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젋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8 - 교사가 되면 좋은 점 2

교사가 되면 좋은 점 2- 성장시키며 성장 할 수 있습니다.

교사는 교육자입니다. 이 당연한 말을 자꾸 강조하는 이유는 교육이라고 하는 독특한 행위가 일반적인 노동과 구별되는 특징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교사는 단지 노동자가 아니라 교육자라는 것입니다. 교사는 교육자이면서 노동자일수도 있고, 교육자이기만 하고 노동자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육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안타깝게도 이건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교육의 정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육자의 수 만큼이나 많기 때문입니다.

슐라이어마허는 교육을 미성숙한 젊은이와 어른 사이의 차이를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헤르바르트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차이를 좁혀 젊은이가 옳은 것을 알고, 그것을 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교육에 대한 무수한 진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무수한 진술들을 공통으로 관통하고 있는 두 개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성장과 진보입니다.

그 뜻이야 뭐가 되었고, 그 방향이야 뭐가 되었건 간에 교육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학생이 성장하는 과정에 관여합니다. 즉 교육은 성장을 의식적으로 촉진하거나(이것이 헤르바르트의 길입니다), 아니면 성장에 방해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것이 루소의 길입니다)과 관련한 인간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성장이란 무엇일까요? 일단 시간의 경과에 따라 나타나는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장은 시간이 지난 뒤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음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다른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시간 속의 존재가 된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지 변한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성장의 결과가 이전보다 못난 인간이 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성장이라는 말 대신 퇴행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교육은 이렇게 시간의 결과가 퇴행이 아니라 성장이 되게끔 하는 일종의 펌프이자 심장 판막과 같습니다. 따라서 교육은 그 본성상 진보적입니다. 교육을 받은 사람은 교육 받기 전보다 어떤 면에서든지 간에 훌륭해져야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육은 앞 세대의 업적을 보존하여 뒷 세대에 전수하는 보수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육은 단순한 보존이 아닙니다. 교육은 뒷 세대가 앞 세대가 그 삶을 마칠 무렵에야 도달했을 경지를 자신의 삶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육의 목적은 앞 세대의 업적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그들이 삶을 마칠 무렵에는 그 보다 훨씬 더 진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는 이런 식으로 진보해 왔습니다. 교육에 종사한다는 것은 인류의 진보 과정에 자신의 힘을 보태는 대단히 가치 있고 행복한 일을 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행복이라는 말처럼 철학자들의 주제로 자주 사용된 말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스피노자를 거쳐 포이어바흐에 이르기까지 도도하게 흐르는 행복에 대한 사유에는 항상 어떤 전체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휘하는기쁨이라는 아이디어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전체가 폴리스가 되었든, 혹은 서로의 공통성을 통해 구성해 나가는 공화국이 되었든, 혹은 인류가 되었든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은 전체주의, 파시스트, 민족주의 따위가 주장하는 것처럼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개인들이 자신들의 특이성(singularity)을 최대한 발휘 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전체 속에서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어야 행복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참으로 인간은 공동체를 만드는 동물(정치적 동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동체를 존속시키고 발전시키는 그 핵심적인 위치에서 기여하고 있는 교사야 말로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이렇게 교육은 언제나 공동체의 존속과 동시에 생성· 탄생에 기여하는 일입니다. 바로 이 점이 교육을 여타의 노동, 심지어 지식노동과도 구별짓는 특징입니다. 예컨대 학문과 비교해 보십시오. 학문의 대상은 사실입니다. 학문의 목표는 지식입니다. 사실은 그리고 지식은 이미 시간이 지나간 결과입니다. 물론 학자들은 사실들에 대한 분석을 기반으로 미래를 예측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지 예측할 뿐 미래를 생성하는 것은 학자의 일이 아닙니다. 학문적인 개념들은 언제나 완료형으로 진술됩니다. 반면 교육은 루돌프 슈타이너의 말대로 깨어남이며 미래를 향한 의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은 여러 정신적 활동 중에서 예술과 가장 흡사합니다. 그러나 예술이 비록 생성하는 작업이라고는 하나 그 최종 결과물은 굳어있는 작품입니다. 예술작품은 그것이 만들어지는 동안에는 작가와 활발하게 상호작용하며 약동하지만 일단 작품이 완

되면 그 생성 능력은 현저하게 떨어빈다. 그래서 예술가는 또 다른 작품 제작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술가들은 시지푸스입니다.

그러나 교육은 살아있는 인간과 관계합니다. 그것도 성장하는 인간과, 그 속에 들어있는 폭발적인 잠재적 생명력과 관계합니다. 우리의 작품은 끊임없이 생성되며, 스스로 발전하며, 그 힘을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그런 작품입니다. 따라서 교사는 생성시키며 또 스스로 생성하는 직업입니다. 그래서 교사는 잘 늙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학교에서 일하기 시작하면 선배교사들의 연령대를 가늠하기 어려워서 고생을 좀 할 것입니다. 어떤 교사는 중년인데도 마치 청년 같아 보여 본의 아니게 실례를 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어떤 교사는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여 본의 아니게 지나치게 공손하게 대할 수도 있습니다.

이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궁금하다면 그 교사와 학생들의 관계를 보십시오. 나이보다 젊은 교사는 학생들과 생성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 교사입니다. 그런 교사는 아직도 성장하고 있는 교사이기에 나이와 무관하게 젊은 교사입니다. 늙은 교사는 학생들에게 화석처럼 굳어버린 지식들을, 개념들을, 낡은 가치관을 강제로 쑤셔 넣고 있는 교사입니다. 그들은 이미 성장이 완료된 교사이기에 나이와 무관하게 늙은 교사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사는 그 어느 직업보다도 청춘을 길게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어느 직업보다도 조로하기 쉬운 직업이기도 합니다. 청춘과 조로.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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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