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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와 동아일보의 자유민주주의 개드립

임기 말년에 들어서면서 가카와 가카의 충견들은 사회교사를 무척 바쁘게 만든다. 시작부터 BBK로 기선을 잡고, 최근 아껴써서 물가 잡자는 추석덕담과 저축은행 사태로 경제교육 준비를 잔뜩 시키더니 이번에는 역사교과서에서 자유민주주의 드립을 치며 정치교육 준비를 잔뜩 시킨다. 사건의 전말은 한국근현대사 교육과정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모조리 "자유민주주의"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교육과정 편찬위원들이 항의하자 동아일보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면 어떤 민주주의란 말인가?"라는 사설을 통해 이들을 공격했다. 이 말인 즉슨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면 니들 인민민주주의 주장하는거냐? 이 종북좌빨" 이런 뜻일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이 주제는 역사전공자들이 아니라 일반사회 전공자들 손으로 넘어왔다. 그러니 이명희 교수 등등은 제발 남의 영역에서 깝치지 말고 제 자리로 돌아가길 희망한다. 그 이유를 이제 밝혀 보겠다.

우선 동아일보와 이명희 교수 등이 팀웍이 맞는다고 볼때 이들이 사용한 자유민주주의는 공산주의의 반대말이다. 공산주의 국가들도 대개 자기 나라를 민주주의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 사이비 민주주의와 구별하기 위한 선명한 용어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반공이 한창이던 시절 "자유대한" "자유세계" 등과 그 맥을 같이하는 말이다. 반면 이들과 짝짜꿍을 맞추는 또 다른 세력들에게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시장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즉 "자유시장" 더하기 "간섭없는 작은 정부" 이걸 자유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둘이 기묘하게 뒤섞이면서 한국적 뉴라이트 자유민주주의가 탄생한다. "기업이 하는 일은 뭐든 간섭하지 않고, 여기에 딴지 걸면 공산당으로 몰아 붙이며, 민주주의라 주장하는 정치" 이게 이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실체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렇거나 저렇거나 정치학적으로는 몽땅 다 틀렸다. 자유민주주의는 그런 뜻이 아니다. 사실 정치학에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 이건 정치학 용어라기 보다는 정치가들의 용어에 가까웠다. 정치학에서 오히려 진지하게 다루는 주제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자유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는 다른 뜻을 가진다. 이때 자유주의는 개인, 소수의 권리가 전체, 집단, 다수에 의해 침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른바 소극적 자유를 인정하라는 것으로 이 사상의 정수는 존 스튜어트 밀, 알렉시스 토크빌 같은 사상가에게서 잘 나타난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란 대체 무엇일까? 문자상으로는 자유주의 +민주주의다. 그런데 이때 민주주의는 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근대적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즉 대의정치, 입헌정치를 뜻한다. 따라서 이 둘의 결합은 이런 의미가 된다.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법과 대표기구에 의해 통치되는 근대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되, 개인과 소수의견이 충분히 존중되며 억압받지 않는 정치". 이게 자유민주주의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는 아무리 소수의견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개진할 수 있는 언론, 출판, 집회, 시위의 자유, 그리고 아무리 소수파라 할지라도 정치적으로 그 뜻을 펼칠 수 있는 정당설립과 참정의 자유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즉 표현의 자유와 정치참여의 자유가 보장되는 가운데 다수결과 대표기구에 의해 운영되는 정치, 이게 자유민주주의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며, 다만 오늘날 민주주의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 필요한 한 원리를 지칭할 뿐이다. 즉 직접민주주의가 어려운 근대 국가에서는 자유민주주의의 원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식의 용어인 것이다. 이런 현대 민주주의의 원리로는 자유민주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여러 계층, 계급간의 격차가 벌어지지 않게 형평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사회민주주의 역시 현대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리다.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은 이 원리의 훌륭한 모범이며, 브라이언 터너는 이 원리에 관한한 토크빌 만큼 중요한 사상가다. 또 스테판&린츠 같은 학자는 자유민주주의까지 달성되면 형식적 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까지 달성되면 실질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다고 부른다. 이 의미는 사회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의 바탕 하에 사회민주주의까지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더하여 어떤 사람, 집단, 계층, 기구가 그 나라의 권력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된다는 원리가 추가된다. 여러 사람, 집단, 계층, 기구들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면서 권력이 독점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한다. 이러면서 국가는 누군가의 사유물이 되지 않고 그야말로 "공공의 재산"이 된다. 이러한 원리를 공화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공화민주주의의 흐름은 마키아벨리, 몽테스키외에서부터 비롯되어 최근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이클 샌델까지 이어져 오는 원리다.

따라서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할때는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공화민주주의를 모두 아울러서 지칭하는 것이다. 이중 어느 하나만 강조하면서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강변하는 사람이나 세력은 모두 수상한 사람들이다. 예컨대 자유민주주의만 강조하는 사람은 불평등한 사회체제에서 이득을 보는 집단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실질적 수준까지 진행되는 것을 차단하고 형식적, 절차적 수준에서 멈추려는 것이다. 반면 사회민주주만을 강조하는 사람은 자신의 정의관에 따라 빈곤층이나 하층계급을 선동하여 이를 바탕으로 독단적으로 나라를 운영하려는 사람이다. 이 양자는 마치 형식과 내용이 따로 떨어져서는 아무 의미가 없듯이 상보적이며 상호의존적이다. 그리고 여기에 권력의 분립과 균형이라는 공화주의의 원리까지 잘 지켜질때 비로소 우리는 그 나라를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정치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들의 공통점이 바로 이 세 원리가 잘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며, 1980년대 이전까지 미국이 세계의 모범이 되었던 것도 바로 이 세 원리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뉴라이트 집단과 동아일보를 보면 그들은 우선 자유민주주의 원리부터 마구 훼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교과부는 자기 뜻에 맞는 일부 교수의 말만 듣고 다수 교육과정 위원의 사표 불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뜯어 고쳤다. 게다가 이들은 자기들 뜻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과서 내용도 마구 뜯어고치는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소수의 의견도 존중해야 하는 자유민주주의인데 정부가 공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다수의 의견마저 묵살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이건 지나가던 쥐가 웃을 일 아닌가?

그리고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자유민주주의가 이루어져 가는 과정으로 기술하는 것도 정치학적 관점에서는 기가막힌 코메디다. 물론 4.19 혁명이나 6월민주항쟁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언론의 자유와 참정권의 자유를 확대시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이 거기서 그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자유민주주의로 한정지으면 당장 전태일 열사나 87년 노동자 대투쟁 같은 사건은 들어설 자리가 사라진다. 게다가 4.19나 6월 역시 단지 선거의 자유, 언론의 자유에 한정된 요구가 터져나온 사건이 아니었다. 이건 기본적으로 소수의 권력자가 민주주의를 빙자하여 다수의 의견을 묵살하고 국가를 사유화하려는 시도에 대한 공화주의적 반발이기도 했으며, 이러는 과정에서 심화되어가던 불평등에 대해 항의하는 사회민주주의적 반발이기도 했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상황 상황에 따라 이 세가지 요구중 어느 하나가 강조되기는 했으나 이 셋을 골고루 발전시켜나가며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지, 그 중 형식적 측면인 "자유민주주의"만 발전시켜 나간 과정이 아니었으며, 더더군다나 뉴라이트 식으로 이해한 공산주의의 반대말 "자유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간 과정은 더욱 아니었다.

이명희 교수 등 뉴라이트 역사교수, 교사들에게 고한다. 이제 역사과 영역을 벗어나서 정치, 경제 영역에서 주장을 펴고 싶으면, 즉 다른 전공에 개입하고 싶으면 먼저 그 분야의 기본적인 개론서와 역사부터 익히고 오라. 세이빈이 지은 "정치 사상사"를 강추한다. 1,2권으로 되어 있다. 그 다음에는 로버트 달 의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을 꼼꼼히 읽으라. 그리고 마키아벨리, 로크, 루소, 토크빌, 터너의 기본적인 저작들도 읽어보고 오기를 바란다. 그럼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거의 쓰이지 않음을, 그리고 쓰이더라도 댁들이 쓰는 그런 유치한 의미는 설 자리가 없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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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