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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7)- 교사가 되면 좋은 점 1

한 동안 이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말로 많은 젊은 선생님들이 저의 앞의 여섯편을 읽으셨고, 트윗으로 다음편을 요구하셨습니다. 이런 관심 부끄럽고요, 어쨌든 틈틈이 계속 연재해 보려 합니다.

교사가 되면 이런 것이 좋다(천사들)

교사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습니까? 그럼 용기를 복돋아 드리는 의미에서 교사가 되었을 경우 얻을 수 있는 즐거움에 대해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물론 여기서는 군자삼락 따위의 뻔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군자삼락의 세번째 즐거움은 초특급 엘리트 교육 담당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보통교육기관 종사자에게는 해당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소개할 내용은 어떤 학문적 근거도 없습니다. 다만 저의 경험이 유일한 근거입니다. 어쩌면 순전히 저의 주관적인 느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행복과 즐거움을 느꼈으며, 그 행복한 기억이 17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킬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관계의 실재를 확인하다

독일의 철학자 마틴 부버는 -사이의 관계가 실재로서 파악되지 않고, 모든 것이 - 그것이 되어버리는 것을 현대사회의 가장 큰 병폐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어떤 것을(그것이 꼭 사람일 이유는 없습니다) ‘라고 부름으로써 그것과 의미있는 관계를 형성합니다. 심지어 그 대상이 사물이라 할지라도 너라고 부름으로써 나와의 사이에 관계라는 실재가 생깁니다. 나와 너는 서로 존재를 기울이며 소통하는 사이이며, 함께 현재를 살아가는 사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 , 그녀들과만 살게 됩니다. 그것으로만 가득한 세계는 나와 소통하지 않으며 단지 서로를 대상으로 삼고, 대화하지 않으며 설명하기만 하는 세계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당신에게 단지 어떤 이유에서 필요한 존재들이며, 당신 역시 그들에게 그런 존재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칸트의 이른바 정언명령이 완전히 무너진 세상이며, 헤겔의 인륜이 파괴된 세상이며, 베버의 의미가 상실된 세상입니다. 누구도 타이의 수단이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도 수단들로만 가득한 사물의 세계에서 살아가길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관계에 대한 예찬은 아무리 늘어 놓아도 오히려 부족함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인간은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인 관계의 그물망 속에 자신을 던져 넣음으로써 존재를 확인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울을 통해서나 우리 얼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얼굴의 형태만 겨우 보여줄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타인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곳곳에서 타인들을 다만 수단으로만 삼아버리는 그런 사물들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사물들의 반응을 통해 자신에 대한 의미있는 평가를 얻지 않습니다.

일찍이 철학자 헤겔은 저 유명한 노예와 주인의 비유를 통해 타자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는 인간의 존재를 멋지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주인은 노예를 부림으로써 자신을 확인하려 하지만, 이미 스스로 열등한 존재로 자리매긴 존재로부터의 확인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신을 실현할 수 있으며, 노예주로부터의 인정 역시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노예가 되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면, 자신을 기울여 타자를 높여주면 역설적으로 자신에 대한 높은 평가를 통해 자신을 확인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존중하고 높여주는 그런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 의미있는 평가를 해 주고, 가치를 인정해 줄 수 있는 그런 타자가 생긴다는 뜻이 됩니다. 반면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들고 이용하려 드는 사람은 의미있는 타자, 우리 자신을 확인시켜줄 그런 타자들을 점점 줄여나가는 어리석음을 범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평가를 갈구하지만 이미 의미있는 타자들을 소멸시켜 버렸기 때문에 결국 소유에 집착합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얻게 되는 것은 공허함과 갈망 뿐일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타자를 수단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이른바 경쟁이라는 말로 합리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자연은 우리와 상호작용하는 살아있는 관계의 대상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했습니다. 근대의 자연은 차갑게 굳어있는 다만 사물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런 죽어있는 사물을 상대하는 노동 역시 차갑게 굳어있는 기계적인 일에 불과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노동하는 순간은 죽어있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교사는 아직 일의 대상, 일의 재료가 바로 살아있는 인간의 아이들입니다. 이들은 또한 자신의 존재를 기울여 상호작용할 수 있는 그런 존재들이기도 합니다. 교사는 학생들을 교육합니다. 교육은 학생을 재료로 삼아 일방적인 조작을 가하는 과정이 아니라 학생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관계를 만들어나가고, 그 관계의 망속에서 서로 성장하는 작업입니다. 이렇게 차갑게 굳어있는 현대, 저 냉정한 사물의 바다에서 관계의 섬을 만날 수 있는 교사는 참으로 행복한 직업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 기쁨은 자신을 기울인 겸손한 교사들에게만 주어집니다. 학생들을 존중하는 교사는 그 존중받을 만한 학생들로부터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확인받을 것이며, 학생들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교사는 그 무시했던 학생들로부터도 경멸을 받는 최악의 처지에 처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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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