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대 비상식, 진보 대 보수

요즘 진보라는 말 대신 상식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유행이다. 안철수 교수가 "상식 대 비상식"이라는 비유를 하면서 상식의 전성시대가 왔다. 진보적이라 불릴만한 인사들이나 트위터러들도 "상식이 지켜지는 세상을 위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러는 동안 진보라는 말을 사용하면 어느새 한 시대 뒤쳐진 사람, 혹은 쿨하지 못한 사람, 아직도 진영논리에 빠진 편협한 사람처럼 들리지 않을까 저어하게 될 지경이 되었다.

물론 자신을 진보라고 규정하는 것이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 보다 뭔가 입증 책임이 더 큰 것처럼 느껴질지는 모르겠다. 보통사람과는 다른 뭔가 있어야 진보일 것 같지 않은가? 게다가 몇몇 진보논객들은 거기에 고도의 도덕성까지 요구하지 않는가? 이래서야 어디 진보 해 먹겠는가? 그래서 특별히 뭔가 더 요구되는 진보 보다는 보통 사람의 건전한 생각 정도를 갖춘 상식이 더 매혹적으로 느껴질수도 있다.

문제는 그러려면 대한민국의 상태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진보라고 규정한 사람은 대한민국의 상태가 어떤 상태이건 간에 더 나은 상태를 요구할 수 있다. 진보에는 끝이 없고, 대부분의 진보주의자는 역사의 종말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지금 상태가 훌륭해도 진보주의자는 개혁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상식이라고 규정한 사람은 대한민국의 상태가 정상이하임을 입증해야 한다. 그럭저럭 정상상태라면 그냥 아닥하고 일상의 생업에 충실해야 건전한 상식적 시민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면에서 보면 국가가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잠시 공공문제에 참여했다가 정상을 되찾으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얼마나 속편한 포지션인가? 게다가 때마침 MB시대다. 여기에 글 쓰면서조차 조마조마해야 하고, 거대 방송사 사장이 불려가서 조인트를 까이는 참으로 몰상식적인 시대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나는 상식을 지키려는 시민이다."라는 선언만으로도 엄청난 투쟁성을 보이는 시대인 것이다.

아니, 그런데 여기서 잠깐.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1) 시장경제가 잘 유지되고, 반칙쓰는 정치가나 재벌이 없으면, 만사형통, 이땐 각자 자기 일만 열심히 해도 되는 그런 사회일까? 즉, 비상식이 아니라 상식이 통하는 사회= 자본주의 사회 인가 하는 문제이다.

2) 상식이라고 하면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옳다고 느끼는 상태, 지식, 생각일 것이다. 그렇다면 상식은 다수 의견인가? 하지만 이런 다수의 생각, 통념이 사실은 인류의 발전을 저해하고 다양한 발상을 억압해 왔던 것이 역사적 사실 아닌가 하는 문제다.

우선 1)의 문제다. 조국교수는 철수는 진숙과 만나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부분은 꽤 함축적이다. 안철수는 스스로 상식을 대변한다고 했다. 김진숙은 말할것도 없이 진보를 대변한다. 안철수는 현 상황을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규정하고 빨리 환부를 도려내고(즉 한나라당을 응징하고) 정상상태로 되돌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과연 백신 개발자!). 반면 김진숙은 인간의 가치, 노동자의 가치를 다만 화폐가치, 이윤으로 환산하는 사회에 대해 전면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기업이 타산이 맞지 않으면 사업규모를 줄이고 사업규모를 줄이면 안타깝지만 노동자들은 해고되는 것은 "상식적"이다. 적어도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수용하는 한 매우 정상인 것이다. 그런데 기업의 이해타산에 따라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일거에 박탈하고 헌신처럼 버리는 현실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김진숙과 희망버스는 바로 이 "상식"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지극히 정상적이고 반칙이 사용되지 않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라 할지라도 이들은 여전히 항의할 것이 있으며, 대안적인 체제를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를 비롯한 많은 진보지식인들은 "진보를 상식으로 대체하는 일"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수구좌파라서가 아니라.

다음은 2)의 문제다. 사실 이건 더 어려운 문제다. 토마스 페인이 "상식"이란 소책자에서 자유, 인권, 평등을 역설하고 군주정이 상식에 어긋나는 제도라고 질타하는 바로 같은 시대에 에드먼드 버크는 그 군주정을 철폐한 프랑스 혁명이 "비상식적"이라고 비난하고 있었다. 이때 페인은 "이성적으로 판단해 볼때 부정할 수 없는 이치"의 의미에서 상식을 말하고 있었고 버크는 "오랫 시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여 왔던 이치"의 의미에서 상식을 말하고 있다. 전자의 상식은 자칫 독단이 되어 상식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어떤 원칙과 원리가 상식의 이름을 얻게 되었으니, 여기에 반대되는 의견은 모조리 단죄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너무도 당연히 보수주의의 스탠스를 잡고 변화와 발전을 거부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치가 있는데 왜 거기에 딴지냐 하고 버티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상식 대 비상식"의 문제로 사회 개혁이나 현재의 정치 구도를 파악할 경우에 발생하는 두 문제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실제 많은 정치학자들은 "상식"의 이름을 내거는 정치를 경계시하기도 한다.

물론 상식을 마땅한 어떤 원리, 혹은 다수나 오랜 전승에 의해 굳어진 의견과 원리라는 두 의미 외에 다르게 해석할 길은 있다. 그것은 키케로가 강조했던 "공공의 합의"의 뜻으로 상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키케로는 공공의 합의야 말로 공화국의 근간이라고 보았다. 논쟁이 벌어지거나 갈등이 일어나더라도 그 사회 구성원이라면 모두가 동의하는 "공공의 합의"로 일단 되돌아가서 다시 차근히 따져보면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이를 키케로보다 훨씬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는 "공통의 장소"라는 말로 표현했다. 문제는 이때 이 공통의 것이 명시적으로 합의된 것인가, 아니면 묵시적으로 공유하는 것인가의 문제다. 전자라면 상식은 변경가능하고 확장가능한 유연한 개념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변경가능하고 유연한 원칙을 과연 상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후자라면 다시 문제2)로 되돌아가고 만다.

이렇게 상식을 말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더욱이 상식에 기반해 정치를 하거나 정치를 평가한다는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래서 로버트 달 같은 정치학자는 구체적인 가치나 내용이 아니라 그런 가치나 내용이 논의되고 정책화되는 과정과 절차에서 민주주의의 이념형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한 줄 요약: "진보"는 아직도 유효하다. "상식"의 정치는 위험하다.

음... 좀 더 보론이 필요할 것 같지만 졸려서 여기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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