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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언론은 학생을 선동하지 말라

최근 수업시간에 한 말 때문에 설화를 겪는 교사들이 생기는 모양이다. 아마 설익은 정치적인 발언 때문일 것이다. 나는 기계적인 중립을 경멸하고, 스스로 좌파라고 공개하는 입장이지만 수업시간을 이용하여 나의 정치적 견해를 주입하는 행위 역시 경멸한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나에게 반론할 수 있는 대등한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중립적인 수업조차 "우편향이 아니라는 이유로" 좌편향으로 몰리는 이 나라의 실상은 나의 균형잡힌 수업조차 편향되었다라고 딴지 걸 지경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 해도 이번에 김포와 또 어딘가에서 문제가 된 국사, 윤리 교사의 발언 내용은 도가 지나쳤다. 그런데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고 관련교사의 처벌을 요구하는 보수언론의 대응은 더욱 도가 지나치다. 이들은 은근히 이런 녹취가 많이 나와서 좌빨 교사들을 싹 쓸어냈으면 하는 것 같은데, 이런 그들의 태도는 자칫 철없는 학생들에게 불법행위를 조장할 수 있다.

수업내용을 녹취한 다음 이것을 인터넷에 공개하는 행위는 그 내용이 뭐건간에 매우 심각한 범죄행위다. 더군다나 그 녹취가 당사자의 동의를 받지 않았을 경우, 또 녹음자가 그 녹취에서 대화자로 등장하는 인물이 아닌 경우 더욱 명백한 불법행위다. 물론 이런 불법 녹취를 근거로 어떤 사법적인 조치도 취해질수 없으니, 만약 이걸 근거로 해당교사에게 어떤 징계가 주어질 경우 당연히 그 교사들이 행정소송 걸면 승소한다. 문제는 이 교사들의 승소=녹취공개 학생들의 처벌 이라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법은 통신보호 비밀법이다. 이 법이 생각보다 무섭다. 벌금형도 없이 바로 징역이다.


통신비밀보호법

제3조 (통신 및 대화비밀의 보호)
①누구든지 이 법과 형사소송법 또는 군사법원법의 규정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우편물의
검열,전기통신의 감청 또는 통신사실확인자료의 제공을 하거나 공개되지 아니한 타인간의 대화를 녹음 또는 청취하지 못한다.

여기서, 적법한 녹취는 피녹음자의 동의를 받았거나, 혹은 피녹음자에게 녹음이 된다는 어떤 신호가 주어진 경우, 그리고 몰래 녹음한 경우는 피녹음자가 녹음자 자신인 경우다. 즉, 상대에게 녹음을 한다고 어떤 형태로든 알리면 적법하며, 몰래 녹음인 경우는 자신의 대화내용을 녹음하는 중에 상대의 대화가 포함된 경우라야 한다. 본인은 아닥한 상태에서 타인간의 대화를 녹음할 경우 이건 불법이 된다. 더더군다나 이걸 인터넷에 올렸다면, 더더군다나 이걸 어느 학교의 누구라는 것을 밝히고 올렸다면 엄청나게 심각한 범죄가 된다.

제16조 (벌칙) ①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과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1. 제3조의 규정에 위반하여 우편물의 검열 또는 전기통신의 감청을 하거나 공개되지 아니한 타인간의 대화를 녹음 또는 청취한 자
2. 제1호의 규정에 의하여 지득한 통신 또는 대화의 내용을 공개하거나 누설한 자


10대들은 아직 사회에 충분히 적응되지 않아서 보다 세심히 접근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구체적인 정치적 견해를 강요하듯이 쏟아내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지만, 그들이 불법행위인줄도 모르고 모방을 할 위험을 방치하는 것도 명백한 잘못이다. 물론 언론사들이 청소년들에게 불법을 조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따라해보고 싶은 행위를 보도할 경우에는 그런 위험에 대한 균형잡힌 예방책도 반드시 제시해야 할 것이다. 혹시 몇몇 신문 보도를 보고 "그럼 나도 선생 수업 녹음해서 엿먹여야지" 할 학생들이 있을까봐, 그러다가 무책임한 언론의 선동보도에 순진한 피해자가 양산될까봐 우려되어 몇 글자 적어본다.

참고로, 오장풍 사건은 그럼 뭐냐 할지 모르는데, 이 경우는 형사소추가 안되는 어린이의 작품이라 해당이 없다. 하지만 이번처럼 고등학생이 이렇게 할 경우는 녹음당한 교사가 고소할 경우 빠져나갈 길이 없다. 그리고 보수언론의 선동처럼 교육청이 그 녹취를 근거로 징계를 의결하면 어쩔수 없이 고소는 이루어질수밖에 없다. 다들 현명하게 판단하기 바란다. 교사들도 자중하고 언론도 자중하라. 피해는 학생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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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의 민주화는 과연 실패했는가?

홍기빈의 "민주화는 실패했다."라는 글이 무척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얼핏 보면 훌륭한 글이다. 하지만 디테일을 보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글이라 한 마디 안 할수가 없다. 더구나 학교에서 정치, 경제를 가르치는 사회교사로서 이런 식의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글은 반드시 눌러 놓아야 한다.
(원문: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0212041045)
이 글의 얼개는 그 동안 1987년의 성과를 냉소하는 민주화 냉소글의 표준적인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라는 논리다.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자본의 지배 등의 말로 슬쩍 바뀌었을 뿐이다. 즉 정치권력을 아무리 교체해 본들 자본권력, 시장권력의 지배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런 식의 냉소글은 1987년의 성과를 폄하하기 위해  "형식적 민주주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다. 이들이 말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란 3권분립, 보통선거,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통한 권력의 감시로 대표되는 그런 정치제도다. 한 마디로 우리가 민주정치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5년마다 한번씩 왕을 교체하는"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 5년마다 한 번 왕을 교체하는 것 말고, 속살까지 민주화 되어야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속살까지의 민주화는 결국 자본의 지배, 시장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삼성공화국론의 또 다른 변주다.  그런데 다당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의 의미를 형식적 민주주의로 폄하하는 논리의 뿌리는 1980년대때 이 논리를 펴는 지식인들의 상당수가 학습했던 러시아 혁명론의 연장선상에 닿아 있다. 1차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2차혁명은 볼셰비키 혁명 이런 식의.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이제 1987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과는 한계에…

1987년 6월 항쟁 (1) 1980년대의 전형적인 가두시위와 폭력 시위가 발생한 원인

이제 나도 어쩔수 없이 젊은이들로부터 "옛날 얘기 해주세요" 소리를 듣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2016년 11.12를 비교하는 기사들을 보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어린이였던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최대한 기억을 소환해서 적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시위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11.12일에 일부 과격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모여서 폭력으로 저지선을 뚫고 행진하는 그런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당시 시위대의 폭력은 매우 처량한 폭력이었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시위를 하기 위한 10여분의 시간을 벌기 위한 폭력이었으니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두시위(가투)의 양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 시대에는 집회신고 이딴거 없었습니다. 시위는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였으며, 당연히 도심의 시위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시위는 불법시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의 가두투쟁은 철저히 "비선"을 통해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난 NL이 아니라 PD였으니, 조직 단위의 이름은 PD기준으로(1987년에는 CA) 씁니다.

각 대학의 투쟁국(대체로 각 단과대학에서 제일 과격한 자가 단과대학 투쟁국장이 되고, 이들이 모여서 각 대학 투쟁국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 투쟁국장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전술을 세웁니다.)장들이 모여서에서  '택"(택틱, 즉 전술의 준말)을 짭니다.

주로 택은 "오후 17시 30분 종로3가 사거리에서 집결하여 시위하고 경찰이 뜨면 일단 종로통 쪽으로 도망가서 해산 했다가 19시에 남대문 로터리에서 재집결 한다. 이때 퇴로는 남대문 시장이며 회현역을 통해 귀가한다. 17시30분의 동은 아무개 학형, 19시 동은 아무개 학형이며, 전투조는 이리저런 방식으로 물량을 공급한다" 이런 식으로 짜는데, 도청을 우려하여 철저히 …

민주시민은 책을 읽는다

민주주의는 단지 국민 다수의 통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처럼 많이 쓰이는 말이 또 있을까? 좌우보혁을 떠나 저마다 민주주의를 말하며, 심지어 북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막연하게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정치”, 혹은 “다수에 의한 정치” 정도로 말할 뿐이다. 물론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를 뒤져보면 수천 년 전 카이사르에서부터 나폴레옹, 무솔리니, 히틀러, 최근의 두데르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독재자가 되었다. 이들의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의 지지, 국민 다수의 지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수의 국민이 어떤 국민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튼튼한 앎과 충분한 성찰에 기반하고 있다면 다수의 지지가 곧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호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다만 폭민정치, 우민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머리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머리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다.
민주주의는 훌륭한 시민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 페리클레스는 자신들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자랑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은 나랏일에 대해 관심이 많고 잘 알고 있으며, 나랏일을 결정하기 위해 토론을 하며, 충분한 토론 없이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농민이나 노동자조차 지역사회의 쟁점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받은 깊은 감명을 기록해 두었다. 고대 아테네나 건국 시기 미국은 모두 ‘훌륭한’ 시민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저 국민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 …