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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포머3, 그리고 평창

평창올림픽 발표가 나기가 무섭게 조성되는 이 무서운 분위기, 평창올림픽에 대해 우려하거나, 그렇게 잘된 일이 아니라는 말을 하면 즉시 "기수제외"될듯한 분위기를 보면서 우리나라가 아직도 잠재적 파시즘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공포를 느꼈다.

그제서야 비로소 많은 젊은이, 그리고 청소년들이 영화 트랜스포머의 스토리나 설정이 엉터리라고 외쳐댄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이 트랜스포머의 설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근거는 어째서 옵티머스 프라임은 자신들과 생판 관계 없는 지구인을 지키기 위해 같은 동족들과 치열하게 싸우느냐는 것이다. 지구인들이 특별히 뭘 잘 해준 것도 없고, 그냥 거기서 트럭으로 스포츠카로 숨어 살면 그만인 것을 왜 지구인을 정복하려는 디셉티콘과 싸우느냐는 것이다. 어차피 상관 없는 일인데...

여기에는 바로 우리나라에 오랫동안 만연된 "국익"의 이데올로기, 심지어 좌파라 불리는 집단들 중 상당수를 엉뚱하게 '민족주의자"로 만들어 버린 국익의 이데올로기가 면면이 흐르고 있다. 우리민족이 우선이다. 다른 종족은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줄때만 관계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떤 가치도, 이상도 없다. 이런 의식을 담고 사는 사람들이니 옵티머스 프라임이 "나는 자유를 배웠고, 자유를 위해 싸운다"라고 하는 말이 공허하게 들릴 것이다. 이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사람들은 그리스 독립전쟁에 지원해서 싸운 유럽 여러나라의 지식인들, 그리고 스페인 내전에 참가해서 공화정을 지키려고 싸운 전세계의 지식인들의 말도 공허하게 들릴 것이며, 영국이나 미국의 2차세계대전 참전을 순전히 대공황 극복을 위한 경제적인 이유로만 해석할 것이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 이상한가? 만약 대한민국이 독재국가인데 아주 강성한 국가라고 하자. 그리고 당신은 이 대한민국의 독재정부와 치열하게 맞서 싸우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대한민국이 만약 중국을 침략해서 중국인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만들고 있다고 하자. 그럼 당신은 중국인들을 위해 총을 들고 한국군과 싸우지 않겠는가? 나는 기꺼이 그럴 것이다.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 물론 당신이 평범한 소시민이라면 이상하게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정치적으로 진보이며 정의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여긴다면, 그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것이다.


이제 평창으로 돌아와 보자. 평창과 달리 뮌헨과 안시에서는 많은 주민들이 올림픽 유치 반대 시위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올림픽 때문에 알프스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훼손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올림픽을 하려면 가장 많은 자연의 파괴가 불가피한 평창에선 이런 목소리가 완전히 묻혔다. 만약 끄집어 내었다가는 몰매맞을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도 97년에 무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반대 시위를 하다가 무진장 지역의 억센 사투리로 무진장한 욕과 위협을 들었던 경험이 있다. 그때도 국익, 그리고 지역경제를 위해 "덕유산 국립공원"따위는 갈아 뭉개도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만찬가지다. 평창은 비록 남한에서는 가장 추운동네라고는 하나 동계올림픽을 할만한 지역은 아니다. 고도도 충분하지 않고 자연설 지역도 아니다. 이런 곳에 동계스포츠 경기장을 지으려면 멀쩡한 숲을 갈아 엎어야 한다. 그 동안 강원도의 생명이며 자랑이며 보물이었던 숲을. 그걸로도 모자라서 특별법 까지 만들어서 도로며 철도며 마구 깔아서 사실상 수도권에 편입시키려고 한다. 관광객 편의를 위해서... 그 결과 난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청정 강원도의 모습이 어떻게 될지 안봐도 훤하지만 정작 주민들은 그 덕에 아파트 받고 땅 값 올라갈 꿈까지 꾸고 있다.

이미 지난 릴리함메르 동계올림픽때부터 "환경보존"이 강조되어 왔다. 그렇다면 뮌헨이나 안시처럼 기존의 시설을 재활용할 수 있고, 굳이 새로이 자연환경을 파괴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 올림픽을 유치하는 것이 옳다. 물론 그냥 소시민이라면 언론에서 떠드는 대로 박수를 쳐도 된다. 하지만 적어도 진보라면, 지식인이라면, 마냥 박수만 칠 일이 아니다. 올림픽 정신의 훼손을, 심각한 환경파괴에 대한 우려를, 난개발에 대한 반대를, 그리고 20조라고 선전하는 경제적 효과에 대한 허구성을(GDP가 1000조원이 넘는 우리나라에 20조 유발효과 따위....) 말하는 것은 이들의 당연한 책무다. 그런데 소위 진보, 지식인들 조차 올림픽 유치에 대해 그다지 기쁘지 않다고 말하면 쌍심지를 켜며 '너 어느나라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진보좌파마저 민족주의, 국수주의자가 탈을 쓰고 들어 앉았으니...

그건 그렇다 치고, 어떤 반대의견, 다른 의견도 용납하지 않고, 그런 의견이 들리면 분노로 화답하겠다는 그런 태도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이게 바로 파시즘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2002년 월드컵때부터 별로 좋지 않았던 현상이지만 아직도 치료되려면 멀었나 보다.

난 옵티머스프라임의 노선을 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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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