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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북한 학교 교장을 원하나?

서울시교육청의 학교장 평가지표가 발표되었다. 이걸 보고 조선일보가 아니나 다를까 펄펄뛴다. 링크는 저작권 때문에 걸어 놓은 것이니 굳이 들어가서 조선일보 트래픽 높여줄 필요 없다. 기사 내용은 아래에 요약한다.

조선일보의 딴지는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학생이 교장을 평가하는 항목에는 학생인권·체벌금지 등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중점 정책과 관련된 내용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건 뭐라고 말 할 수 없다. 교육감이 당연히 자기 정책 잘 따라 한 교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니. 조선일보도 이건 뭐라 할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바로 다음으로 넘어간다. 조선일보 특유의 수법인 누군지 알수 없는 "교육계" 등의 주어를 사용해서 자기 말 하기.

2. "교장이 학생들 눈치를 보느라 행정을 소신껏 펴지 못하면 학교의 권위와 질서가 무너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여기서 벌써 두개나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는 "행정을 소신껏 펴지 못하면"이란 부분이다. 정답은 행정은 소신껏 펴면 안된다. 행정이라고 하는 것은 가치 중립적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목표가 주어지면 그 목표를 충실하고 효율적으로 달성하게 하는 것이 행정이다. 선출직인 교육감이 "학생인권, 학생 만족"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했으면, 최대한 학생의 눈치를 보는게 행정이다. 학교는 학생의 행복을 위해 있는 것이지 교장의 소신을 위해 있는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교장의 행정적 소신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다.

행정에 교장의 소신이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은 비선출직인 행정관료들이 마치 국회의원처럼 자기 소신껏 정책을 펴도 된다는 무시무시한 발상으로 넘어간다. 이렇게 비선출직들이 자기 정치적 판단을 마구 부리는 나라는 지구상에 몇 없다. 그 중 하나가 북한이다. 하긴 조선일보는 신문 이름도 조선 아닌가?

둘째는 학교의 권위와 질서가 무너진다는 협박이다. 교장이 행정을 마음대로 못하면 학교의 권위와 질서가 무너지나? 그럼 대통령이 국민눈치를 보기 때문에 정부의 권위와 질서가 무너진다는 논리도 바로 도출된다. 이건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겠다는 뜻이다. 교장의 권위는 학생과 교사를 강제할 수 있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학생과 교사의 자발적인 협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과 교사의 눈치를 많이 본 교장일수록 더 권위가 설 것이며, 그런 학교일수록 오히려 아무런 제재 없이도 질서가 잘 잡힐 것이다. 교장이 학생 눈치를 보지 않고 그들의 알량한 소신을 내세우는 학교일수록 겉보기에는 질서가 잡혀 보일지 몰라도 학생과 교사는 교장을 무시하고 서로 반목하고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교장이 학생 여론을 무시하고 내세울만한 어떤 소신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전제조차 틀렸다.


3. 시교육청은 지난해 교장 평가(100점 만점)에서 학부모 만족도와 교사 만족도에 각각 10점씩 배점을 주었다. 올해는 초등학교의 경우 학부모 만족도 20점, 교사 만족도 20점씩 40점으로 크게 늘렸다. 중·고교에서는 학부모 만족도 15점, 교사 만족 15점에 학생 만족도 10점을 더했다. 이에 따라 올해 교장 평가는 100점 만점 중 교사·학부모·학생 만족도가 차지하는 비율이 40%에 이르게 됐다.
반면 학교별 학업성취도는 '학교 간 경쟁을 과열시킨다'는 이유로 2년 연속 교장 평가지표에서 빠졌다.

결국 하고싶은 말은 교장이 학교의 주인인 학생들의 의견을 얼마나 잘 들었나가 아니라 점수 얼마나 높였나로 평가하라는 것인 모양이다. 그럼 차라리 이 사람들을 학교장이 아니라 학원장을 시키는 것이 낳겠다. 학교는 사회의 모형이며 미래다. 점수는 부차적인 것이며 우선은 학생들이 장차 살아가고 만들어갈 사회의 비전을 가지고 거기 필요한 태도를 갖추게 하는 것이 주요임무인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 국가에서 통치자를 국민이 직접 평가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그 대신 작업성과만 가지고 경쟁하라고? 이거야 완전 수령님 지휘하에 닥치고 일이나 해야하는 북한 체험소로 학교를 만들겠다는 주장이 아니고 뭐겠나? 조선일보는 자꾸 자유민주주의자인척 하지 말고 제호 그대로 조선의 신문임을 커밍아웃 하는게 낳겠다.

4. 교장과 교사들은 이번 서울시교육청의 조치에 대해 "교장이 여기저기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학교 경영을 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를 나타냈다. 서울의 공립 중학교 A교장은 "이대로라면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고 교사와 학부모 비위를 잘 맞추는 교장이 '모범 교장'으로 평가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계속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면서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인용을 따서 앞에서 했던 말을 또 하고 있는데, 이 기자가 인터뷰를 하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결국 교장이 학부모, 교사, 학생 눈치를 보고 인기영합정책을 펴면 학교가 망한다 뭐 대충 그런 취지의 말이다. 요즘 유행하는 포퓰리즘 때리기의 연장선상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다음 두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첫째 , 지금까지 학교가 제대로 잘 운영되었다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둘째, 그렇게 잘 운영된 중심에 소신있고 유능한 교장의 리더쉽이 있었다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에는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주호 장관조차 야당 시절에는 교장제도를 싹 갈아치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녔으니, 현재의 교장들에게 만족하는 사람은 교장들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교장들이 이렇게 엉망이 된 원인으로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는 제왕적 권력"을 제시하는 것은 이제 거의 상식이다. 그런데 여기에다 놓고 겨우 "학생 눈치 보는 교장은 안된다"라고 반발하는 모습은 구차하다. 더군다나 인기영합이란 말은 유치하기까지 하다. 실제 학생, 교사 만족도 조사의 지표는 인기투표가 아니다. 구체적인 지표들이 제시되고 있으며, 이 지표들은 모두 교육감의 정책과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책은 일관되게 민주주의로 연결되고 있다.

교사는 학생의 눈치를 보고, 교장은 교사의 눈치를 보는 학교는 사실 아주 바람직한 학교다. 훌륭한 지도자 한 사람이 아랫것들에게 소신껏 주장을 펴며 정치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신적인 존재"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그 차선책은 "다수"에 의한 통치일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수"가 적어도 "인간 소수"보다는 훌륭하기 때문이다. 이게 민주주의의 기초다. 그리고 학교에서 다수는 학생이며, 교장이라는 1인은 당연히 신적인 존재도 아니며, 교육자들 중에서도 훌륭한 편에 속하지 못하느 살마들이며, 행정가로서도 무능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당연히 다수에 복종해야 하며, 다수의 뜻에 따라야 하며, 다수의 뜻을 알기 위해 늘 눈치를 봐야만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출판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는 까닭도 통치자에게 늘 시민의 눈치를 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에 거부감이 느껴진다는 것은 그만큼 권위주의가 뿌리깊게 박혀 있다는 뜻이다. 권위주의가 몸에 인이 박혔기 때문이다. 교장이 "아랫것"의 눈치를 본다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 그리고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들인 자유민주국가의 시민으로 살아갈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눈치 운운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모아다가 중학교 3학년 사회부터 다시 가르쳐야 한다. 만약 나한테 보내준다면 대한민국 최고 사회교사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는 내가 책임지고 민주시민으로 양성시켜 줄 용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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