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정 졸속을 교과서 폐지의 계기로

내가 풍성중학교에 부임한 것이 2008년이니까 지금 3년 반이 지났다. 그런데 그 3년 반 동안 세개의 교육과정이 적용되었고, 이제 내년에 또 바뀐다고 한다. 지금 우리 학교 1,2, 3학년이 각각 적용되는 교육과정이 다르다. 3학년은 7차교육과정, 2학년은 2007개정교육과정, 1학년은 2009개정교육과정. 그런데 또 교육과정을 개정하고 교과서를 다시 만들라고 한다. 그리고 시간은 6개월 준다고 한다. 이건 교과부가 제정신이 아니다. 그리고 교육학 박사들이 득실댄다는 교육과정평가원은 이런 상황에서도 꿀먹은 벙어리로 앉아서 EBS문제집이나 뒤지고 있다.


2008~2009년에 걸쳐 고등학교 사회교과서를 집필했던 나는 그 공들여 만든 교과서가 몇년 써보지도 못하고 폐기된다는 소식에 기가 막혔고, 그래서 교과서를 새로 써달라는 출판사의 요구를 거절했다.

더군다나 사회과 교사 입장에서 바뀌게 될 교육과정, 그리고 교과서가 너무 가관이다. 소위 시장경제의 원리라는 것이 완전경쟁시장을 가정하고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따라서 현실의 시장은 그렇게 요술방망이 같이 척척 들어맞지 않는다. 도대체 프리드먼의 생애소득가설, 루카스의 합리적 기대 가설 같은 판타지의 도움을 받아야만 정당화되는 시장만능주의가 현실의 시장과 다르다는 것은 주류경제학자들도 다 인정하는 내용이다. 오직 그걸 부정하는 집단은 정치적인 신자유주의자들, 그리고 멋대로 행동하고 싶어하는 금융자본가들 뿐이다.

그런데 그게 교과서에 반영되었다. 모든 경제학개론에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시장실패"부분이 교육과정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 "자산관리" 단원이 들어갔다고 한다. 이거 정말 환상적인 그림이다. 그러니까 시장만능주의를 믿고 거기에 맞춰 자산관리를 하라는 소리다. 그 결과가 자산상실임은 불문가지! 게다가 경제주체로서 노동자와 관련한 내용도 모두 사라졌다. 이제 우리 모두는 절대 문제 생길리 없는 시장에서 선량한 기업가가 하는 일은 절대 간섭하지 말고 주는대로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라는 것이다. 월급 주면 고맙고, 해고하면 노동력의 시장 조정이려니 하고....

하지만 그런다고 그들이 원하는대로 될까? 이렇게 현실과 완전히 괴리된 판타지 교과서는 결국 웃음거리만 된다. 더군다나 그게 6달만에 졸속으로 만들어진다면... 어느 교수의 말마따나 6개월은 좋은 교과서는 커녕 엉터리 교과서 만들기도 힘든 시간이니까. 이제 우리는 내년에 교과서가 아니라 코메디 대본집을 구경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잠깐 달리 생각하면 이게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어차피 국가가 독점하는 교육과정, 그리고 거기에 맞춘 획일적이고 일방향적이고 개정이 매우 어려운 경직된 교과서라는 교육모형 자체가 사라져야할 낡은 모형이니까. 그러니 이 참에 교과서가 조롱거리가 되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차라리 잘 된 일이다.

시장만능주의에 경도되어 멀쩡한 현실을 감추는 정치적으로 편향된 뉴라이트 교과서라고 마음껏 비웃어주자. 교과서만 바꾸면 교사와 학생이 저절로 따라갈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들의 행위는 이제 사라져가는 제도권 교과서에 마지막 일격을 스스로 가하는 것이 될 것이다.

빛의 속도로 바뀌는 비트의 세계, 온 세계의 다중지성들이 연결되는 네트의 세계에서 미리 정해진 목차에 따라 편협하게 제작되는 교과서가 설 자리는 없다. 어차피 아이들은 교과서를 통해 세상을 배우지 않게 된지 오래다. 이미 기능적으로는 사망한 교과서가 다만 관행과 권위에 의해 유지되어 왔는데, 그 권위마저 조롱받는다면 더 이상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교과서의 영향력을 무시할수 없지 않느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그래서 진보진영은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대안교과서, 대안교재도 끊임없이 개발해야 한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양식있는 사회선생들이 모여서 시장의 장단점을 모두 고려한 "제대로 된 경제교과서"를 제작중이며, 곧이어서 "제대로된 정치교과서"도 제작할 것이니. 이제 저들이 저렇게 나온다면 졸속적인 제도권 교과서는 버리고, 제대로 된 우리의 교과서로 수업하자. 지금까지의 대안교과서와 달리 이번에 개발중인 대안교과서는 수능준비도 충분히 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대안교과서도 대안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고정된 교과서가 아니라 지식생태계의 한 허브가 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일지는 기술적인 문제가 되겠지만, 어떤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분명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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