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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진보교육감 비판이라고 나온게 매때리기인가?

바야흐로 진보교육감 취임 1주년을 맞이하여 조중동이 분주하다. 이걸 축하할 수는 없고 뭐라고 까기는 해야 하겠는데, 까자니 마땅한게 없다.

이를테면 무상급식, 이건 교육감만의 사안이 아니고 잘못하면 전국적 이슈로 휘말리니 조심스럽다. 혁신학교. 이건 원칙적으로 조중동도 반대하기 어려운 사안이다. 그러니 기껏 딴지 건다는게 혁신학교는 전교조 학교냐 정도인데, 이것도 승진가산점 안받고 더 고생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모인 교사들이 하필이면 전교조였네 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고르고 고른것이 마침내 "체벌"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학교에서 애들 때려야 한다는 주제가 대 조선일보 사설까지 올라간 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이슈가 이제 사설까지 올라왔다.


이 사설의 논리는 간단하다. 좌파교육감이(곽노현, 김상곤 두 교육감 보다 훨씬 더 왼쪽에 있으면서도 좌파로부터 개량주의자 소리를 듣는 필자 입장에선 놀라운 표현이다) 학생 인권 세운다는 미명하에 교권을 추락시켜서 공교육이 무너진다, 공부 하겠다는 학생들의 인권도 인권이다 뭐 대충 이런 논리다.

그러면서 제목도 아주 선정적으로 뽑았다. "매 맞는 교사, 무너지는 교실"

그런데 참 얄궂기도 하다. 하필이면 그 사례로 꼽은 고교생 교사 안면가격 사건은 보수교육감 중 가장 수구적이라는 울산에서 일어난 사례다. 조선일보의 그 뛰어난 취재능력으로 어째서 서울이나 경기에서 진보교육감 당선 이후 늘어난 교권침해 사례를 찾아내지 못하고 하필 보수감 지역의 사건을 머리로 올렸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만약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체벌 금지 때문에 교권이 무너졌다고 주장하려면 다음의 두 가지를 입증해야 한다.

첫째, 최근 몇년 사이에 교사에 대한 폭언, 폭행 사례가 의미있게 증가했어야 한다.
둘째, 체벌이 줄어들때 마다 교사에 대한 폭언, 폭행 사례가 늘어난다는 유의미한 통계자료가 제시되어야 한다. 게다가 이건 다른 변인들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예컨대 일제고사 때문에 학생들의 스트레스가 증가되었거나, 혹은 막장 드라마의 영향이거나....

또 교실이 무너졌다는 표현도 일간지 사설에서 함부로 나불거릴만한 단어가 아니다. 난 20대때 때리기도 했다. 젊고 미숙하기에 아이들에게 얕잡히지 않으려고 더 그랬던것 같다. 40대 중반인 지금 애들은 나를 "정색마왕"이라고 부른다. 웃고 있다가도 꾸짖을 일이 있으면 너무도 엄하게 정색하기 때문에 정말 무섭다는 것이다. 물론 때리는건 물론 업드려 뻣쳐, 심지어 손들기나 무릎꿀리기조차 한적 없다. 그러나 내 교실은 무너지긴 커녕 정말 살아 움직이는 교실이다.

그 이유는 내가 잘났거나, 내가 학생을 잘 다루는 비법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학생들과 소통하고, 학생들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래포가 형성된 교실은 체벌이 필요 없다. 그리고 이런 래포는 교사가 학생과 마음껏 소통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길때 비로소 가능하다. 나는 나이가 40줄 넘어 교장, 교감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된 다음에야 바로 이런 자유와 래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애들은 조용히 있으나 아무도 수업은 하지 않고, 선생도 학생도 모두 침묵 속에 시간 가기만 기다리는 교실.. 바로 그게 무너진 교실이다. 아니 그건 무너진 정도가 아니라 죽어버린 교실이다. 학생이 때론 교사에게 태클도 걸고 항의도 하고, 그러면서 협상도 하느 교실, 이건 무너진게 아니라 살아 약동하는 교실이다.

죽은 교실은 물론 무너지지 않는다. 이미 죽었는데 뭐가 더 무너지겠는가? 그런데 이런 교실이 교육보다는 행정에 관심이 많은 교장, 교감, 그리고 보수적인 교육관료들 눈에는 질서잡히고 안정적인 교실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교실은 때론 휘청거린다. 그리고 그 휘청거림을 함께 바로잡고 다 같이 성장한다.

그러고 보니 교사가 맞는다. 교권이 무너진다 등의 이야기는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2006년에도 똑 같은 사례로 지역신문에서 개탄했으니


공교롭게도 5녀전이나 지금이나 교사가 얻어맞고 교권이 무너지는 지역은 진보교육감과 가장 거리가 먼 지역들이다. 그렇다면 교권을 추락시킨 장본인은 오히려 보수교육감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사실 그럴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그들은 실제 교권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제고사에 대해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하루아침에 해직교사를 만들어버리고, 성실하게 교육하는 교사보다는 돈 봉투 갖다 바치는 교사를 더 높이 평가하고, 갖가지 전시성 사업 벌려서 드러내기 좋아하는 교사는 유능한 교사로, 바깥에 눈돌리지 않고 아이들에게만 신경쓰는 교사는 안일하고 무능한 교사로 탈바꿈 시키는 상황이 교권 유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자기들은 뒷짐지고, 교사들에게 교사들조차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가지자지 학생 사생활 간섭과 통제로 내몰고 있는데, 이게 교권 유린이 아니면 무엇인가? 어린 학생들을 다만 교육감 실적 올리기 위해 8시 9시까지 남겨서 보충수업을 시키고, 여기에 대한 교사들의 의견은 일절 무시하고 있으니 이게 교권 유린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또 어느결엔가 교육수요자란 말을 퍼뜨려서 교사를 교육자에서 일개 교육 서비스 상품 판매자로 격하시키고, 학부모를 공동교육자에서 위대한 "고객님"으로 바꾸어 버렸으니, 이게 교권유린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아니, 고객이 서비스 회사 점원에게 막말좀 하고 손좀 썼기로서니 뭐가 문제인가? 고객은 왕 아닌가? 교육수요자란 용어를 거침없이 쓴 신문에서 교권 추락을 운운하니 참 우습기까지 하다.

이렇게 교과부가, 교육청이 교권을 무시하고 있으니 학생이 교사를 무시하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최근들어 교사에 대한 폭행이 의미있게 증가했다는 증거를 본적이 없다. 하지만 만약 있다면 그 원인은 교사를 말단 공무원 취급한 관료주의와 보수교육감들, 그리고 교사를 서비스 판매점 점원으로 만들어버린 신자유주의 교육정책 입안자들이 바로 그 원인제공자라고 말할 것이다.

사실 진보교육감 취임 1주년을 맞이하여 보수언론에서 뭐라고 공격할지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상대가 세게 나와야 나도 흥이 나는 법인데, 그들의 실력이 이 정도 밖에 안되니 더 이상 대거리할 흥이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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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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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