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교사에게 드리는 편지 11- 교사가 되면 좋은 점 6

5) 봉사
이제 교사가 되면 좋은 점 다섯번째입니다. 이 다섯번째 좋은 점은 어떻게 보면 너무 고리타분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바로 봉사하며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게 전혀 장점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흔히 봉사라고 하는 말은 나에게 있는 좋은 것을 혹은 나의 노력과 수고를 상대방에게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곱고 훌륭한 심성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는 도리어 고역으로 여겨지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히 봉사라고 하면 가치있고 훌륭한 일이기는 하지만 평범한 자신과는 무관한 일, 그러니까 마더 테레사 같은 사람이나 하는 일로 치부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보통사람의 일상적인 행복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편협하고 그릇된 인간관에 서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병폐입니다. 이 인간관은 이미 수백년전 토마스 홉스가 설파한 바 있는 고독하고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인간관, 태초에 혼자이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며 타인을 자기 이익의 추구 대상이나 잠재적인 탈취자나 적으로 여기는 그런 인간관입니다
이런 인간관은 흔히 개인주의니 자유주의니 하는 그럴듯한 이름을 하고서 여러분이 열심히 공부했을 주류 경제학을 통해 우리 저변에 의외로 깊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런 이기적이고 냉혹한 인간을 도리어 쿨하다, 엣지있다 그러면서 동경하고 따스하고 동정심 많은 인간을 구리고, 위선적이라고 보는 고약한 풍토까지 퍼져있는 게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타인에 대한 관심과 공동체 등에 대해 말하면 경쟁과 이익 추구는 인간의 본성인데, 그런 이상적이고 꿈같은 소리를 한다는 핀잔을 듣기 일쑤인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기적인 사람은 현실적이고 실속있으며 공동체를 생각하고 타인을 생각하는 사람은 몽상적인가요? 과연 무엇이 허구이고, 무엇이 현실일까요? 고독하고 냉철한 개인인가요 아니면 타인들 속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적 존재인가요? 일찌기 홉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루소는 개인이 자기 안전을 위해 사회를 만든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인간은 존재할때 부터 사회속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루소의 생각 뿐 아니라 실제 사실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낯설어 해야하는 말은 사회,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인 것입니다.


19세기 말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의 원시부족을 탐사했던 서양의 인류학자들은 이들 원시부족들에게 개인을 뜻하는 단어도, 심지어는 그런 관념이나 생각 자체도 존재하지 않음을 보고 놀랐습니다. 혹은 역으로 1862년 메이지 유신 직후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던 일본의 지식인들은 서양의 Individual을 옮길 적절한 동양의 용어를 찾지 못해 고생했습니다. 그래서 인간각개, 개개별별, 개별적인간 등 무수한 용어를 통해 이 말이 뜻하는 바를 표현하려고 애쓰던 끝에 개인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렇게 개인이라는 말은 물론 그것이 표상하는 관념 자체가 이미 철저한 근대 서양의 소산인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개인주의는 커녕 홀로 있는 개인이라는 생각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간은 당연히 관계속에 있는 존재지 관계밖에 있는 홀로 있는 존재는 아리스토텔레스 말대로 야수이거나 아니면 신일 것입니다.

, 개인주의가 아니 개인이라는 생각 자체가 인간의 본성과 거리가 먼 근대의 소산이라면, 그래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합의와 계약을 통해 공동체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인간의 공동체, 사회는 대체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프랑스의 사회학자 마르셀 모스는 자기 것인 재산을 지키려고 사회계약이 수립되었다는 계몽사상가들의 생각을 뒤집어서 오히려 자기 것을 내어주는 증여가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기본원리라고 하였습니다. 즉 사회는 서로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구성한 계약체가 아니라 서로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어주는 증여의 관계망인 것입니다.

사실 자본주의의 꽃이자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거래나 교환 역시 애덤 스미스의 말처럼 이익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모스가 말한 증여 동기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누군가가 일단 먼저 내어주려고 할 때 비로소 교환이 시작되는 것이지, 가져가려는 생각이 먼저 실현된다면 교환이 아니라 약탈이 자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약탈 시도를 금지하고 통제하는 인위적인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어떤 교환도 거래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셀 모스가 관찰한 남태평양 부족들은 어떤 계약도, 규칙도, 법도 없이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다니면서 광범위한 교환의 망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타계한 현대 인류학의 거장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러한 증여-교환 행위가 전체적으로 균형을 회복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즉 상호 교환시 흔히 생각하는 것 처럼 이윤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 자연의 전반적인 균형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넘치는 쪽은 모자라는 쪽에 내어주는 것이며, 다시 넘치는 쪽이 바뀌면 반대로 내어주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들 원시부족은 사냥을 할 때 조차 자연에서 무엇인가를 가져왔기에 자연에게 무엇인가를 되돌려줌으로써 균형을 맞추는 의식을 합니다

이건 먼 옛날이나 원시부족의 이야기라고요? 근대 시장경제의 원리도 바로 이러한 균형입니다. 자본주의의 신인 보이지 않는 손이 빚어내는 최종 결과는 균형가격과 균형거래량입니다. 그런데 이 시장 균형 생태라는 것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 상태는 소비자 잉여와 공급자 잉여가 일치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곧 누구도 상대방에 대해 더 이득 보는 것이 없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이 상태에서는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소비자는 치뤄야 할 값에서 조금도 깎지 못했고, 판매자는 받아야 할 값에서 한 푼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조차 이런 결과를 가져옵니다. 각자 이익동기에 충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설명보다는 애초에 인간은 상호간에 주고받음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요? 더 현실적이지는 않을지라도 특별히 더 이상적이거나 몽상적이지 않음은 분명할 것입니다.

인간의 이런 균형감각과 내어줌의 풍습은 심지어 돈 밝히기로 유명한 유태인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바로 안식일이 그것입니다. 안식일의 규칙은 크게 둘로 구성됩니다. 하나는 일하지 말라, 즉 생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생산하지 말라는 것은 재산을 더 늘리지 말라는 것이며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은 잉여를 남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 1주일동안 열심히 노동하여 일용할 양식을 얻고, 만약 남는 것 즉 +가 발생하면 더 이상의 노동을 중단한 상태에서 서로 이웃에게 나누어주어 +0으로 맞추라는 것, 그래서 매 주 첫날은 다시 무에서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생각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면 이는 여러분이 근대인이기 때문입니다. 근대 이전에는 도리어 잉여를 남기고 축적하려고 하는 성향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 사람을 수전노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만 하더라도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한 뒤 돈을 받는 행위는 매우 불경스러운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자신이 먹을 것을 직접 싸들고 다니거나 아니면 동네에서 좀 그럴듯한 집에 가서 이리 오너라를 했던 것입니다.

이 정도쯤 해 두면 이익동기가, 이기적 동기가 아니라 내어줌이야 말로 오히려 우리 인간의 본성에 더 가까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내어주고자 하는 동기는 왜 발생했을까요? 과학에서 목적론은 매우 꺼리는 바 이지만, 그래도 억지로 끼워맞춰 보자면 이런 내어주고자 하는 본성이 있었기에 인간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거대하고 복합적인 협력체를 구성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내어줌은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적응적 기능을 한 것입니다. 서로 먹이를 다투는 이기적인 포유동물은 매우 많지만, 처음 만난 타인에게 도리어 먹이를 내어주며 호의를 청하는 동물은 영장류 중에서도 사람을 제외하면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고독함을 떨치며 자신이 단절된 개체가 아니라 거대하게 연결된 공동체의 힘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좀 이야기가 많이 벗어났습니다. 제가 여기서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바로 봉사가 이 내어줌에 기반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내어줌의 대상이 사물이면 증여이며, 노력이나 노동력이면 봉사입니다. 따라서 봉사는 고역이 아니라 즐거운 내어줌이며 나를 더 힘있게 만드는 그런 내어줌인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의 기사들은 자신의 주군에게 “I am at your service"라고 말한 뒤 "It's my pleasure" 라고 했던 것입니다. 당신에게 봉사함이 나의 즐거움이라는 뜻이 되는데 이건 결코 주군 듣기 좋으라고 한 빈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봉사할 상대가 없는 사람의 인생이 어떠할지 상상해 보십시오. 어쩌면 우리를 짜증나게까지 만들었던 부모님의 한없는, 그리하여 귀찮기까지 했던 간섭, 부모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었던 집착의 어두운면이 바로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봉사해야만 하는, 그렇지 않으면 고독해지고 뿌리가 없어지는 인간의 운명이 바로 여기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때 봉사할 상대방이 없거나 기껏해야 가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의 인생은 앙상하고 도독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독은 우울증과 자살을 가져오거나, 아니면 소수의 봉사 상대에게 과도하게 매달리는 강박적 집착을 가져올 것입니다. 1970년대에 베티 프리단이 간파한 바 있었던 단란한 가정과 이웃을 가진 여성들에게 별안간 엄습했던 그 우울증과 공허함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족과 몇 안되는 이웃은 이제 더 커지는 봉사욕구를 감당하기에 너무 좁은 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사회라는 이름의 무한히 확장되는 거대한 봉사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인생의 맛을 충분히 알 만큼 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비교적 풍성하고 즐거운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내가 명문대학을 나왔다거나,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거나, 아니면 재산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물론 제가 한국의 평균보다 학력이나 재산이 조금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저 보다 더 높은 학력과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저보다 앙상한 인생을 살고있는 사람을 수 없이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풍성한 인생은 다음의 수식과 같습니다.

, 인생의 풍성함은 증여할 수 있는 것의 종류와 증여할 상대의 종류와 함수관계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내가 증여할 수 있는 것의 종류가 많아질수록, 내가 증여할 상대가 많아질수록 풍성해집니다. 이때 단순한 양(Q)이 아니라 종류(k)와의 함수관계라고 말한 것에 유념하십시오. 아무리 내가 증여할 대상과 그 상대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종류가 얼마되지 않는다면 경제학에서 말하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작용해서 그 효과는 점점 저감되어 마침내 증여하지 않는 고독한 상태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진 것이 돈 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돈을 내어줌으로써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또한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받아가는 사람 역시 돈이 필요한 사람들로 한정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기부를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허무와 공허속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내어줄 것의 종류가 다양한 사람은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 지식이 필요한 사람, 애정이 필요한 사람, 관계가 필요한 사람 등등.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망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회에 있음을 느끼게 되며, 로버트 퍼트냄이 말했던 사회적 자본이 축적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구축된 관계망과 기쁨의 네트워크는 유연하면서 쉽게 소진되지 않습니다. 어느 한 종류의 자원이나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해도, 그는 금방 다른 자원과 관계에서 자신의 사회성을 충족시킬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네트워크 조직과 같습니다.

반면 타인에게 증여할 것이 돈 밖에 없는 사람은 수입이 줄어듬과 동시에 인간적으로도 위축됩니다. 오직 지식 밖에 없는 사람은 자신의 학설이 낡은 것이되거나, 기억력이나 지력이 감퇴하면 위축됩니다. 그리하여 돈이나 지식이 거의 소진됨과 동시에 그토록 풍성했던 그의 인생도, 그의 관계망도 모두 찌그러들고 맙니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사람이 몰려들어도,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찾지 않는다는 속담이 공연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그 정승이 가진것이 권력 외에도 다양하게 있었고, 권력을 바라보는 사람들 말고도 다양한 종류의 사람과 관계망을 만들었다면 과연 그러했을까요? 내어줄 것과 그것을 받을 사람의 종류가 다양한 사람은, 그리하여 다양성의 그물망 속에 있는 사람은 그 중 어느 것을 상실하더라도 금새 그것을 보완하는 새로운 가치와 관계망을 엮어냅니다.

이런 점에서 교사는, 특히 한국의 교사는 근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대부분의 근대적인 직업들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교직은 그 행위 자체가 언제나 무엇인가를 내어주는 직업입니다. 그 내어줌은 지식일수도 애정이나 관심일수도 혹은 정말 단순한 신체적 노고일수도 있습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예측불허의 내어줌에 늘 직면한 그런 직업입니다. 게다가 해마다 그 내어주는 것을 받을 학생들도 바뀝니다. 교사는 늘 대상을 바꾸어가면서 내어주고 봉사하는, 그러면서도 섭섭하지 않을 정도의 수입도 보장받는 그런 직업입니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이른바 숙의민주주의에 대하여(1)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학종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학종 다음의 셀프학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