 마치 이해찬 장관시절에 교사들 불러 모아놓고 촌지 안받기 선서를 시켰던 것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그때 그 굴욕감은 이루 말할수 없었으며, 이렇게 교사들에게 굴욕감을 주고서 어떤 교육개혁도 시작도 어려움을 지난 10년 정권은 잘 보여 주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교육청, 교장, 교감의 권력이 약화되고 교사들의 임파워먼트가 선행되지 않고서 교사를 학생과 교장 사이의 샌드백으로 만들어버리는 이런 식의 체벌 금지안은 진보교육감을 지지했던 교사들조차 적으로 돌리게 만드는 최악의 수라는 것입니다. 선거로 뽑히는 교육감으로서는 이보다 더 큰 실책이 없습니다.

이원희가 낙선했던 까닭은 "이제 선생님들의 경쟁이 시작됩니다."라는 구호 때문이었습니다. 이 구호가 교사들을 적으로 돌렸고, 결국 낙선했습니다. 교육감 후보가 누군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지인들 중 교사가 있으면 누구 찍어야 되냐고 물어보았고, 그대로 찍었습니다. 그 때 비진보적인 교사들조차 "곽노현"이라고 말하는 대신 "이원희는 안되"라고 말했던 것이죠. 그런데 지금 교육감의 체벌폐지 추진방식은 꽤 중도진보적인 교사들조차 "곽노현은 안돼"라고 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체벌은 제도가 아니라 관행이고 문화였습니다. 어느 학교 교칙에 무슨무슨 짓을 하면 곤장이 몇대 라는 교칙이 있던가요? 다만 상처가 날 정도로 두드려 패는 사람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을 뿐, 애 패다가 전치3주 입히면 다른 폭행죄와 똑같이 처리되는 것이 체벌입니다. 그러나 교육적인 의도라는 차원에서 패는 놈이나 맞는 놈이나 암묵적으로 인정하던 관행이며 문화가 체벌인 것입니다. 그런데 관행과 문화를 제도로 폐지하려는 것은 마치 사적소유를 법제도를 통해 폐지하려 했던 스탈린의 오류를 그대로 복사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체벌은 교사, 학생, 학부모의 문화운동을 통해 근절되어야 합니다. 특히 교사들 중 체벌 반대파를 적극적을 키워서 이들의 목소리가 비진보적 교사들의 목소리를 묻게 만든다면, 그리고 학부모가 공동교육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게끔 강제한다면, 또 교장, 교감이 소위 학주가 하는 일을 맡아서 할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둔다면 서서히 사라질 관행이고 문화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애를 때려서야 말 듣게 만들수 있다는 건 교사가 무능하다는 뜻이다라는 공감대가 퍼지게 해서 부끄러움을 알게 해야 사라질 관행이고 문화였던 것입니다. 촌지도 이런 식으로 사라졌지, 결코 무슨 법제도를 통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교육감께서 제발 몇월 며칠부터 체벌 일제히 금지, 이런식의 얼토당토 않는 언플 좀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차라리 체벌없는 학교를 만드는 교사모임 이런거를 키워서 이들을 통해 포지티브한 언플을 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교사를 교장과 학생 사이에서 새우등 만들지 말고 충분한 권한부여와 그만큼의 책무성을 부여했으면 합니다. 또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야말로 직설적인 의미에서 교사가 학생이나 학부모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합니다. 지금 이런식으로 굴러가다간 교사가 체벌이 아니라 정당방위로 학생을 때릴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저는 나이가 좀 있는 남자라서 덜 하지만 젊은 여자 교사들이 학부모는 커녕 학생들에게 느끼는 공포감은 장난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해법이 "그러니까 남자선생을 뽑아" 이런식으로 되어서는 안되겠죠. 그건 다시 남자 선생의 완력, 즉 폭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저는 체벌은 없어져야 하며,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어떤 과정을 통해 없어지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막장교실이 될수도 사랑가득 교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뒤르켐이 말했습니다. "학교는 세속의 성전이고 교사는 그 사제다."라고 교사를 새우등으로 만들고, 동네북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 사회를 콩가루로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하기사 마가렛 대처같은 지독한 신자유주의자라면 "그 사회란게 어딨어?" 이러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진보교육감 아니십니까?

=== 다시 지금 생각===
지금까진 체벌금지 조치가 발표된 당시의 생각이었고, 이제는 어떻게 할까요? 당연히 체벌 복귀 안됩니다. 대체 처벌 허용? 이것도 안됩니다. 교사는 어디까지나 합법적인(체벌이 되었든 체벌 할아버지가 되었든 어떤 형태의 폭력도 법적으로 허용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방법만을 사용하여 학생을 교육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체벌은? 애초에 체벌이란 제도는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폐지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체벌이란 낡은 관행이 있었죠. 즉 체벌이란 교장의 제왕적 군림, 관료제, 권위주의, 위계주의, 행정위주, 통제중심교육 등등의 낡은 교육관행이란 긴 사슬의 한 고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낡은 사슬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사슬의 최말단인 학생-교사의 고리가 폭압적으로 유지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체벌은 학교라는 오래된 제도의 낡고 폭압적인 문화의 한 고리입니다. 이 문화가 허물어지면 체벌은 교육의 탈을 벗고 폭행이라는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이 낡고 폭압적인 문화에 맞서는 교사들이 체벌에 반대하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며, 이 낡고 폭압적인 제도를 유지하려는 집단이 체벌을 찬성하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을 부각시켜서 체벌을 찬성하는 세력을 참으로 낡고 폭압적인 집단으로 규정지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그 반대편에 선 다만 안때리는 교사가 아니라 참된 교사인 분들의 모습을 포지티브하게 계속 강조해야 합니다. 지금쯤이면 "체벌없이 사랑을 주고받는 참 교사"에 대한 기사와 띄워주기가 시리즈로 한 10여명은 나갔어야 합니다. "체벌없다" 한다고 "와" 하고 박수 나오지 않습니다.

다음은 체벌 뿐 아니라 학교 안에서의 어떤 폭력도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사에 의한 체벌 뿐 아니라 학교 관리자의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언행은 당장 해고, 학부모의 교사에 대한 위협이나 폭행은 "특수공무집행 방해"로 고발, 그리고 동료 학생들을 괴롭히거나 금품을 갈취하는 준범죄자 학생들은 엄한 특별교육 및 사법조치. 이렇게 학교에서 인권유린과 폭력이 사라지도록 하겠다는 종합적인 대책이 제시된다면 체벌은 언급하는것조차 부끄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

자, 조선일보가 두 껀이나 논쟁을 걸었습니다. 교육감께서는 학생의 학교장 평가, 그리고 체벌 이 두껀의 도전에 당당히 응전해야 합니다. 이건 이길수 있습니다. 교육에 대한 고민도 식견도 없는데 이런 언플에도 재빨리 대응못하는 보좌관이 있다면, 대체 거기 왜 있는거냐며 호되게 야단을 쳐야 합니다. 교육은 다른 시민운동 영역과 달리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영역입니다. 매우 빠르게 의제를 선점해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빠른 의제 선점이 말을 빨리해서 될일은 아니겠죠. 보좌진들의 교육에 대한 고민과 식견이 극도로 필요한 시기입니다.

2011. 6. 15.

조선일보는 북한 학교 교장을 원하나?

서울시교육청의 학교장 평가지표가 발표되었다. 이걸 보고 조선일보가 아니나 다를까 펄펄뛴다. 링크는 저작권 때문에 걸어 놓은 것이니 굳이 들어가서 조선일보 트래픽 높여줄 필요 없다. 기사 내용은 아래에 요약한다.

조선일보의 딴지는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학생이 교장을 평가하는 항목에는 학생인권·체벌금지 등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중점 정책과 관련된 내용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건 뭐라고 말 할 수 없다. 교육감이 당연히 자기 정책 잘 따라 한 교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니. 조선일보도 이건 뭐라 할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바로 다음으로 넘어간다. 조선일보 특유의 수법인 누군지 알수 없는 "교육계" 등의 주어를 사용해서 자기 말 하기.

2. "교장이 학생들 눈치를 보느라 행정을 소신껏 펴지 못하면 학교의 권위와 질서가 무너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여기서 벌써 두개나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는 "행정을 소신껏 펴지 못하면"이란 부분이다. 정답은 행정은 소신껏 펴면 안된다. 행정이라고 하는 것은 가치 중립적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목표가 주어지면 그 목표를 충실하고 효율적으로 달성하게 하는 것이 행정이다. 선출직인 교육감이 "학생인권, 학생 만족"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했으면, 최대한 학생의 눈치를 보는게 행정이다. 학교는 학생의 행복을 위해 있는 것이지 교장의 소신을 위해 있는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교장의 행정적 소신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다.

행정에 교장의 소신이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은 비선출직인 행정관료들이 마치 국회의원처럼 자기 소신껏 정책을 펴도 된다는 무시무시한 발상으로 넘어간다. 이렇게 비선출직들이 자기 정치적 판단을 마구 부리는 나라는 지구상에 몇 없다. 그 중 하나가 북한이다. 하긴 조선일보는 신문 이름도 조선 아닌가?

둘째는 학교의 권위와 질서가 무너진다는 협박이다. 교장이 행정을 마음대로 못하면 학교의 권위와 질서가 무너지나? 그럼 대통령이 국민눈치를 보기 때문에 정부의 권위와 질서가 무너진다는 논리도 바로 도출된다. 이건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겠다는 뜻이다. 교장의 권위는 학생과 교사를 강제할 수 있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학생과 교사의 자발적인 협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과 교사의 눈치를 많이 본 교장일수록 더 권위가 설 것이며, 그런 학교일수록 오히려 아무런 제재 없이도 질서가 잘 잡힐 것이다. 교장이 학생 눈치를 보지 않고 그들의 알량한 소신을 내세우는 학교일수록 겉보기에는 질서가 잡혀 보일지 몰라도 학생과 교사는 교장을 무시하고 서로 반목하고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교장이 학생 여론을 무시하고 내세울만한 어떤 소신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전제조차 틀렸다.


3. 시교육청은 지난해 교장 평가(100점 만점)에서 학부모 만족도와 교사 만족도에 각각 10점씩 배점을 주었다. 올해는 초등학교의 경우 학부모 만족도 20점, 교사 만족도 20점씩 40점으로 크게 늘렸다. 중·고교에서는 학부모 만족도 15점, 교사 만족 15점에 학생 만족도 10점을 더했다. 이에 따라 올해 교장 평가는 100점 만점 중 교사·학부모·학생 만족도가 차지하는 비율이 40%에 이르게 됐다.
반면 학교별 학업성취도는 '학교 간 경쟁을 과열시킨다'는 이유로 2년 연속 교장 평가지표에서 빠졌다.

결국 하고싶은 말은 교장이 학교의 주인인 학생들의 의견을 얼마나 잘 들었나가 아니라 점수 얼마나 높였나로 평가하라는 것인 모양이다. 그럼 차라리 이 사람들을 학교장이 아니라 학원장을 시키는 것이 낳겠다. 학교는 사회의 모형이며 미래다. 점수는 부차적인 것이며 우선은 학생들이 장차 살아가고 만들어갈 사회의 비전을 가지고 거기 필요한 태도를 갖추게 하는 것이 주요임무인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 국가에서 통치자를 국민이 직접 평가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그 대신 작업성과만 가지고 경쟁하라고? 이거야 완전 수령님 지휘하에 닥치고 일이나 해야하는 북한 체험소로 학교를 만들겠다는 주장이 아니고 뭐겠나? 조선일보는 자꾸 자유민주주의자인척 하지 말고 제호 그대로 조선의 신문임을 커밍아웃 하는게 낳겠다.

4. 교장과 교사들은 이번 서울시교육청의 조치에 대해 "교장이 여기저기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학교 경영을 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를 나타냈다. 서울의 공립 중학교 A교장은 "이대로라면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고 교사와 학부모 비위를 잘 맞추는 교장이 '모범 교장'으로 평가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계속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면서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인용을 따서 앞에서 했던 말을 또 하고 있는데, 이 기자가 인터뷰를 하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결국 교장이 학부모, 교사, 학생 눈치를 보고 인기영합정책을 펴면 학교가 망한다 뭐 대충 그런 취지의 말이다. 요즘 유행하는 포퓰리즘 때리기의 연장선상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다음 두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첫째 , 지금까지 학교가 제대로 잘 운영되었다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둘째, 그렇게 잘 운영된 중심에 소신있고 유능한 교장의 리더쉽이 있었다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에는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주호 장관조차 야당 시절에는 교장제도를 싹 갈아치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녔으니, 현재의 교장들에게 만족하는 사람은 교장들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교장들이 이렇게 엉망이 된 원인으로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는 제왕적 권력"을 제시하는 것은 이제 거의 상식이다. 그런데 여기에다 놓고 겨우 "학생 눈치 보는 교장은 안된다"라고 반발하는 모습은 구차하다. 더군다나 인기영합이란 말은 유치하기까지 하다. 실제 학생, 교사 만족도 조사의 지표는 인기투표가 아니다. 구체적인 지표들이 제시되고 있으며, 이 지표들은 모두 교육감의 정책과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책은 일관되게 민주주의로 연결되고 있다.

교사는 학생의 눈치를 보고, 교장은 교사의 눈치를 보는 학교는 사실 아주 바람직한 학교다. 훌륭한 지도자 한 사람이 아랫것들에게 소신껏 주장을 펴며 정치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신적인 존재"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그 차선책은 "다수"에 의한 통치일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수"가 적어도 "인간 소수"보다는 훌륭하기 때문이다. 이게 민주주의의 기초다. 그리고 학교에서 다수는 학생이며, 교장이라는 1인은 당연히 신적인 존재도 아니며, 교육자들 중에서도 훌륭한 편에 속하지 못하느 살마들이며, 행정가로서도 무능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당연히 다수에 복종해야 하며, 다수의 뜻에 따라야 하며, 다수의 뜻을 알기 위해 늘 눈치를 봐야만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출판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는 까닭도 통치자에게 늘 시민의 눈치를 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에 거부감이 느껴진다는 것은 그만큼 권위주의가 뿌리깊게 박혀 있다는 뜻이다. 권위주의가 몸에 인이 박혔기 때문이다. 교장이 "아랫것"의 눈치를 본다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 그리고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들인 자유민주국가의 시민으로 살아갈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눈치 운운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모아다가 중학교 3학년 사회부터 다시 가르쳐야 한다. 만약 나한테 보내준다면 대한민국 최고 사회교사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는 내가 책임지고 민주시민으로 양성시켜 줄 용의가 있다.


2011. 6. 13.

스페인의 앵그리버드 이벤트

볼수록 기발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창의적이고 톡톡튀는 아이디어가 2000년대 들어 우리도 좀 일어나나 싶었는데, 요즘 그 창의성은 다 어디로 가고, 창의성을 키우라는 강요만 곳곳에서 메아리 칩니다.

이 앵그리버드란 게임은 정말 단순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수억회의 다운로드를 기록한 세계 최고 베스트셀러 게임입니다. 갈수록 현란해지고 복잡해지는 게임산업에서 게임 본연의 즐거움이 무엇인가를 고민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독특한 발상이 가능한 것은 기본적으로 "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놀 시간이 없으면 어떤 창의적인 경험도 나오지 못합니다.

이 앵그리버드 게임을 오프라인에서 실물로 구현하겠다는 발상도 기발하고, 또 이것을 보며 함께 웃고 즐기는 여유도 아름답습니다.

칙센트미하이가 말했듯이 창의성은 "시간의 여지"에서 비로소 성숙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개발을 일종의 전쟁처럼 묘사하는 풍토에선 창의성이 자라나기 어렵습니다. 지금 한국 경제는 다만 다른 나라보다 투입이 워낙 많아서(즉 노동시간이 살인적이라서) 산출이 많을 뿐입니다. 특히 뭔가를 개발해내어야 하는 직종으로 갈수록 노동시간이 살인적입니다. 심히 우려됩니다.

우리 아이들, 어릴때부터 좀 놀게 합시다. 공상도 좀 하게 하고요.

2011. 6. 10.

혁신학교 물타는 애교 교장

구체적으로 밝히면 명예훼손이 되니까 그냥 익명으로 처리합니다.

어느 교장이 있습니다. 공정택이 처음 교육감이 될때 장학사가 되었다가 3년만에 장학관, 4년만에 51세에 교장이 된 여성입니다. 딱히 잘난 점은 없습니다. 애교를 잘 부리고 교태를 잘 떱니다. 그리고 말로 자신의 업적을 상당히 잘 포장합니다. 공정택 시절에는 각종 방과후학교랑 자원학교 학력신장 따위의 공정택표 사업을 전부 자기가 한 것처럼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여기저기 떠벌리면서 자기 자랑 하느라 학교에는 잘 붙어있지도 않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후에는 출장입니다.

그런데 하늘같이 믿던 공정택이 짤리고 곽노현 교육감이 당선되었습니다. 잠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던 이 교장은 1년이 지나자 다시 기력을 회복하고 이번에는 교육혁신 세력들 앞에서 교태를 부리고 다닙니다. "학력신장 교장" "방과후 교장"이 이번에는 "문예체 교장"으로 변신했습니다. 정작 자기 학교에서는 있던 밴드부도 해체시키고 밤 늦게까지 국영수 내신 방과후 하느라 불이 훤한데 예술제 한번 개최한 적 없는 학교인데, 밖에서는 문예체 교장이라고 떠들고 다닙니다.

뭐, 누구나 살아남아야 하니 그걸 누가 탓하겠습니까? 문제는 그 말에 녹아나는 사람들입니다. 공정택과 그의 사람들은 원래 그런 수준이니 그러려나보다 합시다. 그런데 문제는 공정택 사람들을 녹였던 바로 그 무기가 명색이 진보교육감의 사람들이라는 사람들에게도 먹히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 안에서는 권위적이고 독선적이고 국영수사과 보충수업을 미치도록 강요하는 교장이 밖에서는 만면에 미소를 띄며 문예체를 진흥하고 혁신적인 마인드를 가진 교장으로 선전되고 있습니다. 선전 하는 교장이 문제가 아니라 그 교언영색을 읽지 못하는 혁신주체들이 문제입니다. 이럴때 나오는 말은 딱 하나겠네요. "그저 남자들이란....."

저를 포함한 모든 혁신 일꾼들에게 경고합니다. 오랫동안 권력의 변방에 있다가 이제는 서서히 권력의 맛이 느껴지는 시기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 권력의 맛을 보기 시작하면 서서히 주변에 아첨하는 무리들이 생깁니다. 우리의 적은 우리의 오만함입니다. 우리를 칭찬하고 우리 뜻에 찬동한다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경계합시다. 오히려 우리의 부족함을 질타하고, 왜 그 정도 밖에 못하냐, 그게 무슨 진보냐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합시다. 그래야 혁신학교가 진보가 되고 혁신이 됩니다. 얼렁뚱땅 웃는 얼굴과 거짓 보고서로 교육청 돈이나 타내고서 적당히 굴려먹으면서 대외적으로는 무슨 혁신 선구자인양 포장하는 그런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포장되고 선전되는 만큼, 그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혁신에 대한 비토가 늘어납니다. "혁신 좋아하네. "이런 말이 늘어납니다. 삼가고 삼가며, 경계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2011. 6. 2.

만능소녀의 재주

나의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학창시절을 떠오르게 만들어서 바라보기가 무척 괴로운 학생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천재소녀라고 부르면서 경원시하는 아이입니다. 딱히 다른 아이들이 따돌린다기 보다는 본인이 다른 아이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게 버릇이 된듯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가 아닌 것은 아니기에 때로 몹시 쓸쓸해하기도 합니다. 아마 더 어렸을때는 다른 애들이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괴롭히거나 했을 것입니다. 중학교 들어와서 "점수", "등수"가 나오니까 어쩔수 없이 그 자리를 인정해 줄 뿐이겠죠.

하지만 소위 "잘하는 애들" 역시 이 아이를 그룹에 넣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별활동을 하면 대개 가장 소극적이고 비활동적인 애들을 데리고 활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다른 조원들의 정말 암담한 작품들을 가지고 포샵질로 환골탈태 시켜 놓았습니다. 왼쪽에 있는 그림이 조원들이 그린 대충 작품들, 오른쪽이 이 아이가 컴퓨터로 바꾸어 놓은 그림입니다.




그 밖에도 소설도 쓰고, 작곡도 하는 아이입니다. 수학을 아주 싫어해서 전혀 공부를 안해서 50점대를 받는데도 반에서 2등 정도는 유지합니다. 마치 나의 청소년기를 보는듯하여 그 시절의 아픔까지 고스란히 재생됩니다. 내가 수십년 전의 아픔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을줄은 미처 생각도 못했습니다. 수업시간에 이 아이를 보는 것은 즐겁기도 하면서 또 너무 버거운 경험입니다.

2011. 6. 1.

미술 및 연극과 결합한 경제 수업

이번에 소개하는 수업은 난이도가 높은(교사에게)편에 속하는 수업이다.

여기에는 만화를 이용한 수업, 직소수업, 그리고 교육연극이 모두 섞여 있는 일종의 종합적인 수업이다. 따라서 이 수업을 응용하려면 교사는 여러가지 수업을 이미 다 숙달한 상태에서 다시 이것들을 조직적으로 조합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 포스팅을 보고 섵부르게 시도하지는 말고, 만약 이 수업을 시행하고 싶으면 블로그 주인장hagi814@gmail.com이나 주인장의 공저자인 nasiny323@gmail.com 에게 미리 컨설팅을 의뢰하기 바란다. 또 이 수업을 응용하여 공개수업 등을 하려면 반드시 주인장과 공저자의 원작자 이름을 명기해주기 바란다. (돈은 필요없다^^)

나는 중학교 3학년 경제 단원에서 경제사 영역을 이 수업으로 처리하였다. 통상 경제사는 1)수렵 채집경제, 2) 농업 경제, 3) 산업 경제, 4) 지식 정보 경제 네 단계의 발전 단계를 가르치고 있다. 이 부분을 그냥 강의하거나 텍스트로 수업할 경우 학생들은 현
재가 아닌 과거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며, 어떤식으로 발전해 왔는지의 감을 잡지 못한다. 따라서 간접체험을 위해 다양한 예술적 기법이 도입되어야 한다. 또 이 단원은 까다로운 경제개념인 편익, 비용, 기회비용, 합리적 선택을 익히는 단원과 더 까다로운 수요, 공급 등을 익히는 단원 중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일종의 중간 휴식놀이의 기능을 할수도 있다.

이 수업은 대략 다음과 같은 단계로 이루어진다.
1) 학생들을 2인1조로 편성하여 경제사 네 단계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 단 네 단계를 선택한 학생들이 반드시 동수가 되어야 한다.

2) 네 단계중 선택한 단계를 교재나 인터넷 그리고 교사와의 대화를 통해 학습한다.

3) 선택한 단계를 한 컷의 일러스트로 그린다.
4) 일러스트를 모두 수합한 뒤, 각 시대가 모두 포함되게 네장씩 한 세트로 만든다. 이로써 네 시대를 그린 사람들이 모두 포함된 8명 단위의 조가 편성된다.


5) 8명단위의 조는 그림들을 분업을 통해 마무리 하고, 이를 사진을 찍거나 스캔하여 프로젝터로 보여줄 수 있게 만든다.

6) 각 그림에 해당되는 상황을 스토리로 설명하면서 학생들의 신체를 이용하여 표현한다.(조상 만들기, 움직이는 조상, 경우에 따라서는 과정드라마까지 진행) 아래 왼쪽의 사진은 학생들이 원시인과 동물, 나무 열매등을 표현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공장에서 대량생산되어 나오는 상품을 표현하고 있다.


7) 경제사 각 시기의 특징을 학습지에 정리한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교사는 이 수업에서 한 부분만 떼어서 활용해도 좋다. 예컨대 경제사 각 단계를 만화로 표현하기. 혹은 경제사 각 단계를 과정 드라마로 표현하기 등.




새로운 시대의 교육과 교육운동의 길을 찾아 출항합니다

미래의 희망과 진보를 상징하는 아틀란티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교육을, 학교를, 교사를 욕했습니까? 또 얼마나 학교를 교사를 상대로 희망을 품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교사를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막연히 학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