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학교 기반닦기 (2)

한국 교육 문제의 진단


먼저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진단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물론 한국 교육의 문제점이라고 말하면 입시교육, 사교육문제 등의 이야기들이 쏟아지지만, 여기서는 이런 표면적인 현상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여기서는 이런 표면적 현상의 외피 안에 숨어 있는 본질적인 부분, 이런 문제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게 만드는 패러다임의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두 패러다임이 혼재된 잡탕 교육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운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제가 없는 상태에 대한 상을 가져야 한다. 만약 의사에게 건강한 신체에 대한 기준이 없다면 그는 어떤 병리현상도 진단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진단하려면 먼저 교육에 대한 준거가 있어야 한다. 이런 준거가 있어야 잘되고 있는지, 잘 안 되고 있는지, 또 무엇이 문제인지 말함으로써 한국 교육을 진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건강한 신체의 준거와 달리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정확한 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만 모아도 책이 한권 만들어질 수 있다고까지 한다. 하지만 슐라이어마허는 이 답들 속에서 가장 근본적인 핵심을 찾아내었는데, 어떤 형태의 교육이건 간에 교육은 비대칭적인 관계(성인과 미성년자, 마스터와 제자)에서 시작되며, 교육 대상에게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며, 이 변화의 정도가 점점 줄어들면서 종료된다는 것이다(Boyd, ).

즉 교육은 어떤 종류이건 어느 시대이건 간에 반드시 다음의 조건 하에 이루어지는 인간 행위, 그리고 그것과 관련되는 인간의 제도다.

1)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있다. 아무리 진보적인 교육자라 해도 어쨌든 학생과 완전히 대등한 관계가 될 수는 없다.

2) 교육의 최종 목적은 어떤 바람직한 상태에 학생이 도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바람직한 상태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인간의 본성을 상정하고 이것이 발현된 사람다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존재론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고, 사회 분업체계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기능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둘은 별개의 문제로 취급되지 않았다. 신분제 사회에서 전자는 지배계급의 교육 목표였고, 후자는 피지배계급의 교육목표였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사회, 공동체의 공공복리를 위해 통합되었다. 플라톤에 따르면 한 공동체가 올바르게 운영되려면 진리를 통찰할 수 있는 사람이 통치해야 하며, 진리의 통찰은 자유로운 상태(가족, 혈연, 그리고 생업으로부터의 자유)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전담할 별도의 계급이 필요했다. 따라서 사유하는 계급과 노동하는 계급의 분리가 전제되며, 이들은 교육을 통해 길러지는 것이다. 한국 전통사회에서도 수기치인의 원리에 따라 고도의 인격도야를 거쳐야 관료가 될 수 있는 계급과, 각종 생산 기능만을 배워야 하는 계급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근대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이렇게 엄격하게 사유하는 계급과 생산하는 계급을 분리하던 법적 장벽은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생산하는 계급과 사유하는 계급의 분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는 교육에도 반영되어서 근대교육은 교육의 목적을 훌륭한 인간의 완성인지 아니면 훌륭한 기능인의 육성인지를 두고 계속 표류하였다. 이 양자에 대한 요구는 동시에 급증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도시국가나 느슨한 연방을 넘어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거느린 민족국가가 탄생하면서 민족의 유산과 정체성을 통해 애국, 애족심을 가진 국민의 대량 육성이 요구되었다. 또 경제적으로는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한 근대 산업사회의 특성상 표준화된 기능 보유자들을 대량으로 양성할 수 있는 교육에 대한 압력이 점점 늘어났다. 이로써 훌륭한 인간을 기르는 교육의 목적은 애국적인 국민의 양성으로, 훌륭한 기능인의 육성이라는 교육의 목적은 노동력의 생산 및 재생산으로 변질되었다.

결국 오늘날 교육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여전히 이 둘 가운데서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교육의 목적에 대한 관점은 이 둘 가운데서 표류하며 그 가운데 어디쯤에 있기 마련인데, 이를 각각 전통주의적 패러다임과 인간자본론적 패러다임으로 부를 수 있다.

1) 전통주의 교육 패러다임: 문화전승으로서 교육

이탈리아가 통일되었을 때 나돌던 유명한 말이 있다. “이제 이탈리아가 만들어졌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탈리아인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민족국가의 발생 순서는 민족국가 가 아니라 국가민족이다. 일단 정치적인 통합이 이루어진 다음, 이들 이질적인 문화와 정체성을 가진 백성들을 단일한 민족으로 통일시킨 과정이 뒤따른 것이다.

따라서 근대 민족국가의 탄생과 함께 전통도 창조되었다. 민족은 이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심리적 집합이다(Benedict, ). 따라서 민족은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는 교육을 통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이런 민족의 구성이라는 근대 국가의 요구가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의 국민교육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국어, 도덕, 국사가 교과목 서열 1,2,3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공교육의 1차적인 목적이 전통을 계승함으로써 민족을 구성하는 것에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교육이 전통문화를 전수하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통주의 패러다임의 기원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상 교육이란 말이 등장한 이래 교육은 당연히 전통을 전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교육의 가장 오래된 패러다임이다. 근대 국민교육은 다만 이 전통을 대규모로 통합하고 체계화 하였을 뿐이다.

전통주의 패러다음에서 교육은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권위 있는 문화적 전승, 즉 고전(학과)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34과를 중심과목으로 삼았던 과거 서양의 문법학교, 김나지움, 그리고 육예와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했던 동양의 각종 교육기관은 오늘날에도 인문계 고등학교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이 패러다임의 역사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은 지는 곧 덕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전제에서 출발하여, 최상의 덕, 즉 완전한 이데아인 선의 이데아를 볼 수 있게 됨으로써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으로 교육을 구상하였다(Boyd, 1964). 그 수단은 현실 존재에 대한 고도의 추상인 기하학과 철학(변증론)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들 학문을 공부함으로써 학생들은 현상에서 이데아를 꿰뚫어 볼 수 있게 되며, 결국 선의 이데아까지 통찰할 수 있게 됨으로써 완전성에 도달한다. 그런데 이 완전성은 구성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외부적이고 강압적이다.

공자는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의 교육을 통해 인간성의 완성을 추구하는 교육을 주창하였다. 그런데 이 시서예악 역시 은주시대의 전승을 계승하는 것이지 결코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교육의 목적을 도달해야할 어떤 고정된 경지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 내용은 학생들의 내면과는 무관하게 완전하게 제시된다. 교육 내용은 비판과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며 학생들이 무조건 도달해야 할 완전성의 전범이 된다.

이렇게 학습내용을 학생의 외부에서 부과하는 전통주의 교육은 학생들의 구체적인 삶과 유리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Dewey, 1944). 전통주의 교육은 인간성의 완성을 향한 도야라는 고유의 목적에 복무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전승된 학과와 지식을 규범화 함으로써 학습자의 삶과 유리된 고답적 교리문답에 그쳤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전통주의 교육 패러다임은 여전히 다양한 형태로 온존하고 있다. 우선 정치권력의 관점에서 보면 전통주의 교육만큼 정치적으로 동원가능한 국민을 대규모로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어렵다. 광화문 광장에 서 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의 동상만으로 그곳에 있는 수만명의 사람들의 동질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까닭은 이들이 과거의 전통유산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신들의 정체성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패러다임은 교육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도 하다. 권위있는 전통을 전수하는 위치에 설 경우 교육자들은 학생들에 대해 절대적으로 권위있는 위치에 설 수 있으며, 또 전통의 권위를 통해 학생들의 이의를 묵살할 수 있기 때문에 보다 손쉽게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2)인간 자본론(human capitalism): 투자로서 교육

인간 자본론은 오늘날 마치 교육을 위한 유일한 방향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보편화 되어있는 패러다임이다. 이 패러다임을 가장 농축적으로 보여주는 표어는 아직도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인재 육성”, “교육입국같은 말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비롯되는 의문은 이 인재가 대체 어떤 용도를 가진 인재냐 하는 것이다. 우선 국가가 요구하는 인재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전통주의패러다임에 이미 포괄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인재는 교육에 비용을 투자하는 주체가 요구하는 인재다. 교육을 위해 엄청난 세금을 감수하는 까닭은 그것이 일종의 투자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패러다임에서 교육은 자본을 투입하는 행위로 간주되며 그 결과 만들어지는 인재의 능력이 산출이 된다. 당연히 산출은 투자보다 커야 한다. 이 패러다임에서 교육은 독자성을 상실한다. 교육은 다만 이 산출을 얻어내기 위한 과정이며, 일종의 비용에 불과하다. 당연히 비용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적은 비용을 들여서 많은 산출을 올리는 것을 효율성이라고 한다. 물론 인간자본론에서는 교육의 결과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그 결과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학생은 생산품이 될 재료로 간주되며 완성된 학생은 국가와 기업이 유용하게 사용한다. 그 최종 결과는 교육을 통한 질 높은 노동력의 생산과 이를 통한 국민수준 향상으로 사회통합력 증대가 될 것이다.

이 역사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의 저술에 등장하는 그 고결한 교육은 실제 그리스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의 교육은 일리아드에서 등장하는 말과 행동을 배우는 것이 전부였다. 즉 연설과 무술이 교육의 거의 전부였던 것이다. 이 둘은 공직자이자 전사로서의 기능이 요구되었던 고대 그리스 시민들에게 필수적인 능력이었다. 이는 이후에도 계속 반복된다. 고대 로마의 교육은 시민에게 필요한 기술인 웅변, 수사를 중심으로 모든 학문을 배치하였다. 또 이로부터 수백년 뒤 스스로 서로마 황제를 의 계승자를 자처했던 중세의 카를루스 대제가 발표한 학교조례는 훌륭한 신민을 양성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이라는 목적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이는 교육은 그것을 받는 사람의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기본 바탕에 전제해 있다. 그 능력은 경우에 따라서 전투력이 될 수도 있고, 지력이 될 수도 있으며, 혹은 생산력이 될 수도 있다.

인간자본론은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관철된다. 사회적으로는 투자된 결과 산출되는 능력이 그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관철된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개인이 그 능력을 획득함으로써 사회에서 자신의 지위와 보상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관철된다. 즉 인간자본론은 개인 차원에서는 많은 보상을 받기 위해교육을 받게 만들며, 사회 차원에서는 쓸모 있는 구성원을 생산하기 위해 교육을 하게 만든다.

19-20세기를 거치는 동안 인간자본론은 공교육의 비용을 전담한 민족국가에 의해 사실상 유일한 패러다임으로 강요되었다. 이미 18세기 라 샬로트(La Chalote)는 평화시에는 유능한 일꾼이며, 전시에는 맹목적 충성으로 무장한 군인을 양성하는 것이 공교육의 목적으로 공공연히 선언하였다. 또 라 샬로트는 표준화된 교육과정, 교과서 등을 이용해 숙련된 교사의 필요를 줄임으로써 투자를 줄이는데 성공하였다(Boyd, 1964). 이는 공교육 체제의 선두적인 나라였던 프로이센과 프랑스에 의해 채택되었고, 이를 수입한 일본에 의해 우리나라에 수입되었다.

후기산업사회에서는 그 비인간적 속성 때문에 전통주의와 진보주의 교육학 양측의 공격으로 거의 섬멸된듯 했던 인간자본론은 지식·정보사회의 도래와 함께 다시 일어서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 인간자본론이 교육의 과정 속에서 습득되는 노동자로서의 규율 등의 훈육적 요소도 강조했다면 새로 등장한 지식·정보사회의 인간자본론은 지식교육 그 자체를 생산력으로 간주하고 잇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적자본론은 21세기 공교육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공교육의 주요한 목적은, 경쟁적이고 점증하는 세계화와 지식정보사회의 변화되는 요구에 맞춘 국가노동력의 생산이다.”(Cochran-Smith, 2005).

오늘날 세계은행, IBRD, OECD, APEC 교육 포럼, 그 외 수많은 국제경제 기구들이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국제 무역기구의 서비스 무역에 대한 일반 협정(GATS)에 교육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이 견해에 대한 강한 지지를 암시한다. 이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노동력의 교육, 재교육 비용이 증가하자 이를 사회에 떠넘기고자 하는 기업들의 욕구가 반영된 것이다.

인간자본론 패러다임에 가장 적합한 교육과정 모델은 목표중심 교육과정이다. 주지하다시피 목표중심 교육과정은 최종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교육 활동의 체계적 배치를 가장 중요시하며, 특히 목표의 달성여부를 측정하기 위한 평가가 활동의 핵심을 차지한다. 목표중심 교육과정은 행동주의 학습이론과 결합하여 교육을 하나의 공학적 조작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정밀하고 양적으로 측정 가능한 평가에 교육 목표와 과정을 종속시키고 말았다. 이런 의미에서 목표중심 교육과정은 사실상 평가중심 교육과정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또 목표중심 교육과정은 오늘날 한국의 거의 모든 교육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 관철될 경우 맹목적인 입시교육과 영어 광풍의 원인이며, 사회적 차원에서 관철될 경우 획일적 강제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이홍우, 1992).

3)두 패러다임들의 실패와 그 최악의 조합으로서 한국 교육문제

오늘날 공교육의 이 두 패러다임들은 모두 강한 도전과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이 두 패러다임은 사실상 모두 실패했다.

인간자본론은 교육에의 투자가 실제 그 만큼의 경제적 산출이 되지 않는다는 여러 경험적 증거들에 의해 심각한 비판을 받았다. 우선 교육의 목적이 어떤 생산력으로 규정될 경우 이는 학습자 외부에서 부과되는 강제력이 되어 심각한 무기력과 소외의 원인이 된다는 점이 지적되며, 지나친 기능주의로 인해 정서와 인성을 경시하는 문제도 지적되고 있다. 오늘날 교육을 받을수록 학생들의 생각이 편협해지고 인성은 황폐해지는 저변에 인간 자본론적 교육 패러다임이 깔려있다(Kuehn, 2005).

인간자본론은 교사와 학생의 관계, 그리고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인간자본론은 오직 산출에만 초점을 맞춘다. 의도된 산출을 정의하고 그러한 산출과 관련되는 결과의 피드백 시스템을 유지함으로써 교육 통제의 권력은 소수의 손아귀로 집중된다. 교사들은 다른 사람이 제시한 교육의제를 수행하는 자동인형 노릇을 요구받는다. 자동인형 교사는 자동인형 학생을 길러내며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이 되는 공중의 생산을 가로막는다. 게다가 인간자본론은 인간을 판매 가능한 노동력과 등치한다. 만일 사람이 시장에서 팔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것은 우선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이 되어야 한다. 교육이 상품이 된다는 것은 표준화되고 측정을 통해 수치로 비교 가능해야 함을 의미한다(Kuehn, 2005). 평가의 내용이 가르쳐지는 내용과 방법을 정의한다. 깊이 있는 비판적 사고보다 평가에서 중요한 것이 실제가 되며, 교육학적 접근은 단지 학생들에게 평가될 것을 학습케 하는 전달 수단이 된다(이홍우, 1992).

그 결과 교사와 학생간의, 또 학생들 간의 복잡한 관계들은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교사의 능력은 목록화되고 평가는 획일화된다. 평가된 수치가 중요할 뿐, 학습의 영역을 확장하고 학습자와 공동체를 만들고 학습 환경을 풍부하게 하는 것은 모두 쓸모없는 것으로 버려진다. 이렇게 인간자본론적 교육 패러다임이 도달하게 되는 최종지점은 삭막하고 메마른 숫자로 가득 찬 교실이다. 인간자본론은 미래의 생존수단 제공을 미끼로 이 삭막한 교실로 아이들을 끌어들인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서는 인간자본주의가 전통적인 입신양명(立身揚名)교육관과 결합하면서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 했다. 이렇게 되면 교육의 내용과 목표는 지극히 협소한 개인적 성공과 출세에 종속되게 된다. 만약 그것이 성공과 출세에 도움이 된다면 유교 교육이든, 서양 학문이든, 친일교육이든, 심지어 부도덕한 교육이든 가리지 않고 투자하는 것이 한국 교육의 현실이다. 이제 입신양명을 위한 개인주의적 인간자본론은 가히 교육광기의 경지에 이르러 학생들의 신체와 정신을 파괴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반면 전통주의 패러다임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고답적이라서 학생들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비판을 많이 들어왔다. 또 이는 교육을 통한 신분제의 관철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비판을 받았다. 전통주의 교육은 학교를 학생들의 삶과 경험과 전혀 무관한 의미 없이 강요되는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최근 전통주의 패러다임의 가장 중요한 축인 인간 정신의 부소능력들의 훈련과 전이효과라는 형식 도야론의 명제들이 경험적 연구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또 다중지능 이론 등의 등장으로 고전을 중심으로 편성된 인문학의 특권적 지위 주장이 어렵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전통주의 교육의 목적과 과정이 모두 추상적이라서 교육자의 책무성을 부과하기 어렵고, 학습자 성과를 확인할 수 없어 엄청난 국고를 사용하는 공교육에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이는 곧바로 생산과 직결되지 않는 학문과 교과의 축소, 직접적인 산학협동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주장으로 연결된다.

두 패러다임의 실패의 원인은 공교롭게도 동일하다. 그것은 교육을 다른 가치 있는 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 목표가 유능한 노동자가 되었든, 아니면 좋은 문화적 전승을 받은 교양인이 되었든 그것은 교육 밖에서 설정된 좋음이다. 이렇게 교육이 다른 좋은 것의 수단으로 사용되면 교육은 짧을수록 좋은 것이 되며 장차 얻게 될 좋은 상태를 위해 거쳐 가야 하는 필요악과 고역이 된다.

교육을 통한 입신양명의 욕구가 강한 한국의 부모들은 한 결 같이 자녀가 인문교육을 받아 고위직에 진출하거나 정신노동에 종사하기를 희망하였다. 그 결과 교육의 목적 전반이 왜곡되었다. 개인주의적 인간자본론과 전통주의 교육이 결합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 교육의 근원 문제를 야기시킨 최악의 조합이다.

이 최악의 조합은 국가, 기업이 유포시킨 인간자본론이 개인 차원에서 엉뚱하게 수용된 결과다. 사실 국가나 기업의 입장에서는 인문교육을 받은 학생이 늘어나는 것이 달가운 일이 아니다. 소수의 엘리트만 그런 교육을 받고 대다수는 직업교육을 받아서 유능한 노동력으로 성장하는 것이 인간자본론 패러다임의 핵심이다. 그러나 부모에게 내면화된 인간자본론은 전혀 엉뚱한 것이다. 그들 역시 교육의 과정보다는 산출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점에서는 인간자본론을 공유하고 있다. 만약 대학을 가지 않고도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면 자녀를 굳이 대학에 진학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전통주의자들은 아니다. 다만 전통주의 패러다임에 입각한 인문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사회적 대우가 더 높기 때문에 자녀가 그 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문화적 전승, 인격의 도야 따위는 관심사가 아니다.

그 결과는 교육 내용과 학습방법에서는 획일적이고 답답한 전통주의적 패러다임이 거의 고착화되어있는 반면, 교육 목적에서는 개인주의적 인간자본론이 기승을 부리는 최악의 조합이 탄생하였다. 전자로부터는 최악의 관료주의와 획일성이, 후자로부터는 살인적인 입시경쟁이 파생되었다. 전통주의와 인간자본론의 기묘한 결합은 한국 교육문제, 아이들의 고통의 근본악이다. 차라리 원래의 인간자본론은 어쨌든 생산력에는 기여하지만, 한국의 인간자본론은 생산력에 기여하지 못하는 고등실업자만 양성한다. 어쨌든 원래의 전통주의는 문화의 전승에는 기여하지만 한국의 전통주의는 문화적 전승을 시험점수 받고 나면 잊어버려도 되는 것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이른바 숙의민주주의에 대하여(1)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학종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학종 다음의 셀프학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