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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금지 조치에 대한 1년 전 생각과 지금의 생각

곽노현 교육감과 김상곤 교육감을 진보좌파 교육감이라 부르면서 그들의 인권조례, 체벌금지 때문에 교사들의 교육이 불가능할 지경이라는 조선일보의 선동이 또 시작되었네요.


이게 사실 정당성은 전혀 없는 기사입니다. 왜냐면 지난 3년간 체벌없이 인민군도 무서워서 못쳐들어온다는 대한민국 중2, 중3 담임을 계속해온, 그리고 이 놈들을 데리고 지루한 강의가 아니라 온갖가지 다양한 수업을 시도해 온 나 같은 선생들도 많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교사들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게으른 웰빙과 교사들에게는 꽤 호소력이 있는 주장입니다. 이제 한국교총은 교장, 교감이 아니라 이들 웰빙과 교사들의 대변인으로 나서고자 작정한 모양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지난해 체벌금지 조치는 정치적으로는 에러였습니다. 애초에 법으로 허용된적이 없는 체벌을 굳이 기자들 불러놓고 금지라고 할 이유도 없었고, 체벌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교사들의 지지를 모으는 시도도 부족했고(기자회견장에 이런 분들이 같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체벌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이루어져 왔는가에 대한 성찰도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태는 곽노현 교육감 보좌진들의 아마츄어리즘의 상징으로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 다행히 요즘에는 진성 진보교사들(전교조 원로들 같은 기회주의자들이 아닌)이 하나 둘 은거를 깨고 나오면서 비서, 보좌진이 이벤트성 불뚝질이라는 시민운동식 사고는 더 이상 안치고 있습니다. 오히려"학생, 교사, 학부모의 학교장 평가 강화"라는 대박을 하나 냈죠. 이건 조선일보 사설에까지 올라가면서 누가 진보고 누가 보수냐가 확연하게 구별되는 논쟁을 이끌었습니다. 물론 교장을 옹호하는 쪽이 여론에선 밀렸죠.

문득 2010년 11월에 체벌금지조치에 대해 이글루스에 썼던 포스팅이 생각나서 이리 옮겨 옵니다. 일부 내용은 지금 현실과 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그냥 고스란히 퍼다 놓습니다.

===이하 2010년 11월 포스팅 퍼온 것===

요즘 포스팅 할만한 여력이 없습니다. 네티즌들 말로 잉여력이 없다고 해야 하나요? 그나마 대안교과서 작업 같이 하는 분들 중 어떤 분은 정교수 승진때문에 정신 없고, 어떤 분은 다치기까지 하셔서 일정이 한 달 쯤 미뤄져서 말미가 났습니다. 그래서 가장 긴급한 이슈 하나를 짚어보려고 합니다.

오늘 체벌이 금지라고 "공식적으로 발표"가 났습니다. 이걸 굳이 언플식으로 발표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또 지역에 따라서는 이걸 빌미로 광분하는 녀석들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동료나 하급생들에게는 체벌 이상의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학생들이 도리어 교사에게 "이거 뭐야, 체벌이잖아?" 이런 식으로 대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가르치는 학교는 송파구에 있는 학교라서 그런지 워낙 애들이 순둥해서 별 반응없이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또 저 역시 체벌이라는 것을 최근 10년간 한 손에 꼽을 정도로 했기 때문에 별 느낌 없이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교사들은 분명 곤욕을 치루었을 것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나는 체벌을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 뿐 아니라 체벌이 반인권적이라는데는 상당히 많은 교사들이 동의합니다. 일부 비진보(차마 그 분들에게 보수라는 말을 쓸 수 없네요)적인 교사들이 체벌에 집착할뿐, 대부분의 교사들은 체벌금지의 취지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게 어떤 식으로 폐지되는가 하는 과정과 방법에 있습니다.

체벌을 하지 않으면 벌점과 학부모 소환, 그리고 성찰교실을 운영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벌점은 학생들이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학부모 소환. 안오면 그만입니다. 미국처럼 학교에서 학부모 소환을 했는데 안오면 크게 경을 치는 그런 시스템이 없는 한, 학부모가 바쁘다, 그 새끼 내논 자식이다 이따구로 나오면 답이 안나옵니다. 퇴학? 중학교는 의무교육입니다. 7일간 등교정지 외에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성찰교실? 누가 그 교실을 지킵니까? 교장, 교감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교장, 교감이 그일 하겠답니까? 그 일 하라고 했더니 교육감 면전에서 집단퇴장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중3쯤 되면 상당히 노는 학생은 거의 청소년이 아니라 전문 범죄꾼 수준까지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부 변태성 교사들을 제외하면 체벌이라도 사용하려는 교사들은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을 위해서 그것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사랑의 매 따위는 없습니다. 이때 학생들을 위해서라는 말은 얻어 맞는 학생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머지 다른 학생들을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권리는 학습권입니다. 그런 학습권을 단 서너명의 산만한 학생들만 나대도 거의 완벽하게 침해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런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의 재산권과 신체의 안전권을 훼손하기도 합니다. 즉 삥 뜯고 깝니다. 소수의 문제학생의 인권을 위해 다수의 선량한 학생들의 인권이 침해되어도 이를 방지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제는 교사 자신의 안전까지 위협받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의 교사는 동네 북입니다. 학부모가 와서 깽판을 쳐도 제지할 길이 없습니다. 학생의 아버지라는 남자가 스포츠 머리를 무스칠을 해서 빳빳하게 올리고 가죽점퍼를 입고 와서 담임 멱살을 잡아도 괜찮은 나라가, 학생의 어머니가 담임 머리채를 잡고 따귀를 쳐도 괜찮은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미국이나 영국 같았으면 그런 학부모는 그날로 인생이 끝장 났을 겁니다. 게다가 교장, 교감, 그리고 그들과 편승한 교육관료들은 교사를 행정말단직원 취급합니다. 심지어 행정실 직원조차 자기들과 같은 급에 놓고 업무 관할을 놓고 네일이네 내일이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이제 껄렁대는 학생들까지 기어 오릅니다.

자, 이제 교사들은 어떤 존재가 되는건가요?

여기에 바로 교사들의 반발에 대한 답이 있는 것입니다. 교사들은 결코 체벌에 집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체벌 사용하지 않고도 아이들 잘 다루는 나같은 교사들도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체벌 폐지가 이런 방식으로 내리먹여질때는 체벌을 하지 않는 교사, 반대하는 교사, 체벌 폐지를 위해 운동을 했던 교사들조차 그냥 두리뭉쳐져서 교사집단으로 취급 받게 됩니다. 이건 마치 이해찬 장관시절에 교사들 불러 모아놓고 촌지 안받기 선서를 시켰던 것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그때 그 굴욕감은 이루 말할수 없었으며, 이렇게 교사들에게 굴욕감을 주고서 어떤 교육개혁도 시작도 어려움을 지난 10년 정권은 잘 보여 주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교육청, 교장, 교감의 권력이 약화되고 교사들의 임파워먼트가 선행되지 않고서 교사를 학생과 교장 사이의 샌드백으로 만들어버리는 이런 식의 체벌 금지안은 진보교육감을 지지했던 교사들조차 적으로 돌리게 만드는 최악의 수라는 것입니다. 선거로 뽑히는 교육감으로서는 이보다 더 큰 실책이 없습니다.

이원희가 낙선했던 까닭은 "이제 선생님들의 경쟁이 시작됩니다."라는 구호 때문이었습니다. 이 구호가 교사들을 적으로 돌렸고, 결국 낙선했습니다. 교육감 후보가 누군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지인들 중 교사가 있으면 누구 찍어야 되냐고 물어보았고, 그대로 찍었습니다. 그 때 비진보적인 교사들조차 "곽노현"이라고 말하는 대신 "이원희는 안되"라고 말했던 것이죠. 그런데 지금 교육감의 체벌폐지 추진방식은 꽤 중도진보적인 교사들조차 "곽노현은 안돼"라고 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체벌은 제도가 아니라 관행이고 문화였습니다. 어느 학교 교칙에 무슨무슨 짓을 하면 곤장이 몇대 라는 교칙이 있던가요? 다만 상처가 날 정도로 두드려 패는 사람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을 뿐, 애 패다가 전치3주 입히면 다른 폭행죄와 똑같이 처리되는 것이 체벌입니다. 그러나 교육적인 의도라는 차원에서 패는 놈이나 맞는 놈이나 암묵적으로 인정하던 관행이며 문화가 체벌인 것입니다. 그런데 관행과 문화를 제도로 폐지하려는 것은 마치 사적소유를 법제도를 통해 폐지하려 했던 스탈린의 오류를 그대로 복사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체벌은 교사, 학생, 학부모의 문화운동을 통해 근절되어야 합니다. 특히 교사들 중 체벌 반대파를 적극적을 키워서 이들의 목소리가 비진보적 교사들의 목소리를 묻게 만든다면, 그리고 학부모가 공동교육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게끔 강제한다면, 또 교장, 교감이 소위 학주가 하는 일을 맡아서 할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둔다면 서서히 사라질 관행이고 문화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애를 때려서야 말 듣게 만들수 있다는 건 교사가 무능하다는 뜻이다라는 공감대가 퍼지게 해서 부끄러움을 알게 해야 사라질 관행이고 문화였던 것입니다. 촌지도 이런 식으로 사라졌지, 결코 무슨 법제도를 통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교육감께서 제발 몇월 며칠부터 체벌 일제히 금지, 이런식의 얼토당토 않는 언플 좀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차라리 체벌없는 학교를 만드는 교사모임 이런거를 키워서 이들을 통해 포지티브한 언플을 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교사를 교장과 학생 사이에서 새우등 만들지 말고 충분한 권한부여와 그만큼의 책무성을 부여했으면 합니다. 또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야말로 직설적인 의미에서 교사가 학생이나 학부모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합니다. 지금 이런식으로 굴러가다간 교사가 체벌이 아니라 정당방위로 학생을 때릴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저는 나이가 좀 있는 남자라서 덜 하지만 젊은 여자 교사들이 학부모는 커녕 학생들에게 느끼는 공포감은 장난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해법이 "그러니까 남자선생을 뽑아" 이런식으로 되어서는 안되겠죠. 그건 다시 남자 선생의 완력, 즉 폭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저는 체벌은 없어져야 하며,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어떤 과정을 통해 없어지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막장교실이 될수도 사랑가득 교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뒤르켐이 말했습니다. "학교는 세속의 성전이고 교사는 그 사제다."라고 교사를 새우등으로 만들고, 동네북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 사회를 콩가루로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하기사 마가렛 대처같은 지독한 신자유주의자라면 "그 사회란게 어딨어?" 이러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진보교육감 아니십니까?

=== 다시 지금 생각===
지금까진 체벌금지 조치가 발표된 당시의 생각이었고, 이제는 어떻게 할까요? 당연히 체벌 복귀 안됩니다. 대체 처벌 허용? 이것도 안됩니다. 교사는 어디까지나 합법적인(체벌이 되었든 체벌 할아버지가 되었든 어떤 형태의 폭력도 법적으로 허용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방법만을 사용하여 학생을 교육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체벌은? 애초에 체벌이란 제도는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폐지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체벌이란 낡은 관행이 있었죠. 즉 체벌이란 교장의 제왕적 군림, 관료제, 권위주의, 위계주의, 행정위주, 통제중심교육 등등의 낡은 교육관행이란 긴 사슬의 한 고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낡은 사슬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사슬의 최말단인 학생-교사의 고리가 폭압적으로 유지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체벌은 학교라는 오래된 제도의 낡고 폭압적인 문화의 한 고리입니다. 이 문화가 허물어지면 체벌은 교육의 탈을 벗고 폭행이라는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이 낡고 폭압적인 문화에 맞서는 교사들이 체벌에 반대하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며, 이 낡고 폭압적인 제도를 유지하려는 집단이 체벌을 찬성하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을 부각시켜서 체벌을 찬성하는 세력을 참으로 낡고 폭압적인 집단으로 규정지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그 반대편에 선 다만 안때리는 교사가 아니라 참된 교사인 분들의 모습을 포지티브하게 계속 강조해야 합니다. 지금쯤이면 "체벌없이 사랑을 주고받는 참 교사"에 대한 기사와 띄워주기가 시리즈로 한 10여명은 나갔어야 합니다. "체벌없다" 한다고 "와" 하고 박수 나오지 않습니다.

다음은 체벌 뿐 아니라 학교 안에서의 어떤 폭력도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사에 의한 체벌 뿐 아니라 학교 관리자의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언행은 당장 해고, 학부모의 교사에 대한 위협이나 폭행은 "특수공무집행 방해"로 고발, 그리고 동료 학생들을 괴롭히거나 금품을 갈취하는 준범죄자 학생들은 엄한 특별교육 및 사법조치. 이렇게 학교에서 인권유린과 폭력이 사라지도록 하겠다는 종합적인 대책이 제시된다면 체벌은 언급하는것조차 부끄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

자, 조선일보가 두 껀이나 논쟁을 걸었습니다. 교육감께서는 학생의 학교장 평가, 그리고 체벌 이 두껀의 도전에 당당히 응전해야 합니다. 이건 이길수 있습니다. 교육에 대한 고민도 식견도 없는데 이런 언플에도 재빨리 대응못하는 보좌관이 있다면, 대체 거기 왜 있는거냐며 호되게 야단을 쳐야 합니다. 교육은 다른 시민운동 영역과 달리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영역입니다. 매우 빠르게 의제를 선점해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빠른 의제 선점이 말을 빨리해서 될일은 아니겠죠. 보좌진들의 교육에 대한 고민과 식견이 극도로 필요한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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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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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