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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기와 곽노현(사진으로 보는). 그래도 석연치 않은...


박명기 교수의 변호사가 "댓가성을 부정"한 인터뷰가 나온 뒤 그 동
안 박명기를 오해했다 등등의 말이 나오고 환호작약이 터져나오고 있다. 나는 시종일관 박명기 본인보다는 그 측근중에 부도덕한 누군가 A씨를 지목
하고 있었는데, 그게 사실인듯 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인터뷰가 석연치 않다. 왜냐하면 이변호사 본인의 말 대로 변호사가 해야 할 일은 법정에서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지 언론 플레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댓가성을 부인하고 검찰의 언플임을 확신한다면 오마이 기자와 인터뷰를 할 것이 아니라 수임 직후 바로 구속 적부심을 신청했어야 했다. 기소 전 구속영장의 기한이 10일이니 이
제 기한이 다 되었을 것이고, 필경 검찰은 1회에 한하여 더 연장할 것이다. 그걸 막는게 바로 변호사가 할 일인 것이다. 그래서 박명기 교수가 구속상태에서 풀려 나와서 인터뷰를 하던 기자회견을 하던 해야 그게 올바른 방향이다.

게다가 "사퇴 댓가는 없었다." "실무진들은 경비보전을 협의하고 있었다."라는 말도 해괴하다. 기존 판례들을 보면 후보사퇴의 댓가와 선거비용 보전을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고단수 떡검 2중대가 아닐까 살짝 걱정이 드는 것은 기우일까? 하지만 또 다른 관점이 있을수도 있다. 그건 사퇴 전과 후의 박명기 교수와 곽노현 교육감의 관계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즉 후보 단일화를 협상하던 상대방에서, 그 어려움에 안타까움을 느낄수 있는 가까운 사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 사진은 두 후보가 단일화를 발표할때의 모습이다. 가히 어색함의 종결자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이다. 이해학 목사의 증언대로라면 곽노현 당시 후보는 박명기 측을 신뢰하지 않고, 박명기 측은 억지춘향 격(완주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사실상 백기투항)으로 단일화 한 셈이니 어색할 수 밖에 없다.

이 사진은 출구조사 결과가 나왔을때의 모습이다. 곽노현 후보는 출구조사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듯 담담하지만 박명기 교수가 오히려 기대 만빵인 모습이다. 그런데 박명기 교수의 위치를 보라. 후보 부인 바로 옆에 있다. 사퇴 후보의 예우? 그럼 다른 사퇴후보인 이부영, 최홍이, 이삼렬 후보는 어디 있는가? 박명기 후보는 단지 사퇴한 것이 아니라 곽노현 후보의 선거운동본부장을 맡았던 것이다. 즉 곽노현 후보의 측근이 된 것이다. 사퇴한지 2주동안 둘 간의 관계가 많이 개선된 것이다.




이 사진은 개표방송을 초조하게 보다가 잠시 선거사무소를 떠났던 곽노현 후보가 다시 선거사무소를 찾아서 당선이 유력해지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는 장면이다. 여기서도 박명기 교수가 다른 사퇴후보들과 달리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후보자 본인보다 더 좋아하는 얼굴은 분명 정치적으로 꾸민 얼굴은 아니다. 즉 박명기 후보는 단지 곽노현 교육감의 경쟁후보였다 사퇴한 후보가 아니라 선거운동기간 내내 고락을 함께한 최측근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2억의 선의를(엄밀히 말하면 2억의 이자 한 1000만원? 뇌물치곤 초라....)입증하기 위한 개연성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실제 박명기 후보가 곽노현 당선자와 사이가 틀어진것도 돈문제 때문이 아니라 박교수가 천거한 인사들을 곽교육감이 중용하지 않아서라는 설이 중론을 이루고 있다. 그랬다가 11월에 강경선 교수의 중재로 둘 사이의 관계가 다시 형님, 아우 관계로 회복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교대 총장선거가 있었고, 또 낙선한 박명기 교수의 상황이 몇 달 뒤에 거의 한계상황에 이르렀을 것임은 거의 분명하다(이 무모한 선거중독은 비판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선거운동 책임자였고, 동료였던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있다면 당연히 자금을 융통해 주는 것은 도리이며,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일이다. 만약 박명기 교수 말고 다른 선거운동 책임자가 그런 처지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틀림없이 자금을 융통해 주었을 것이다. 즉 2억은 박명기 교수가 경쟁후보였기 때문이 아니라(그런 생각을 전혀 안할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선거운동시 측근이며 동료였기 때문에 지원해 준 것이다(그리고 곽노현 교육감의 과거행적을 보면 친구에게 아주 후했던 사례는 여럿 있다).

또 다른 팩트인 선거비용 보전 부분.(사실 이건 불법이다. 이런 말을 꺼낸 변호사의 저의가 이상하다.) 이건 추측이지만 박명기 후보의 사퇴가 그냥 사퇴가 아니라 두 후보의 선거운동캠프의 합병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후보가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후보를 포함한 그 후보의 선거운동 집기, 사무소, 그리고 그떄까지의 선거운동 성과, 정보등이 모두 곽노현 후보캠프에 인수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선의로 지금까지의 성과와 집기 등을 그냥 내어 줄수는 없다. 후보들과 달리 선거 운동을 담당하는 선거전문가들은 냉혹하고 계산적이다. 사무실 보증금 얼마, 유세차 몇대에 얼마, 책상 몇개, 컴퓨터 몇개 등등을 꼼꼼하게 사정할 것이다. 비용 보전이라기 보다는 중고캠프 매입에 가깝다. 이 와중에 실무자들간에 설왕설래가 오고 가는 것이다. 이 설왕설래를 이리저리 짜집어서 편집하면 꼭 후보매수거래같이 들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인수시킬 대상 없이 소모성으로 지출된 선거운동경비는 보전해줄수 없다. 그 순간 그건 불법매수가 되니까. 곽노현 후보 캠프측 사람들도 그 부분은 정확히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박명기 후보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은 상당부분을 변제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초조해진 김**이 계속해서 선거캠프 인수비용에다가 +@를 요구했던 것이며, 그게 계속 거절당하는 과정이 기록된 것이 소위 녹취록의 전부다.
결론. 박명기 교수는 곽노현 교육감에게 단지 사퇴한 경쟁후보에 불과하지 않았고, 충분히 동정심을 느낄수 있는 충실한 측근이고 동료였다. 양 캠프간의 협상과 합의는 선거운동캠프의 인수비용이다. 이른바 이면합의...이게 핵심인데, 아무도 말 안한다. 빨대들이 대서특필 안하는거 보니 곽노현 교육감에게 유리한 내용인 모양이다. 아마 추측컨대 박명기 후보가 파산할 경우 집담보잡혀 덩달아 파산하게 생긴 동서에게 그럴일은 없게 해주겠다며 잘 달래 본 수준의 이야기다. 예컨대 곽교수가 착하고 동정심이 많은 사람인데 파산하게 그냥 두겠느냐, 잘 해 보자, 뭐 이수준...

결국 녹취록 증거 안됩니다. 합의 없습니다. 자백 번복합니다. 이렇게 되면 사전합의 정황는 깨지고 자연스레 2호로 넘어가는데, 이 때는 둘 간의 관계가 2억을 빌려줄만한 사적관계인가, 그리고 대가를 의식할 필요없이 긴급한 측은지심을 일으킬만한 상황이었느냐, 즉 댓가를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 정도 돈을 지원할 상황이었는가 등이 판단의 근거가 될텐데, 뭐 그렇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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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