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 교육감과의 추억


이제 곽노현 교육감 흔들기가 거의 무력화된 것 같습닏. 법적 판결이란게 워낙 고무줄이라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정치적, 도덕적으로는 오히려 더 단단해진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교육감도 이번에 분명히 배운 바가 있을테니 앞으로 더 큰 인물이 될것으로 기대합니다.

8월29일 그 운명의 밤에 이틀동안 거의 밤을 새다시피 폭풍 트윗을 했습니다. 그리고 뉴스페이스에는 트위터의 여론의 전환점을 만든 공로자라고 저를 감당못하게 추켜세웠습니다. 저 역시 무슨 힘으로 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곽노현 교육감을 직접 만나 보지 않고서는 느낄수 없는 존경과 애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아, 그렇다고 제가 측근은 아니니 헛물켜지 마시고요. 저와 곽교육감의 인연은 이렇습니다.(옛날 포스팅의 링크가 계속 나오는데, 뭐 꼭 다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 당선이 확정된 다음날 저는 이렇게 희망찬 제언을 했었습니다. 당시에는 이글루스에 있었습니다. 그 제언은 나름 구체적이었고, 어찌보면 지금 곽노현 교육감의 정책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교육감께서 이 포스팅을 보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에는 일단 전교조의 명망가들 중심으로 TF들이 구성되었고, 전교조 명망가들은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차단되었을 것입니다.

첫번째 포스팅

전교조 명망가 중심으로 곽노현 교육감이 마치 전리품처럼 취급되는 모습을 보고 뭔가 불안감을 느끼며 썼던 썼던 포스팅입니다. 마지막에 제발 곽노현은 노무현 처럼 만들지 말자라고 절규하고 있는데, 1년 전에 이미 그런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두번째 포스팅

그런데 취임 첫날부터 저는 곽빠 보다는 곽까에 가까웠습니다. 첫날부터 실망감을 토로해서 이건 너무한거 아니냐는 반응을 듣기도 했습니다. 포스팅 뿐 아니라 트윗으로도 교육감에게 직설적인 비판 멘션이나 DM을 펑펑 날리곤 했습니다. 그걸 보고 누가 필명으로 용감한건 누가 못하냐 그래서 소속학교와 이름을 밝힌뒤 날렸습니다.
세번째 포스팅

심지어 체벌금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체벌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며, 10년래 체벌을 사용한 횟수가 한손으로도 꼽습니다만, 어쨌든 체벌금지라는 방식은 또 다른 폭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네번째 포스팅

물론 조중동의 어이없는 공격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쉴드도 쳐 주었습니다.
다섯번째 포스팅

하지만 2011년 4월. 이제 취임 10개월째. 우왕좌왕한다는 느낌을 주는 서울시교육청의 모습을 보며 몇몇 진보적인 교육운동가들과 상의하고 "이대로라면 서울교육은 물론 진보진영을 망신시킬수도 있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때까지도 저는 곽까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되어 지금까지보다 더 직설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심지어 포스팅 마지막에

 "일단 이 글을 멘션으로 날려 봅니다만, 과연 읽으실지 안 읽으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거야 교육감님의 혹은 이글을 쓰는 사람의 운수소관이겠죠" 

다소 무례하고 냉소적인 문장까지 덧붙였습니다.
여섯번째 포스팅

날려놓고 나니 살짝 겁이 났습니다. 아무리 진보고 아무리 선량하지만 이렇게 번번히 까대는 일개 평교사를 교육감 입장에서 얼마나 고깝게 볼까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육감 수행비서입니다."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리고 "hagi87 부정변증법 맞으시죠?" 라는 겁니다. 순간  머리털이 쭈뻣 섰습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필명을 추적해서 전번까지 땄지? 아이쿠 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주 교육청으로 불려갔습니다. 교육청 근처 어느 식당에서 보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난 이판사판, 교육의 바른 길을 위해 교육감 앞이라도 쫄지 말고 할말 다하자 이런 각오로 하룻밤만에 A4 15매 짜리 글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가는 전철 안에서 계속 읽고 읽으며 입에 말이 밸때까지 익혔습니다. 그 문서는 교육감과 그 보좌진을 "교육의 문외한이자 아마추어"라고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조중동의 공격의 대상이 되어야지 조롱과 빈축의 대상이 되어선 안된다는 말도 들어 있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정말 기분나쁠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육감과 대면했습니다. 측근들과 함께 있더군요(그 측근들 중에는 이번에 "사퇴하라!"하고 외친 단체의 대표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시간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분으 일개 평교사에 불과한, 그리고 운동권이나 전교조의 라인을 타지 않은 그야말로 밑바닥인 저의 말 하나하나를 귀기울여 들었습니다.

이때 제 느낌은 1)너무 선량하다 2)무섭게 영리하다 였습니다.  과장 하나 없이 44년동안 이렇게 악의가 없는 사람은 또 이렇게 머리 좋은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그래서 바짝 긴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제안이나 말의 요지를 한 두마디 들으면 바로 파악했고, 진부하거나 구태의연한 화제에는 금새 지루함을 드러냈습니다. 스스로 "나는 교육학에 대해 무지하다. 당신이 교육학 박사니 좀 많이 가르쳐 달라"고 말씀하셨지만, 이미 나와 이야기 하는 동안 교육학의 핵심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공부하고 고민해야 할지 다 파악한 것 같았습니다. 또 그는 매우 치밀하고 분석적이라서 이야기의 빈틈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파고들어왔고, 거기에 대해 상대가 방어하면 다시 파고들면서 논쟁하기를 즐겼습니다. 물론 자신의 말에 대해서도 상대가 멍거니 듣기보다는 논쟁을 걸어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상대가 젊건 늙었건 지위가 높건 낮건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마디, 한 마디 진심을 담아 공들여 말했습니다. 그리고 A4종이 뭉치도 드렸고, 엉뚱하게도 국궁 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제가 권력 앞의 두려움을 무릎쓰고 용기내어 했던 말들을 교육감이 직접 실천에 옮겼습니다. 바로 평교사와 교육감의 대화 가 개최된 것입니다. 수십명의 평교사들이 모여들었고, 교육감은 이들의 열화와 같은 항의, 그야말로 집중포화를 당했습니다. 세상에 평교사들이 교육감에게 이렇게 달려들어 삿대질(?) 할 날이 또 올수 있을까요? 이 토론회는 원래 예정 시간인 9시반을 훨씬 넘겨 11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성에 안 찬 몇몇 선생님들이 남았고, 그 분들은 아마 교육감과 맥줏잔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전교조 간부도, 고위 교육관료도 아닌, 그날 첨 만난 평교사들인데 말입니다. 그날 모임이 끝나면서 교육감은 과감하게 "지난 10개월간 나의 정책은 선무당이 사람잡은 정책이었다."라고 스스로 공개비판했습니다. 그리고 교사들에게 혼란과 어려움을 준 것을 사과하고 어떤 정책도 교사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고서는 시행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2011년 5월 이후 그 약속은 쭉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1년 5월 이전의 우왕좌왕 곽노현은 교육개혁의 선두 곽노현으로 변신했습니다. 처음 만났을때 뜻대로 잘 안되어 곤혹스러움과 걱정에 가득 찬 교육감의 모습은 점차 확신과 자신감에 찬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실 저는 처음에 교육학박사이자 20년 경력의 교사, 6년 경력의 사범대 강사로서 법학 교수인 교육감에게 교육에 대해 한 수 가르쳐 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교육철학과 신념을 교육감을 통해 구현해 볼 기회를 찾아보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생각인지 깨달았습니다. 한때 까에 가까웠던 까칠했던 나의 마음은 커다란 존경심으로 바뀌었습니다.

특히 식당에서 교육청으로 돌아가는 길에 길가에 핀 꽃 한 송이 한 송이마다 그 아름다움에 경탄하며 사진도 찍고 향기도 맡는 모습을 보며 이 분의 "문예체 활성화 교육"이 괜히 나온게 아니라는 것도 느꼈습니다. 꽃 좋아하고 책 좋아하는 사람 중 악인이 없다죠? 그래서 저는 선의로 2억을 쾌척했다는 말을 듣고 별로 놀라지 않았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냐 하겠지만, 직접 가까이서 만나본 입장에서는 그 정도는 너무 당연하게 느껴진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만약 내가 큰 어려움에 처해있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안면몰수하고 교육감에게 "그때 블로그로 막 까대다가 한번 불려왔던 중학교 선생입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하고 계속 읍소하면 차마 외면하지 못해서 어떤 도움이라도 주려고 할 것이라는데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그 화창했던 봄날 꽃을 보며 이렇게 화창하게 웃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다시 이렇게 웃는 모습을 신문 방송을 통해서나마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2011년 4월의 어느 날, 화창한 역사박물관 뒷뜰에서의 이 한 컷의 사진을 저는 정말 소중하게 간직하고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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