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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9 -교사가 되면 좋은 점(3)

탐구하고 사색하는 삶

생물 분류학에서 인간을 지칭하는 학명인 호모 사피엔스는 다들 아시다시피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학명에는 인간의 본성, 본질이 생각에 있다는 의미가 다분합니다. 여기에 행복한 삶이란 자신의 본성에 맞게 사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까지 연결하면 탐구하고 사색하는 삶이야말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삶이 됩니다. 물론 이건 인간의 다양성을 무시한 고대 사상가들의 지나친 일반화입니다. 분명 사람에 따라서는 탐구하고 사색하는 삶이 진저리치고 지루한 삶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부가 좋은 분, 평생 공부만 할 수 있다면 나물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워도 좋으신 분이라면 교사가 최선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차선은 되는 몇 안되는 직장 중 하나임은 분명합니다. , 최선은 대학 교수가 아니겠느냐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한 때 그랬던 것 같기는 합니다만, 지금은 장담 드리기 어렵습니다. 사실 저도 대학교수가 되려고 하고, 또 될 뻔 하기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석연치 않은 이유로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그만 두고요.

제가 교수가 되려고 했던 이유는 세속의 영달 등과는 거리가 멉니다. 나는 교수가 교사보다 더 위의 직업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종류의 직업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가 되려고 했던 것은 쓸데 없는 행정 잡무에 시달리지 않고 순전히 교육과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학 사회를 알면 알수록 그 곳은 공부에 전념하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오히려 그곳은 온갖 교묘한 술책과 정치술을 발휘해야 하는 곳이었고, 그것은 내가 가장 자신없어 하고 혐오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각종 연구소나 개발원의 연구원도 공부할 수 있는 직업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국책연구소의 경우는 정부의 요구에 따라, 민간연구소의 경우는 펀드를 대는 의뢰인의 요구에 따른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남의 요구에 따라 공부를 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탐구가 아니라 노동입니다.

하지만 교사의 공부에는 그러한 제한이 없습니다. 수업이 없는 시간이라면 어떤 공부를 하던지간에 공부를 하고 있으면 그것은 일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물론 공부 하고 있지 않아도 일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문제지만 말입니다. 근무시간 이후에도 거래선 관리, 각종 접대, 이런 저런 자잘한 콘퍼런스 따위 신경쓰지 않고 편안한 장소에서 몇 시간이고 원 없이 공부 할 수 있는 직업이 교사입니다.

물론 겨우 어린 학생들 가르치는데 무슨 원 없이 공부 타령이냐?’ 이렇게 힐난하거나 냉소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중학교 사회교사가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라거나 하버마스의 소통행위 이론같은 난해한 정치, 사회이론을 공부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깊이 있는 지식이 아니라 아이들 수준에서 가르칠 수 있는 감각이 아니겠느냐 이런 반문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자기 분야의 고급 지식을 습득한 교사가 도리어 아이들 수준으로 가르치는 일도 더 잘하더라는 것입니다.

원래 어려운 글 보다 쉬운 글 쓰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며, 어렵게 가르치는 것 보다 쉽게 가르치는 것이 더 넓고 깊은 지식을 필요로 하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 철학과에 다니는 학부생들에게 일반인을 상대로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을 강의해 보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아마 칸트의 책을 그대로 읽어 내리기에 바쁠 것입니다. 적절한 사례를 드는 것도, 또 칸트의 문장을 알기 쉽게 바꾸어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반면 평생을 칸트만 연구한 노학자라면 아마도 유머까지 섞어가면서 일상생활의 예를 들어가면서 아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대해 참으로 깊고 폭넓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공부를 해야만 한다고 강요까지 받는 직업이라니, 이 얼마나 큰 즐거움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잠깐 그 의미를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공부라는 말입니다. 겨우 대학교에 들어갔을 뿐인 젊은이들을 거침없이 공부의 달인이라고 부르기까지 하는 이 천박한 풍토에서 이 공부라는 말의 의미는 너무도 왜곡되어 있어 일대 숙청(?)이 필요할 정도입니다. 이때는 오히려 영어가 도움이 됩니다.

저는 공부라는 말을 study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study는 배움(learn)과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배움은 아무리 자기주도적 학습을 한다고 하더라도 가르치는 쪽과 배우는 쪽의 구별이 있는 현상입니다. 선생과 제자가 있죠. 하지만 공부는 내가 나의 스승이며 내가 나의 학생인 그런 행위입니다. 즉 탐구(inquiry)와 성찰(reflection)으로 이루어진 행위입니다. 탐구는 어떤 문제(problem)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지식을 탐색하고 구축하는 과정입니다. 이 문제는 단순한 호기심일수도 있고 현실에서 부딪치는 사태일수도 있고 혹은 해결되어야만 하는 이론적 난제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무엇이 되었건 간에 그것이 해결되어야만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문제를 풀기위해 지식을 탐색하고, 적용하고, 그 결과 새로운 지식을 형성하는 과정이라면 그것은 모두 탐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애초에 이 탐구는 그 결과를 적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것과, 그 가정에서 새로운 지식이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탐구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진화시키는 사람인 것입니다. 탐구하고 공부하는 삶은 스스로 진화하는 삶입니다. 스스로 진화할 수 있는 사람은 환경에 더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있으며, 환경과 상호작용하여 환경을 바꾸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에 직면하거나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들을 적용하고 또 필요한 지식을 탐색하는 이러한 과정이 모든 사람에게 즐거운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 아니 사실은 상당수 사람들에게 이러한 과정은 대단히 고통스럽고 지루한 과정입니다. 왜 그럴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동은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를 즐기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최근에 입직하는 젊은 교사들에게 이 문제는 심각합니다.

여기에 대해 반발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우리가 교사가 되기위해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데, 공부를 안했기 때문에 공부의 즐거움을 모른다고 하느냐 하는 앙칼진 항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 서점에서 교원 임용고시라는 코너가 따로 있길래 그곳을 좀 둘러보다가 그곳에 전시된 교재들을 보고 기겁했습니다. 예를 들면 탁명진 교육학이니 조하섭 교육학이니 하는 책들 말입니다. 이런 종류의 책들은 인류가 수천년 동안 고민하며 누적한 교육의 지혜들을 단지 몇몇 요목으로 정리된 암기거리, 단순 정보로 전락시켜 놓았습니다. 만약 교사가 되겠다는 젊은이들이 이런 책들의 잘 정리된 요목들을 달달 외우고, 응용문제를 연습하고, 그래서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학교에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더욱 암담해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한 교사들은 결국 학생들도 이런 식으로 가르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공부는 단지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정보를 암기해 두었다가 그 순간에 인출하고, 그러고 나면 잊어버리는 그런 악순환의 연속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아아, 실제로 많은 교사들이 그렇게 공부해왔고, 그렇게 공부시켰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제가 앞에서 강조한 탐구하고 사색하는 그런 의미에서 바라본다면 여러분의 교육학 공부는, 임용 준비 공부는 모두 헛짓입니다. 진정한 교육학 공부는 여러분이 첫 수업에 임할 때 비로소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계속될 것입니다.물론 그것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여러분이 암기한 화석같이 단단한 굳은 정보들을 학생들에게 억지로 주입할 것인지, 아니면 학생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스스로 성장할 준비가 되어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전자를 선택한다면 여러분도 학생도 모두 공부하지 못하는 불행한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후자를 선택한다면 바로 진정한 공부를 향해 가는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교사는 그런 진정한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부여받았고, 게다가 일 자체가 공부일 수도 있는 아주 특혜 받은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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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